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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이도순(李途純): 타이즈나이(太子奶)의 도박실패

by 중은우시 2009. 1. 3.

글: 호가원(胡家源)

 

"중국유제품업계 최초의 미국상장기업"이라는 명칭을 얻기 위하여, 타이즈나이(太子奶)의 오너인 이도순(李途純)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하나의 도박판을 벌였다.

 

지금 그는 도박에 졌다. 그는 자기 명의의 건물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타이즈나이의 일부 채무에 충당하고, 이 후난(湖南) 최대의 민영유업기업을 순식간에 외국인의 손에 넘겨 외자기업으로 변모시켰다.

 

투자은행이 최초에 투입한 것은 7300만달러이고 이후 나중의 양도비 4.5억위안에 다시 아직 투자되지 않은 3000만달러의 자본금을 합하면, 타이즈나이의 실제매도가격은 겨우 12억인민폐에 불과하다. 이도순이 2007년초에 말했던, "연내상장, 20억공모"의 거대한 계획과 비교하면 이번 헐값매각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일찌기 국유기업의 간부를 지낸 이도순은 일찌기 서점, 주점과 비디오점을 운영한 바 있다.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한 적도 있고, 식량과 식용유를 판 적도 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성공은 한장의 "차용증"과 관계있다.

 

1993년, 이도순은 고향인 후난 현지의 한 은행책임자를 찾아가서, 10만위안을 빌려서 모주석탄생100주년 달력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담보도 없고 저당물도 없는 상황하에서, 그는 이 차용증만을 들고 이 돈을 얻어냈다. 이 돈은 바로 200만위안으로 불어난다.

 

이것은 지금 보자면 완전한 한판의 도박이야기이다. 이것은 그의 창업사를 장식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가 되었고, 점차 그가 일을 하는 풍격이 되어 버렸다.

 

1996년 3월, 주주(株州) 타이즈나이공장을 설립한다. 이도순은 발기인이자 제1대 공장장이다. 바로 1997년 회사가 생산을 확대할 때, 이도순은 놀랄만한 일을 벌인다. CCTV의 황금시간대의 광고를 8888만위안의 가격을 써넣어, 일용소비품광고를 얻어낸다. 그런데, 당시 전체 타이즈나이의 자산총액은 아직 이번 광고낙찰금액에도 미치지 못할 때였다. 직원들은 반년여동안 급여를 받지 못했다. 이도순 자신도 CCTV입찰참여를 위한 20만위안의 입장권을 빌린 돈으로 샀다.

 

다시한번 "차용증의 이야기"로 배수진을 친 것이다. 이도순은 기적적으로 8억위안의 주문을 따낸다. 타이즈나이는 "CCTV광고왕"이라는 명성이 널리 퍼져갔다. 그리하여, "일출(日出)"이라는 상표의 타이즈나이는 심지어 한때 하이테크프로젝트로 1998년 국가화거(火炬)계획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번에도 이도순은 도박에서 이겼다.

 

1990년대중반, 액체우유와 요구르트를 대표로 하는 유제품시장은 명실상부한 "금광"이었다. 1996년부터 2002년까지의 사이에, 국내 액체우유으 연성장률은 38%에 달했고, 소비량은 유제품 소비량총량에서의 비중이 1995년의 66%에서 2002년에는 74%로 늘어났다.

 

2002년, 액체우유를 주로 공략하던 멍뉴(蒙牛)의 판매수입은 16.7억위안에 이르고, 이리(伊利)는 40.10억위안에 이르렀으며, 광밍(光明)은 60억위안에 이르렀다. 타이즈나이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타이즈나이의 공식수치를 보면, 1997년의 회사판매수입은 겨우 500만위안이고, 2001년에 비로소 5000만위안에 이르고, 2002년에는 전체그룹의 판매수입이 약 1.5억위안이며, 순이익은 2900만위안에 이르렀다.

 

통계에 따르면, 5년전 중국의 1인단 우유소비량은 8.6리터에 미치지 못했다. 유산균유제품은 더더구나 전체시장의 0.1%에 미치지 못했다.

 

이도순와 초기의 타이즈나이에 있어서, 유산균음료시장이라는 다른 유업계의 거두들이 관심두지않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회를 잡았다.

