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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빈농인가 부농인가?

by 중은우시 2010. 4. 11.

글: 제오천추(第五千秋)

 

과거 중국은 오랫동안 가정성분(家庭成分)을 아주 중요시했다. 모택동은 중국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고, 세계에서 저명한 지도자급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가정성분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무엇인가?

 

많은 국내외인사들은 소산(韶山)의 모택동고거를 참관할 때, 모택동고거와 모택동기념관의 해설원 혹은 소산의 관리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은 모두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순박한 농민가정 혹은 혁명가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출판된 여러 저작들을 뒤젹여보면, 모택동의 가정성분에 대한 기술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1936년 10월, 모택동은 미국의 유명한 기자 에드가 스노우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부친은 원래 빈농(貧農)이었다. 젊었을 때, 빚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이 군인이 되었다. 그는 여러 해동안 군대에 있었다. 나중에 그는 내가 출생한 마을로 되돌아왔고, 작은 장사도 하고 다른 일도 해서 먹고 살았다. 근검절약해서 약간의 돈을 모아서 땅을 샀다. 이때 우리 집에는 15무(1무는 200평)의 땅이 있어서 중농(中農이 되었다. 매년 60담(擔)의 곡식을 거두었고, 일가 5식구가 1년에 모두 35담을 먹었다. 1인당 개략 7담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매년 25담이 남았다. 나의 부친은 이 잉여곡식을 이용하여 자본을 모아서 나중에 다시 7무의 땅을 산다. 이렇게 하여 우리집안은 "부농(富農)이 되었다."(에드가.스노우 <<서행만기>>, 삼련서점 1979년 12월판, 105-106페이지)

 

영국런던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미국인 쉬람은 <<모택동>>이라는 책에서 모택동의 가정성분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비록 중국농촌은 아주 가난했지만, 한 사람이 살기에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중농'으로는 충분히 분류할만하고 심지어 부농으로까지 볼 수 있다; 다만, 모택동도 아마 그의 집안의 계급성분을 약간 과장한 것같다. 이는 아마도 그가 이전에 부친과 격렬한 갈등이 있었고, 그다지 효도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마도 그가 1936년에 이를 가지고 학생들 중의 많은 부농자제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계급출신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어찌되었건, 모택동의 부친이 나중에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든간에, 그가 빈농출신이라는 점은 분명히 그의 가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스튜어트 R 쉬람 <<모택동>> 홍기출판사, 1988년 8월판, 제1-2페이지)

 

쉬람의 글에서는 그가 모택동의 가정성분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확실히 그는 모택동이 그 스스로는 부농출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그가 그의 집안의 계급성분을 약간 과장했던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모택동은 빈농출신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 대택승(大澤昇)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 모택동이 '부유한 중농의 장남'으로 표현하고 있다.(대택승 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삼일서방, 1988년 4월판)

 

그러나, 중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은 모두 모택동의 가정성분이 당연히 빈농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찌기 1929년 4월, 국민당정권은 모택동 일가의 소산에서의 모든 가옥, 가산과 전답을 몰수했다. 1950년, 전국은 농촌에서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해방전 3년간 보유한 가산(주로 부동산)에 따라 가정성분을 나누었다. 호남은 1949년 8월 5일 평화롭게 해방되었다. 상담이 해방된 시간은 1949년 8월 15일이다. 소산이 해방되기 3년전은 1946년이다. 그때 모택동은 국민당정부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아직 반환되기 전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들은 모택동의 가정성분이 빈농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택동의 가산은 비록 일찌감치 국민당정부에 몰수되었지만, 그의 부친이 건재할 때에는 22무의 토지를 구입했고, 집안에는 5식구밖에 없었다. 평균 1인당 4무이상의 땅을 점유한 것이다. 당시 소산의 경우 1인당 평균 0.93무의 토지를 보유했다. 이외에 모택동의 부친은 소작농을 둔 적도 있다. 그러므로,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부농으로 평가해야 한다.

 

모택동의 가정성분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일은 당시에 토지개혁작업을 담당했던 소산향(당시는 청전향)의 농회주석 겸 향장인 모인추(毛寅秋)에게 큰 난제였다. 그는 모택동이 1936년에 스노우와 얘기한 내용도 몰랐고, 모택동의 집안은 원래의 재산으로 하면 당연히 부농으로 구분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부농의 성분이 위대한 혁명지도자의 집안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내고 회신을 기다렸다.

 

모인추가 모택동에게 보낸 서신의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고향인민은 당의 영도하에 당신의 관심하에 토지개혁작업을 하고 가정성분을 구분하고 땅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렀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소산은 산이 많고 밭이 적다. 개략 계산해보면 1인당 0.93무정도이다. 당신의 고향집에서는 몇 사람이 소산에서 밭을 분배받을 것인지? 특별히 보고드리니, 지시를 바란다.

 

향정부의 곽비서는 모인추가 모택동에게 쓴 서신을 보고 내용이 너무 애매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정성분에 관한 것은 왜 안 적었느냐?"

 

모인추는 대답한다: "주석이 서신을 보면, 우리의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과연 서신을 보낸지 얼마되지 않아, 모택동은 모안영, 모안청이 소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산향에 그의 뜻을 전달한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재산은 농민에게 나누어주라.

2. 부농으로 구분하라. 책임을 벗을 수 없다. 300위안을 보증금으로 지급하라.

3. 인민의 정부는 법집행에 사심이 들어가서는 안되고, 정책에 따라 처리하라. 그래야 인민이 정부를 믿는다.

 

이렇게 하여, 소산향은 모택동의 의견에 따라, 모택동의 가정성분을 부농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과거에 소산의 모택동고거를 참관하러 오는 국내외인사들에게 모택동의 가정성분을 소개할 때는, 일반적으로 모택동이 부농가정출신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순박한 농민가정 혹은 혁명가정 출신이라고만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