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명(黎鳴)
중국의 문화와 문명이 천루(淺陋) - 즉, 천박하고 추루(醜陋)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약간의 이성을 가진 중국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중국의 이천여년이래의 역사, 중국근대의 역사, 중국의 현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사람들의 눈 앞에 드러나 있다. 절대로 여하한 사람의 "분노(憤)"(憤老, 憤少, 憤靑) 혹은 감동적인 미화(美化)와 가송(歌頌)으로 그럭저럭 넘길만한 일로 만들 수는 없다.
오늘 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자기반성의 역량을 강화하고, 진정으로 깊이있게 우리 자신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의 역사를 진식하고, 우리자신의 문화와 문명이 '천박하고 비루'하게 된 여러가지 유해한 전통요소를 인식하고, 진정으로 진리, 진실, 진정의 삼대 문명원칙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심도있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도대체 왜 이처럼 '천박하고 비루'하게 되었는가?
중국은 이천여년동안 근본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사상가, 철학가, 논리학가, 사상이론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유일하게 계속하여 배출한 것은 그저 대량의 무지하고 무학(無學)하며,무능하고 무용하며 무치(無恥)한 공자와 유가사상을 카피(copy)하는 '사기꾼'과 '백치'들 뿐이다. 소량의 진정한 '천재'는 중국의 이 땅 위에서는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중 극소수의 사람은 역사중의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가 되어서, 그들을 제왕장상이외에 혹은 '정사(正史)'이외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이 맡은 역할중 가장 많은 경우는 운명이 비참한 문화예술가이다. 예를 들면 중국역대에 고난을 대변하는 일부 걸출한 시인들, 그들은 시대의 비명자(悲鳴者)들이다. 그리고 극소량의 고전거작을 창작해낸 문학가들이다 그들은 절망(絶望)의 비호자(悲號者)들이다. 중국의 소위 "사대명작"에 대한 평가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 그들은 사실 모두 중국인이 절망중에 외치는 소리이다. 중국인의 "사대절망(四大絶望)"의 저작이다. 바로 중국문화와 먼명역사의 거대한 "절망"에 대한 위대한 문학기록이다.
근대이래로, 서세동점으로 상황이 약간 변화되었다. 그러나 중국유가 "문화"전통은 시종 죽음처럼 강한 완고한 문화이다. 중국에서 여전히 각양각색의 식고문화(食古文化), 식양문화(食洋文化), 식금문화(食今文化)의 대량의 "반은 날 것이고 반은 익은" 앵무새식의 학자, 전문가, 교수, 박사지도교수를 배출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은 그래도 여전히 죽어라 공자와 그 유가의 천박하고 비루한 의발을 꽉 붙들고 있는 문인 "사기꾼"과 "백치"들이다.
나는 정말 의심스럽다. 이천년이래의 중국의 극권전제통치자들이 죽어라 견지했던 공자와 유가사상은 이미 중국인의 육체와 혈액에 녹아들어가서, 그들이 대대로 전해내려가는 '생물유전인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만일 정말 그렇다면,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정말 절대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 다만, 서방으로 유학간 많은 중국계를 보면, 다시 기본적으로는 중국계나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싱가포르, 대만, 홍콩등지의 근대의 변화를 보면, 그리고 더 나아가 장기간 중국문화의 심각한 영향을 받아왔던 일본 한국의 상황을 보면, 나는 그래도 약간의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정말 두뇌를 완전히 상실한 짐승이나 근본적으로 자기의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내 생각으로 비록 아무리 오랫동안의 문화전통이 있더라도, 중국인의 생물유전인자로 되는 상황은 아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영원히 극소수의 완고하게 우매한 전통을 죽어라 고집하는 극도강경분자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사람은 내 생각으로 그들이 세력을 이루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기껏해야 완고한 복고주의의 현대에 살아있는 표본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믿지 않는다면 오늘의 천하를 보라. 누가 갈수록 보편화되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의 빛(인권, 헌정, 법치, 민주, 자유 등등의 보편가치)의 전세계인류문명의 대세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나는 더욱 깊이 믿는다. 중국의 상황도 이미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바로 그러하므로, 나는 두 권의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저작을 출판했었다: <<중국인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와 <<서양철학은 죽었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내가 1990년대에 출판한 작품이다. 시간의 변천과 더불어, 비록 이 두 권의 책에서 제출한 주제는 여전하지만(사실 오늘 글의 이슈에 포함되어 있다), 다만 내가 이들 문제를 보는 관점과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출하는 새로운 논리, 학설은 더욱 분명하고, 승화되었다.
