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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명청교체기의 진상(晋商)

by 중은우시 2008. 12. 10.

: 수은하(水銀河)

 

명영종(明英宗)시기의 희녕아(喜寧兒)로부터 명말의 오삼계(吳三桂)까지 전체 대명황조는 계속하여 매국노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견고한 보루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는 법이다. 이러한 자들이 존재했으므로, 명나라의 국운이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특히 명나라와 대치하던 누르하치, 홍타이시시대에 그들 부자는 아주 전문적으로 대량의 한인간첩을 매수해서, 명나라에 대하여 장기간의 간첩전을 벌였다. 심양, 요양등의 중요한 전투마다 이들 간첩은 아주 큰 파괴작용을 했다. 심지어 원숭환의 죽음도 이들과 관련이 있다. <<삼조요사실록>>에는 대량의 간첩이 요양에 가득하다” “간첩이 널리 퍼져있다등의 기재가 있다. 이로써 볼 때 후금은 간첩활동을 아주 왕성하게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간첩은 대부분 빈민, 유민을 후금의 눈이 된 것은 순전히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다. 진정 후안무치한 것은 천하제일부자들인 진상집단(晋商集團)이다. 그들은 조직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매국조직이다. 명나라의 매국노들 중에서 발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상(晋商, 산서상인)은 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까지 소급할 수 있다. 무사확은 당시 산서의 유명한 목재대상인이다. 이연 부자가 기병하여 수나라에 항거하고 당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무사확은 최대의 후원자였다. 재력을 가지고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성공한 후에 무사확은 주주의 하나가 되어, 공작의 작위를 받고, 개국공신의 하나가 된다. 태원은 당나라의 발흥지이다. 통치자들은 이 곳을 북경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우대를 해주었다. 이리하여 태원은 상업이 번화한 대도시로 성장한다. 한유는 태원을 낭낭한 북소리가 들리니, 아침에 일어나면 조정에 들어온 것같다고 했다. 송나라때에는 산서상인과 휘주상인은 전국의 양대상인집단으로 나란히 거명될 정도였고, 당시 중국상업의 대표자였다. 당시, 산서는 송나라와 요나라의 변경지대였다. 북송왕조는 필요한 전마(戰馬)를 대부분 북방의 요나라로부터 공급받았다. 요나라도 송나라의 수공업제품이 필요했다.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경력연간(1041-1048), 송왕조는 비단 2000여필로 산서가람에서 말을 사고, 다시 비단 3000여필을 주고 산서각주부에서 말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관방의 민간무역이 아주 성행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도 태원에서 평양(임분)의 일대에 있는 상인은 전국각지에 퍼져 있고, 거액의 이윤을 얻는다고 기록했다. 명나라에 이르러, 산서상인의 세력은 더욱 발전한다. 명나라때 전국에 비교적 규모가 큰 상업도시는 33개가 있었는데, 그중 산서성에만 태원, 평양, 포주의 세 곳이 있다. 이때 산서상인들은 자본을 상당히 축적했다: “평양, , 노는 전국에서 가장 부자가 많다. 수십만이 없이는 부자축에 끼지도 못한다

 

명나라말기에 이르러, 후금이 굴기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북, 산동등지의 인민들은 전란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로지 정명한 진상만이 손실을 입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국난을 이용하여 크게 돈을 벌어, 오히려 부를 확장했다. 당시 명나라정부는 누르하치부자의 철기군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다. 군수물자, 마필등 전쟁필수품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커졌다. 산서는 황토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석탄이 생산되는 외에 말이나 군수물자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진사대미, 심주소미가 생산될 뿐이고, 이것도 겨우 손바닥만한 땅에서 나온다. 겨우겨우 황제에게 진상품으로 바칠 정도의 수준이다. 게다가 명나라는 재정이 곤란하여, 관리들도 막무가내였다. 정부와 장사를 하는 것은 그저 부도수표만 받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내에서 장사하는 것은 희망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눈을 누르하치에 돌린 것이다. 당시의 동북은 엉망진창이었다. 인도신화에는 세 명의 신이 있는데, 창조신, 파괴신, 조화신이다. 창조신은 창조를 주관하고, 파괴신은 창조신이 만든 것을 부수기만 한다. 조화신은 양자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누르하치는 순수한 파괴신이다. 요동대지에 파괴활동을 벌이고, 건설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한 곳을 점령하면 모조리 빼앗아 가면 그 뿐이다. 당시의 요동은 쥐새끼도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 당연히, 누르하치가 건설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전쟁이나 사냥은 잘하지만, 농사나 기술은 하나도 몰랐다. 더욱 골치아픈 점은 당시에 자연재해가 계속되어, 굶어죽지 않는 것이 큰 문제였다. 기록에 따르면, 만력년간부터 시작한 소빙하시기에 물가는 계속 올랐다. 당시 후금의 통치지구에는 비록 70만의 인구밖에 없었지만, 백성들은 아들을 바꾸어서 서로 잡아먹고, 쌀값이 1석에 80냥까지 치솟았고, () 1필에 20냥까지 치솟았다.