 

비록 이도순은 타이즈나이를 중국유산균음료시장의 "계몽자 겸 보급자"로 포지셔닝하고, 마케팅에서 성공을 거두지만, 신속히 국내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그는 비통상적인 방식을 쓰게 된다.

 

"삼고(三高)모델"은 이도순이 찾은 필살기였다. 소위 "삼고"는 고매입가격, 대리상에 고액의 수수료, 고액의 마케팅비용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타이즈나이제품을 판매하면 많은 이윤을 얻게 해주었다. 대폭의 이익부여를 통해서 이도순은 전국 29개성시, 300여개지급시, 3000여개의 현구역의 3000여명의 충성스러운 대리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타이즈나이는 심지어 아주 호화로운 연회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이런 이익부여는 "공짜 점심"은 아니었다. 하급대리상은 반드시 선급금을 지급해야 했고, 제품이 생산되고나서 다시 제품을 공급했다. 이와 동시에 이도순은 공급상들에게 먼저 원재로를 배송해줄 것을 요청한다. 제품을 팔고난 후에 다시 대금지급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타이즈나이의 전후방의 구매판매는 변형된 융자과정이 되어 버렸다.

 

"한 대리상이 매월 5만위안의 제품대금을 입금하는데, 전국 3000여곳이면 매월 1.5억위안이 되고, 매년 거의 20억위안이 된다" 후난 현지의 한 대리상이 계산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타이즈나이는 거의 '빈 손으로 늑대를 잡은 것'이다.

 

"차용증 이야기"는 다시 한번 벌어진다. 대리점들이 타이즈나이를 믿고, 전력을 다하여 그들을 위하여 광고하고 프로모션하게 하기 위하여, 이도순은 1년에 4억위안의 광고비를 투입하겠다고 표시한다. 그러나, 위의 대리상은 원망스럽게 말한다. 그들은 그저 매년 1월에서 2월까지 타이즈나이가 대리상을 모집하는 황금시간에만 가끔 CCTV에서 이런 광고를 볼 수 있었을 뿐이라고.

 

한 타이즈나이의 고위 경영진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이도순의 업무핵심은 바로 널리 대리상을 모집하고, 사방에서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2007년 한해에만 타이즈나이는 초상은행 장사분행, 중국은행 주주분행, 황강분행의 3곳 은행분행으로부터 각각 3억위안, 2억위안과 1.3억위안의 대출을 받았다. 후난 현지의 거의 모든 은행에 타이즈나이는 대출기록이 있다. 주주시 내지 전체 후난성의 대표기업이므로 매번 자금이 부족하게 되면, 타이즈나이는 항상 현지정부와 금융기관의 보살핌을 받았다.

 

대리상의 선수금과 은행대출금을 가지고, 이도순은 수년동안 급격하게 확장을 했다. 그는 이 돈을 가지고 30여개성시, 3000여개현구에 100개의 마케팅대구역을 두고, 3000여개의 대리상과 10여만의 2급도매상을 포함한 마케팅네트워크자산을 갖추었다. 전체 타이즈나이집단의 가장 가치있는 자산이 된다. 이것은 이도순이 자랑하는 성과이다.

 

바로 타이즈나이의 이 우수한 자산을 보고, 영련(英聯, CDC Group),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의 세 투자은행으로부터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에 7300만달러를 이도순에게 건네주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시티은행, 싱가포르성전(星展)은행등 6개의 국제은행을 소개해주어, 타이즈나이는 5억인민폐를 무담보, 무저당 저리로 3년기간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그러나, 고액수수료, 고마케팅비로 이 소위 '우량자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타이즈나이는 '고속확장, 저이윤율'의 댓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한걸음 한걸음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이도순의 대담한 도박은 깊은 숨은 우환을 남기게 된다.

 

2004년 6월, 멍뉴는 영련투자 및 모건스탠리의 자본투자로 성공적으로 홍콩에 상장한다. 이는 타이즈나이를 포함한 국내의 여러 유업기업을 자극했다.