바로 이러하므로, 오늘날 인터넷의 자유와 편리를 더욱 축하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나의 관점을 빠르고, 전면적이고, 충분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논리사유의 방법과 학설을 가능한 한 많은 청년 네티즌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더욱 총명하고 더욱 지혜있게 발걸음을 내딛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 달성하고자 하라는 심원(心願)이다. 중국문화와 문명의 '천박과 비루"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먼저 인류의 진정한 '문화'와 '문명'이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에서는 일찌기 하느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자신을 위하여) 두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나무이다. 실제로, 이는 사람들에게 인류는 이 세계에서 평생을 살면서,실제로는 자기를 위하여 이 두 그루의 나무를 심고 기른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은 자기의 생명의 나무에 대하여 심고 기르는 주동권이 사람 자신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는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는 없다.
개인의 생명은 사실 매우 짧다. 기껏해야 100년을 넘지 못한다. 비록 아들, 딸을 낳고 기름으로써 "인류"의 생명은 연장할 수 있지만, 어쨌든 여하한 개인의 수명도 사람 자신의 능력으로 무한하게 연장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류의 생명의 나무의 최종적인 비밀은 여전히 자연 그 자체에 있다. 혹은 하느님에게 있다.
다만, 지혜의 나무는 상황이 다르다. 사람은 자기의 지혜의 나무를 기를 주동권이 있다. 기본적으로 혹은 주요하게 사람 자신(이 자기는 개인인 자기만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자기를 포함한다)의 손에 달려 있다. 너는 스스로가 지혜롭게 되고 싶은가? 비록 지혜의 나무의 "뿌리"는 여전히 자연 혹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지만, 자연 혹은 하느님은 절대로 사람의 수명을 대하는 것처럼 인류 내지는 개인의 지혜에 제한을 가하거나 한도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를 하루빨리 지혜롭게 하고자 하기만 하면, 자기의 지혜의 나무를 가능한 한 크게 자라게 하고 싶다면, 어쨌든 가능한 것이다. 심지의 지혜를 영원히 존속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중에 최소한 상당히 큰 주동권은 사람의 손에 달려잇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생명의 나무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자연의 나무이지만, 인류의 지혜의 나무믄 객관적인 자연의 나무이면서(즉, 지혜의 성장은 여전히 일정한 생명의 객관법칙을 따라야 한다), 동시에 더욱 주관상대이성의 나무와 자유절대오성의 나무(특히 후자)는 바로 개인을 포함한 개인이 조직한 사회의 합작메커니즘의 공동체의 운용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미 사람의 자기에 대한 부단한 인식의 심화는 개인으로 조직된 사회공동체의 진정하고 유효한 합작행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일체는 모두 사라이 부단하게 진리를 발견하고, 진실을 발명하고 진정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혹은 가속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비로소 진정 인류의 주관능동성의 가치가 있고, 특히 인류합작성의 사회공동체 자체조직의 능동성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우리가 상술한 두 가지 '나무'에 대한 이해의 의미상에서, 무엇이 인류의 진정한 문화와 문명인지를 해석해보자. 무엇이 인류의 진정한 문화와 문명인가? 