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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과 생활비서(生活秘書)

by 중은우시 2008. 11. 18.

글: 서승빈(徐勝斌)

 

모택동은 입만 열면 말했다: "우리의 책임은 인민에게 부담한다" 사실 그의 여인에 대한 태도만을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인민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했는지를.

 

1. 여인은 그저 모택동의 욕망배출도구였다.

 

애정은 충성(忠誠)을 기초로 한다. 모택동은 그의 여인들에 대하여 전혀 충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정이라는 말로 그의 감정문제를 평론할 수가 없다.

 

"아실교양군실류(我失驕楊君失柳)"라는 시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와닿았다. 모두 알다시피, 모택동이 여기에서 말하는 "교양"은 바로 그의 두번째 부인인 양개혜(楊開慧)이다.

 

양개혜는 모택동이 호남제일사범에서 공부할 대 스승인 양창제의 딸이다. 1918년 10월, 모택동이 당시 북경대학 교수를 맡고 있던 양창제의 소개로, 이대쇠가 안배하여 북대도서관에서 보조원으로 있었고, 일찌기 양개혜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양개혜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근 이년간의 연애를 거쳐 1920년 겨울, 모택동과 양개혜는 장사에서 결혼한다. 이때부터 양개혜는 한편으로 모택동의 일을 도와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택동의 생활을 돌봐주었다. 1922년부터, 모택동과의 사이에 세 아들이 태어난다 -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1927년 장개석이 배신을 하고, 전국이 백색공포에 휩싸인다. 양개혜는 세 아들을 데리고 장사 판창에 돌아가 있었다. 한편으로 아이들을 돌보며, 다른 한편으로 장개석반대운동에 종사했다.

 

1930년 10월 하순, 양개혜는 불행히 체포된다. 국민당에서는 양개혜를 모택동과 이혼하게 핍박한다. 양개혜는 죽어도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 11월 14일, 양개혜는 희생되는데 당시 나이 29살이었다.

 

그런데, 일찌기 1927년 10월 모택동이 정강산에 오른지 4일째 되는 날, 나이 겨우 19살된 여영웅 하자진과 "정연(情緣)"을 논한다. 이때, 양개혜는 아이를 데리고 장사에서 힘들게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었다. 1928년 5월, 35세된 모택동은 그의 새로운 애인인 19세의 하자진과 강서 하유에서 함께 산다. 양개혜를 배반한 모택동은 양개혜의 죽음에 대하여 백번 죽음으로 속죄하더라도 모자란다고 말했으니, 정말 염치를 모르는 행동이다.

 

하자진은 모택동에게 충실했다. 1927년 겨울부터, 하자진은 업무에서는 모택동의 비서가 되고, 생활에서는 모택동의 배설도구가 되었다. 10년간 모택동과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둔다. 만리장정의 도중에도 아이를 낳느라고 큰 출혈이 있었다. 연이은 전쟁과 부상으로 생활은 힘들었다. 그리하여 하자진은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진다. 1937년 하자진은 욕망배출도구의 운명을 바꾸고자 소련으로 가서 병치료를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모택동이 반대한다. 모택동의 새 여자를 좋아하고 옛 여자를 버리는 버릇이 다시 도졌다. 자주 젊은 여자들과 춤을 추고 몰래 만났다. 하자진은 이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1937년 겨울, 하자진은 소련으로 병치료를 위하여 떠난다.

 

2. "생활비서"는 무엇인가?

 

하자진이 떠난 것은 모택동이 바라던 바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여자는 부족하지 않았다. 하자진이 떠나자마자 모택동은 바로 강청과 어울린다. 중공은 스스로 1부1처제를 주장하는데, 모택동은 이때 아직 하자진과 이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창조적으로 강청에게 하나의 명분을 준다: 바로 "생활비서"였다. 먼저 동거하고 나중에 손님을 청한다. 모택동의 배신은 함께 죽기를 맹세한 하자진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는다. 소련에서는 그녀의 병을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하여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온갖 고통을 가한다.

 

모택동은 강청보다 21살이나 많았다. 비록 강청은 죽어라 모택동의 독재전제를 밀어부쳤지만, 그는 강청과도 백년해로하지 않았다. 강청이 50여세가 되자, 나이가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래서 강청과 별거하고, 자기의 딸보다도 어린 젊은 여인 장옥봉(張玉鳳)이 그의 "생활비서"가 된다.

 

모택동은 자칭 전심전력을 다하여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인을 이렇게 '옷바꿔입듯이' 바꾸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다. 모택동에게는 도대체 몇명의 "생활비서"가 있었던가?

 

모택동은 스스로를 '황제'로 생각했다. 처첩성군(妻妾成群)은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은 그의 등극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장문천이 연안에서 모택동과 강청의 결합을 결사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하자진은 혁명공신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어다. 모택동은 여인을 욕망배출도구로 생각했다. "교양"이든, "정연"이든, '무장'이든 '경송'이든, 그녀들이 자기의 음욕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되면 바로 차버리고 새로 여인을 찾는다.

 

처에게조차도 충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인민에게 충실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