 

당시의 이도순은 이렇게 말했다. 타이즈나이는 주식구조로 보거나 이윤으로 보거나 해외상장에 필요한 기준은 이미 충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탠다드 차타드은행, 베어링 펀드등 국제금융기구와 접촉을 시작했고, 2005년에는 성공적으로 해외에 나가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다만, 주주시 국유자산투자경영유한공사와 후난성신탁투자유한책임공사는 여전히 타이즈나이집단의 근 28%에 이르는 국유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타이즈나이의 대출상황을 손금보듯이 잘 알고 있는 현지정부는 걱정이 앞섰다. 투자은행자금이 들어온 후, 국유자산은 더욱 큰 시장리스크에 놓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도순이 전략투자자를 끌어들이는 일은 여러 곡절을 겪는다. 2006년초가 되어서 비로소 후난성 금융증권판공실상장판공실이 타이즈나이는 '잠정적으로 상장을 중단한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그리하여 이도순의 열정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도순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1월과 8월, 그는 두번에 걸쳐 말이 많은 가격으로 타이즈나이의 국유법인주 전부를인수하고, 민영화개조를 완성한다. 그리고 두번째 상장과정을 시작한다.

 

이번에, 그는 멍뉴를 도와 상장에 성공한 영련투자를 선택한다. 마침 상대방도 '다음 번 멍뉴'를 찾고 있었다. 쌍방은 바로 마음이 통했고, 1개월만에 의향서를 체결한다. 영련투자는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를 불러 함께 타이즈나이에 투자하로독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2006년말, 타이즈나이는 해외상장을 하기 위하여 아주 철저한 자산구조조정을 하여, 상대적으로 우량한 유업자산은 타이즈나이집단에 넣고, 부채가 많은 비유업자산은 일출강남집단으로 넣었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타이즈나이집단의 자산은 숫자상 많이 늘었지만, 일출강남집단이 타이즈나이집단에 거액의 채무를 진 것이 되었다.

 

확실히 타이즈나이의 당시 재무상황은 아예 미국뉴욕증권거래소의 심사를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사베인스-옥슬리 법으로 엄격한 내부통제로 유명하다.

 

"이들 상황을 투자은행이 잘 몰랐을 리 없다" 한 투자자문회사의 인사가 한 말이다. "상장이 저지된 상황하에서 투자은행이 일정한 수준의 수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시에 경영진을 장려하여 자신리스크를 낮추기 위하여, 투자은행은 투자협의서에 도박조항을 추가하게 된다"

 

사업이 한창 전성기에 올라있던 이도순은,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회계법인도 미국회계준칙에 따른다면 타이즈나이에 대하여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연속3년간 재무제표에 무보류의견을 낼 수가 없을 정도이다. 2007년 3월, 영련투자의 타이즈나이프로젝트책임자인 집행파트너 진백송이 돌연 사직한다. 타이즈나이의 상장은 다시 한번 걸림돌을 만난다. 세 투자은행은 거의 인내심을 잃었다.

 

이때의 이도순은 그저 새로운 상장방안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즉 더 이상 타이즈나이를 해외에 통합상장하지 않고, 그가 마케팅업무, 제조업무와 기타업무로 분할하여(그룹은 조달 무역위주로 하며 약간의 부동산, 건물관리가 있다), 각각 가치평가를 잘해주는 서로 다른 곳에 상장하는 것이었다.

 

2007년 10월, 미국 서브프라임위기가 갈수록 심해질 때, 이도순은 새로운 상장계획을 내놓는다: "2008년 올림픽전에 최소한 1개의 기업을 먼저 상장시킨다. 3년의 시간을들여 분할한 몇 개의 기업을 상장완성한다." 이것은 타이즈나이의 오랜 상장추구에서 취후의 발버둥이었다.

 

이도순이 계획을 실현하는 날을 기다리지 못했다. 전체 2008년은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국내은행이 신용대출을 줄이고, 다시 멜라민사건까지 발발했다. 타이즈나이는 업계의 불황을 겪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도순은 할 수 없이 지분양도계약에 자기의 이름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 * * * * *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타이즈나이와 멍뉴를 비교해서 논하기를 좋아한다.

 

똑같은 유제품기업, 똑같은 국제투자은행의 투자, 똑같은 도박조항.

