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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은 하루에 돈을 얼마나 썼는가?

by 중은우시 2008. 11. 14.

작자: 미상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주석이 담배를 즐겨피웠다고 알고 있다. 70년대초에는 시가도 피웠다. 차를 마시는 것도 모주석의 또 다른 취미였다. 그렇다면, 모주석은 하루에 생활비로 얼마나 소비했을까?

 

모주석은 60년대초에 급여를 3급으로 내려서 매월 404.8위안을 받은 후, 1976년 서거할 때까지 조정하지 않았다. 모주석은 항상 돈이 부족했고,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오련등(吳連登)은 어떻게 모주석이 쓰는 돈을 처리했을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모택동의 급여는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준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쓰다보면 남지가 않는다. 당비 10위안, 주택임차료, 수도 전기료, 카페트 가구에 80여위안, 이것은 매월 반드시 납부해야 하는 것이다; 매월 식사비가 100위안가량; 그리고 이민, 이눌, 모원신 및 강청의 언니인 이운로(李雲露)의 생활비로 처음에는 1인당 15위안에서 천천히 증가시켜 25위안에 이르렀고, 마지막에는 30위안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일이 있어 공용차량을 사용하면 그는 차비를 부담했다; 여기에 어떤 때에는 민주인사, 옛친구, 고향친척의 식사비, 차비, 숙박비, 의료비등을 부담했다. 이렇게 하면 이미 300위안이 넘는다.

 

모택동은 또 두 가지 비용이 있다. 흡연과 끽차이다. 그는 담배를 심하게 피웠다. 어떤 때는 하루에 3갑의 웅묘(熊猫)표 담배를 피웠다. 매월 담배에 쓰는 돈이 수십위안에 달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다. 70년대초, 모택동은 시가로 바꾸어 피웠다. 시가를 생산하는 담뱃잎은 북경권련창에서 재료를 골라서 배합했고, 백지에 말아서 한갑씩 만들었다. 모택동은 아주 즐겨 피웠고, 어떤 때는 한편으로 책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 또 하나씩 연이어 피웠다. 하루에 2-3갑씩 피워댔다. 지나친 흡연으로 만년의 모택동은 기침, 기관지염을 앓았다. 의사는 건강을 이유로 담배를 끊거나 줄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이 노인은 어쨌든 수십년간이나 피워오지 않았는가?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서 때때로 차탁에서 시가를 집었다가 냄새만 맡고는 내려놓았다; 다시 냄새를 맡고 다시 내려놓았다, 결국은 크게 마음을 먹고 재떨이, 성냥통을 모두 거뒀다. 놀라운 의지력으로 1975년에 담배를 끊었다.

 

모택동은 차를 마시는 것도 놀라울 정도였다. 매월 그는 1근 심지어 2근의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의 급여에서 30여위안을 지출했다.

 

모택동은 이외에도 적지 않은 지출이 이었다. 일찌기 중국공산당창건초기에 국민정부 교육총장을 맡았던 장사쇠(章士釗)가 그에게 수백은원을 주어 혁명사업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모택동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았다. 북경에 들어온 후 매년 구정 이삼일전에, 그는 친히 비서를 장씨집에 보내어 그의 원고비에서 2000위안을 보냈다. 매년 이러했다. 장사쇠가 홍콩에서 서거할 때까지.

 

오련등의 기억에서 모택동이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연히 손님을 청하면 거의 모두 민주인사와 동창 친구였다. 중국공산당의 간부는 청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예외도 있다. 예를 들어, 풍택원이 회의가 심야까지 지속되면 그는 "오늘은 늦게까지 회의를 했으니 내가 식사를 내겠다. 국수 한그릇이다" 그의 말만 떨어지면 오련등은 즉시 서둘러서 짜장면 혹은 타로면(打鹵麵)을 만들어 올렸다. "너희는 먹어라. 회의에 영향이 없게" 모택동은 여러 전우들이 국수를 먹는 것을 보면서 계속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국수는, 모택동이 자신의 식비에서 부담했다.

 

1972년 이눌이 아들 효지(效芝)를 낳았다. 그녀의 급여는 겨우 수십위안이었다. 시미유염을 사고, 보모를 청하고, 분유를 사야해서, 아무리 아껴도 모자랐다. 부친에게는 일찌기 규칙이 있었다. 아이들이 일을 하기 시작하고 급여를 받기 시작하면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유는 "인민이 너희를 대우해주면, 너희는 스스로 자기의 생활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부친에게 손을 벌린 적이 없던 이눌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할 수 없이 장요사(張耀祠)에게 부탁했다. 장요사는 이눌의 요청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메모를 해서 모주석에게 올렸다. 모주석은 물어본 다음에 "그럴 것없다. 네 생각에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 장요사가 정확한 숫자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눌이 쓸 곳이 적지 않으니 수천위안을 주시지요" 모택동은 이번에는 손이 컸다. 원고료에서 8000위안을 주는데 동의했다. 오련등은 이 8000위안을 전부 이눌에게 주지 않았다. 그녀가 만일 지나치게 많이 쓸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면 다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이눌의 명의로 5000위안을 은행에 예금하고, 그녀에게는 3000위안을 주었다.

 

확실히 모택동은 거의 매달 돈이 모자랐다. 오련등은 부득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게 쪽지를 올려서, 수지현황을 보고한다. 모택동은 항상 손을 흔들었다. 그 뜻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 후에 원고료에서 1만위안을 꺼내어 집안용도로 쓰도록 써주었다.

 

1976년 9월 오련등은 모택동의 유체를 인민대회당으로 보내고 나서 이 노인의 물건을 정리했다. 몇 벌의 중산복 외에 1푼의 예금도 남아 있지 않고, 고급 옷 한벌도 없었다. 금은보석도 없었고, 자녀에게 재산을 남긴다는 유언도 없었다. 이 노인이 죽은 후에 남은 것은 그저 그가 좋아하던 8만여권의 서적이었다. 해외에서 출판한 그의 저작에 지급하여 '중판특회실"에서 관리하는 원고료 120여만위안이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관련기관의 안배로 그의 자녀는 1인당 겨우 8000위안을 나눠받았다. 이것이 근 10억인구를 27년간이나 이끌어온 공화국영수의 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