인류의 진정한 문화와 문명, 즉 인류가 자기의 생명의 나무를 보호하는 동시에, 개인과 개인이 조직한 사회(국가, 민족등)이 자기와 사회공통자의 자체조직의 합작의 노력을 통하여, 공동으로 자기와 사회 전체으 지혜의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인류는 (개인의) 이 나무 혹은 (사회전체의) 이들 지혜의 나무가 행하는(말하고, 행위하고, 생각하는) 관련된 일체가 바로 당해 개인과 당해 사회(국가, 민족등)가 공동으로 창조하는 문화와 문명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이든 문명이든, 그들은 실제로 모두 주로 인류의 지혜의 나무의 성장상태와 관련된다. 비록 우리가 지혜의 나무는 최초에는 사실 생명의 나무를 성장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필요에서 시작되었고, 생명의 나무의 기초(신체) 위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한 것이라는 것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인류지혜의 나무가 성장발육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인류자신의 생명존재의 종극의 목표가 되었다. 심지어 인류생존의 궁국의 가치와 의미 자체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류의 지혜의 나무는 바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나무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문화는 개인을 향하고, 문명은 사회전체를 향한다. 이외에 문화와 문명은 사실 하나(개인 혹은 사회)의 전체의 양면이다. 문화는 문명이 나타나서 활동하는 상태이고, 문명은 문화의 전체적인 역사적 정태(定態)의 총합이다. 문화와 문명을 더욱깊이 토론하는 것은 뒤로 미루자. 아래에서는 중국문화와 문명이 왜 천박하고 비루한지의 문제를 토론해보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나무는 사실 인류의 지혜의 나무이다. 이로써 볼 때, 인류문화와 문명의 높이, 두께 그리고 깊이는 사실 인류지혜의 나무의 높이, 두께 그리고 깊이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류지혜의 나무의 성장은 사실상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공동체가 합작하여 조직적으로 계속 진리의 발견, 진실의 발명, 진정의 창조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혹은 가속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아래에는, 우리가 이런 이론의 주장에 따라 중국인의 문화와 문명을 논해보자.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도대체 전련류에게 얼마나 많은 진리를 발견해 주었는가? 도대체 전인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진실을 발명해 주었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진정을 창조해 주었는가? 아주 가슴아픈 것은, 두번째를 제외하고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첫번째와 세번째에 있어서는 거의 0이라는 것이다. 혹은 오히려 마이너스이다. 하나는 완전히 공백이고, 다른 하나는 완벽하게 반대로 전혀 없다.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진정은 심지어 반진정(이천년이래로 중국은 기본적으로 거짓말, 위장, 사기를 모종의 특별한 처세술로, 계모(計謀)로 보는 나라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적이 되거나, 사기를 쳐도 스스로 이것이 부끄러운 짓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공자와 유가의 '친친, 존존, 장장'의 필요에서 계속 제창한 것이기때문이다)
한 사람, 한 국가, 한 사회가 그들의 문화와 문명의 높이, 두께와 깊이는 기본적으로 각각 그들이 발견한 선험적이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진리(물질적이고 생명적이고, 지혜적인 발전과 운행의 규율)의 높이, 그들이 발명한 경험적이고, 상대적이고 구체적인 진실(도구, 방법, 절차, 기술등등)의 두께,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초험(超驗)적이고, 자유적이고, 의상(意象)적인 (정감적이고 사유적이고 순수논리적인) 깊이로 결정되는 것이다.
중국문화와 문명의 높이는 만일 이미 발견한 진리를 가지고 평가해보면 기본적으로 0이다. 이 점은 분명히 중국문화와 문명이 '천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문화와 문명이 '천박'한 것은 바로 그것이 거의 완전하게 여하한 '진리'의 발견도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높이는 완전히 결핍되어 있다.