 

멍뉴는 성공적으로 상장하고, 투자은행들이 당초에 투입한 5억인민폐는 짧은 3년내에 약 26억홍콩달러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투자회수율이 500%에 이르렀다. 회사가 상장한 해의 실적이 뛰어났으므로, 모건 스탠리, 영련은 사전에 도박계약을 해지하고, 뉴근셩(牛根生)은 포브스 부호랭킹이 이름을 올렸고, 한때 주목을 받았다.

 

타이즈나이는 투자 - 채무상환 - 재투자의 악순환에 빠졌고, 경영상황이 악화되어 도박조항이 발동되어, 쓸슬히 퇴출당했다. 영련등의 투자은행은 어쩔 수 없이 인수받았는데, 사실은 그들도 패배자이다. 그저 창업자의 "보상"을 받는 바람에 최종손실을 약간 줄였을 뿐이다.

 

뉴근셩의 당초 고집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이도순도 타이즈나이에 자본도입의 최저선을 그었었다: 상대방은 그저 재무투자자의 신분으로 지분점유율은 1/3을 넘기지 않는다. 당시 멍뉴의 자본구조는 아작 약소해서, 지배주식을 확보하려면 일부 경영권과 의사결정권을 내놓아야 했었다; 그러나, 이도순이 원한 것은 단순한 지배주식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번 매체에 말한 바 있다: "국제투자은행은 우리가 정한 게임규칙을 따라야 한다. 구체적인 경영관리에는 참여할 수 없다" 사실상 그는 그렇게 해냈다.

 

기업경영관리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이도순은 거의 모든 리스크를 끌어안았다. 그는 자신을 가지고 시장이 가장 좋을 때를 예측표준으로 삼아, 스스로를 실적도박계약에 묶어버렸고, 무한 책임의 족쇄를 걸었다.

 

만일 갑자기 발생한 미국의 서브프라임위기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멜라님분유스캔들이 아니었다면, 이도순은 아마도, 이 겨울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고치를 깨고 나비가 되는 계절까지 기다릴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2,3년에는 성공적으로 해외자본시장에 상륙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금방 멍뉴를 쫓아갔던 것처럼, 타이즈나이의 급진적인 경영방식과 최초에 체결한 도박조항의 의미를 다시 한번 해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도순은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도적이라는 이치를 잘 알았다.

 

다만 그는 뉴근셩보다 운이 약간 모자랐다. 그는 아마도 도박과정에서 시기를 절대적으로 잘못잡은 것이다.

 

멍뉴는 수년전에 상장의 길을 걸었다. 함께한 것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거시경제환경과 중국개념주에 빠진 국제자본시장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정말 사건사고가 많은 시절이다. 금융쓰나미가 국내의 돈줄을 꽉 죄고 있고, 수출은 줄어들고 소비력은 약화되었다. 전세계 주식시장은 모두 바닥을 기고 있다. 타이즈나이는 경제가 번영할 때, 집적된 많은 문제와 리스크가 급전직하의 시장환경하에서 집중적으로 폭발했다. 실작성장은 헛소리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도손은 맹목적인 자신이 낳은 쓴 결과를 스스로 삼켜야 했다.

 

사실상, 최근 일정기간동안, 금융쓰나미의 영향하에 도박계약으로 곤경에 빠진 기업이 한 둘이 아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부동산기업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2008년 홍콩에 상장한 근 20개의 내지 부동산기업이 당초에 전략투자자를 유치할 때, 고가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투자은행에 적게는 2억달러, 많게는 5억달러를 빌렸고, 투자은행은 평균연투자회수율 30%가량을 요구했다.

 

그러나 판매량이 줄고, 집값이 하락하고, 대차대조표의 캐시플로우와 재무상황이 악화되는 등등의 원인으로, 그들은 갈수록 커지는 경영불확실성에 시달린다. 20개이상의 상장기업중 겨우 2,3개의 기업만 상장에 성공했다. 자본시장은 부동산에 대한 가치평가를 점차 낮추고 있다. 다른 기업이 정한 기한내에 성공적으로 상장하는 것은 거의 완수가 불가능한 임무가 되었다. 이것은 도박계약이 발동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자은행은 향후 더욱 높은 투자회수율을 요구할 것이다. 혹은 기업이 어쩔 수 없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Lose-lose의 국면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박은 어쨌든 제로섬(Zero sum)게임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