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이 유소기를 버리고 임표를 택한 이유는?

중은우시 2008. 10. 10. 21:58

글: 김산(金汕)

 

모택동과 유소기의 관계는 친밀한 전우로서 문혁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왔다. 다만, 1966년 제8기 11중전회에서 이런 혈우성풍(血雨腥風) 속에 맺어진 혁명의 정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1966년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을 접견했는데,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지금까지 후계자로 인정받았던 유소기가 실각하여, 당내 서열 2위에서 졸지에 서열 8위로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중공중앙정치국상임위원의 서열은: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진운, 임표, 등소평이었다. 다만, 8월 12일 개최된 11중전회에서 모택동의 제안에 따라 중앙영도기구를 개편하였는데, 모택동이 주석을 임표가 부주석을 맡고, 모택동, 임표, 주은래, 도주(陶鑄), 진백달(陳伯達), 등소평, 강생(康生), 유소기, 주덕, 이부춘(李富春), 진운(陳雲)이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도주, 진백달, 강생, 서향전(徐向前), 섭영진, 섭검영이 정치국위원이 되었다.

 

명단의 순서변화를 보면, 임표의 상승폭이 가장 크고, 유소기의 하락폭이 가장 심했다. 주덕, 진운도 서열 4위, 5위에서 서열 9위, 11위로 떨어졌다. 주은래는 여전히 서열 3위를 고수했고, 등소평은 오히려 서열이 한단계 올라갔다. 마치 문혁의 초기에는 등소평을 타도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모택동이 문혁초기 혹은 심지어 사청(四淸)때부터 유소기를 타도해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여러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1962년 칠천인대회에서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고, 임표에 대하여는 충분한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선대 공산당인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바로 유소기가 1945년 당의 제7차대회에서 모택동사상을 전당의 지도사상으로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을. 모택동도 말한 적이 있다: 삼일을 공부하지 않으면 유소기를 따라갈 수 없다. 1959년, 모택동은 2선으로 물러나고자 했고, 유소기를 국가주석으로 선택했다. 이는 당연히 후계자로 삼는다는 가장 중요한 신호이다. 1960년이 되어, 영국의 육군원수이며 제2차세계대전중 동맹군의 걸출한 지휘관중 하나인 몽고메리가 모택동을 접견했다. 그는 서방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세계각국의 지도자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잘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주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맥밀런, 드골과 같은 경우등입니다. 주석은 현재 이미 누가 당신의 후계자인지 확정했습니까?" 그러자, 모택동이 대답했다: "아주 분명하다. 유소기이다. 그는 우리 당의 제1부주석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바로 그이다" 몽고메리는 다시 물었다: "유소기의 다음은 주은래입니까?" 그러자 모택동이 대답했다: "유소기의 다음은 나와 관계없다..."

 

그때 임표는 모택동에게 기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임표는 비록 전공이 혁혁했지만, 경력이 유소기, 주은래에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경력이 중요했다. 그리고 임표는 직업군인이어서, 당무와 정부업무를 잘 몰랐다.

 

다만, 임표가 팽덕회의 뒤를 이어 국방부장이 된 후, 모택동사상을 해독하고 설명하는데 창조적이었다. 부대의 밑바닥에서부터 "사호연대", "오호전사"를 정하고, "4개제일" "삼팔작풍"을 제창했으며, 부대의 정치분위기를 농후하게 하여 모택동을 기쁘게 하였다.

 

1962년 1월 11일에서 2월 7일까지,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확대중앙회의는 칠천인대회라고도 부른다. 3년곤란시기에 국민경제가 붕괴직전까지 갔으므로, 전체 민족이 상상할 수 없는 댓가를 치렀다. 회의의 주류는 '조정, 충실, 공고, 제고'를 진행하여, 국민경제를 호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호전시키려면, 이전의 잘못된 기풍이 불러온 중대한 결과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의 시작단계는 유소기가 초안한 보고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보고는 충분한 조사연구 끝에 나온 것이다. 비록 당내의 적지않은 동지들이 여러해동안의 국가상황에 대하여 가슴아프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여지를 남겨두었다. 원고는 회의때 나누어 주었고,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더 이상 지속하게 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정한 후 국민경제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모택동의 발언은 논조가 달랐다: "61년 11월이래로, 우리는 연속하여 두 개의 회의를 개최했다...인대보고에서 전국형세가 아주 좋고, 밝다고 하였다. 이번 칠천인대회는 완전히 반대이고, 아주 어둡고 앞날에 대한 전망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인민에게 말하여야 하는가?"

 

모택동의 이러한 태도표명으로 형세는 급전직하했다. 다만 중요한 인물이 모택동을 도와서 발언을 해주어야 했다. 군대에서 적지 않은 고급간부 예를 들어 나서경(羅瑞卿) 대장등은 임표를 추천했다. 임표가 결국 발언했다. 임표의 발언은 아주 감정적이고, 조리가 분명했다. 그는 당시의 곤란한 결과를 "3년자연재해"로 치부했다. 이어서 격정적으로 말했다: "대약진 이래의 착오는 무슨 원인에서 생긴 것인가? 현재의 곤란은 바로 우리의 많은 것들이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모주석의 지도는 과거이든 현재이든 모두 정확하다...나는 수십년동안 몸으로 느꼈다. 모주석의 가장 뛰어난 점은 실사구시이다. 그는 항상 실제에서 출발하며, 항상 실제를 둘러싸고, 항상 조사연구에서 출발하여, 항상 단단하고 실질적이다. 무릇, 모주석의 지시가 존중되지 않고, 방해받을 때 문제가 생긴다. 수십년의 역사는 바로 이런 역사이다" 수천자의 말은 글자 하나하나 모택동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모택동의 감정은 졸지에 침통에서 흥분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임표 동지가 아주 좋은 발언을 했다"고 치켜세웠다. 유소기도 사람들을 이끌고 대회서면보고서의 "3푼 천재, 7푼 인화"라는 내용을 실적과 잘못은 7개 손가락과 3개 손가락의 관계라고 고쳤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늦었다.

 

칠천인대회이후, 유소기는 갈수록 피동적이 되었다. 모택동의 임표에 대한 평가는 계속 올라갔다. 심지어 모택동은 역사상 이렇게 자기 부하를 높이 평가해준 적이 없을 정도였다: "4개제일은 하나의 창조이다. 해방군의 정치사상공작은 임표동지가 제출한 4개제일, 삼팔작풍이후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이론화되었다" "전국인민은 해방군에게 배워야 한다"

 

1966년 8월 18일, 임표는 천안문의 누각위에서 부통수(副統帥)이 된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칠천인대회부터 이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라갈 것이 결정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