중국문화와 문명의 두께는 만일 이미 창조한 진정으로 평가해보면, 기본적으로 0이다. 혹은 심지어 마이너스이다. 이점은 중국문화와 문명이 '비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문화와 문명이 '비루'한 것은 그것이 완전해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공중도덕의 '진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문화와 문명의 높이의 '천박'과 중국문화와 문명의 길이의 '비루'를 합하여 그들은 다시 함게 중대하게 중국문화와 문명의 진실한 '두께'를 누르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중국인의 이천년이래의 문화와 문명에 대하여 객관이성판단에 부합하는 전체적인 결론이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 탓인가? 분명히 먼저 이천년이래의 모든 극권전제통치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용한 것은 '사상'과 '문화'의 공구로 그들의 실제상의 통치를 진행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이용한 것은 거의 전부 공자와 유가의 사상과 문화의 전통도구이다. 공자와 유가제자들은 근본적으로 무슨 진리라고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진정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공맹의 '천명(天命)", 한유(漢儒)의 "천도(天道)", 송명유(宋明儒)의 "천리(天理)", 근현대 신유가의 천심(天心), 천성(天性)...그들이 말한 것이 진리인가? 근본적으로 진리가 아니다. 반대로 극히 후안무치한 반진리(反眞理)이다. '인류평등'의 위대한 진리에 반한다. 역대유가들은 공자의 '자위부은(子爲父隱, 아들은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 '신위군은(臣爲君隱, 신하는 군주의 허물을 감춰주어야 한다)' '위친자휘(爲親者諱, 친한 사람을 위해서는 말을 삼간다)', "위존자휘(爲尊者諱, 높은사람을 위해서 말을 삼간다)", "위장자휘(爲長者諱, 윗사람을 위하여 말을 삼간다)"는 등등의 신조는 영원히 자기가 살아가는 지치?로 삼았는데, 그들이 사회생활에서 진정이 있었다고 할 것인가? 그들이 순수하게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공자와 유가의 "사상"과 "문화"는 사실상 이천년동안 명백하게 중국인의 진정한 문화와 문화를 매장시켰다. 분명히 중국인의 지혜의 나무를 철저하게 망가뜨렸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여전히 그것을 이용하여 미래중국을 발전시키는 '신'문화와 '신'문명으로 삼고자 한다. 이것은 미친 사람의 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당연히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공공연히 사기를 친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바로 이천년이래의 공자와 유가의 '사상'과 문화'가 중국인에 대하여 철저하게 독점하였으므로, 비로소 중국문화와 문명이 오늘날 사실상 천박하고 비루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철판위에 못을 박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중국이천년이래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역사적인 경험의 최종결론이다.
바로 중국문화와 문명이 천박하므로 그것은 장기간 중국인을 우매, 낙후, 빈곤, 허약하게 만들었고, 바로 중국문화와 문명이 비루하므로 그것은 장기간 중국인을 인격상의 '비루'와 중국사회체제의 '비루'를 가져왔다 - 통치자는 극단적인 전제자이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였고, 광오했고, 야만적이면서 이치가 통하지 않았다. 피통치자는 영원히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고, 빈천하고 유약하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어떻게 이치를 따져야 할지를 몰랐다. 바로 중국문화와 문명이 천박하고 비루하기 때문에, 우단여사 여추우선생, 김용선생등등의 문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당금 중국의 "문화"중에서 풍운을 질타하고 일세를 풍미하고 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자세히 생각해보라.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 그들과 그들의 작품이 도대체 너희에게 어떤 문화와 문명을 주었는가? 그것들에 진리가 있는가? 그것들에 진실이 있는가? 그것들에 진정이 있는가?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더이상 이렇게 천박하고 비루하게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철저하게 공자점(孔子店)을 없애야 한다. 이것은 오사운동ㅇ사상의 선구자들이 일찌감치 아주 정확하게 소리지른 것이다. 이 공자점은 중국에서 이천년간 흥성했다. 중국인의 문화와 문명은 천박하고 비루한지 꼭 이천년이 되었다. 일찌감치 파산했어야 하는 공자점을 계속 열고 있을 것인가? 우리 자신은 우리의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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