 

진상은 이 점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장가구(張家口)를 기지로 하여 전국각지에서 상품을 사모은 다음에 관외를 왕복하며 무역활동에 종사했다. 후금정권에 대량의 양식, 의복, 취사도구등 기본생활물자를 공급한 것이다. 누르하치도 이들에게 잘해주었다. 인삼, 녹용, 가죽등 귀중물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간상들은 기쁘기 그지 없었다. 점점 쌍방간에는 깊은 이익관계가 형성된다. 간첩전을 중시하는 누르하치는 쌍방무역내용을 의복식품에서 정보까지 확대한다. <<청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천명3(1618), 당시 산동, 산서, 하동, 하서, 소항등지에 무순과 무역하는 자 16명에게 누르하치는 충분한 돈을 주고, 칠대한(七大恨)을 쓴 글을 주어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금 숭덕3(1637)에는 홍타이시가 만주귀족에게 100명의 한족장사치를 데리고 귀화성으로 가서 무역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청나라가 북경에 들어온 후, 군사비가 급증하고, 재정이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 이때 도찰원참정인 조가법, 장존인이 이렇게 건의한다: “산동은 양식을 운송하는 길이고, 산서는 상인의 길입니다. 하루빨리 두 곳을 초무해야 합니다. 두 성의 병력과 인민이 우리의 판도에 들어온다면, 재정이 충분해지고 국가의 돈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이로써 볼 때, 후금정권은 진상을 아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타이시가 전쟁에 필요한 화약 전부, 식량의 80%, 금속의 60%이상은 모두 이들 신용으로 유명한 진상에게서 조달받았다.

 

쌍방에 있어서, 이것은 윈윈의 매매이다. 후금은 약탈한 재물, 골동과 금은주보를 진상을 통하여 양식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약탈해온 사람들을 먹여살렸다. 요동의 쌀값은 나중에 4석에 1냥으로 안정된다. 인구도 수배 증가한다. 양식가격이 최고치보다 수백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거래의 상대방인 진상은 숭정15년에만 천만이상의 은량을 벌었다. 이들의 공적은 청나라가 북경에 들어간 후에 더욱 올라간다. 그리하여 황상(皇商)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청나라정부의 특수한 보살핌을 받는 진상은 중국의 북방무역과 자금운송을 독점한다. 그리고 전체 아시아지역에 발이 닿는다. 심지어 촉각을 유럽시장까지 뻗친다. 남으로는 홍콩, 캘커타에서 북으로는 이르쿠츠크, 시베리아, 모스크바, 페테르스부르크, 동으로는 오사카, 고베, 나카사키, 인천, 서로는 타르바가타이, 이리, 카슈카르에 모두 산서상인의 족적이 남아 있다. 어떤 상인은 몽골어, 카자흐스탄어, 위구르어, 러시아어로 북방소수민족 및 러시아인과 거래했다. 몽골초원의 낙타상인에서부터 오송구(상해)에서 바다로 떠나는 상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산서인들이 있었다. 후룬베이얼의 식초맛에서, 귀주 마오타이의 술맛까지, 모두 산서인들이 팔고 있었다. 산서상인들이 활동하던 지방유적지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감숙의 노서묘, 신강의 고성탑, 곤명 금전의 동정, 강소 양주의 항원, 안휘 호주의 화극루, 대부분이 산서상인이 만든 것이다. 안휘 치하집의 산서회관, 저명한 귀주 마오타이주는 1704년 산서상인 행화촌분주공장의 일꾼들이 현지의 양조인들과 공동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산사성인의 상호(字號)로 명명된 거리가 아직도 존재한다: 장가구의 일승창항, 빠오터우의 복성서항, 외몽고 커부뚜어의 대성괴가, 후허하오터의 정양항, 영무항등등, 동북에서는 먼저 조가호가 있고 나중에 조양현이 있었다내몽고에서는 먼저 복성서가 있고, 나중에 빠오터우시가 있었다”, 서북에서는 먼저 진익로가 있고, 나중에 서녕성이 있었다는 속어가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만일 진상이 중국역사상의 하나의 기적이라면, 이 기적의 배후는 추악한 매국노의 얼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