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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중국은 유교문명국가가 아니다

by 중은우시 2007. 1. 28.

글: 적옥충(翟玉忠)

 

중화문명은 무엇인가?

 

국내외학자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유가문명이라고 얘기한다. 서방학자는 대체로 역사적인 착각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르코 폴로의 시대부터 접촉한 것은 이미 완전히 유가화(儒家化)한 중화문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학자는 이천년간의 유가사상의 침식을 받은 외에, 그들의 사상이 근 100여년간 식민화되었다. 그들에게서 독립적인 인문사상을 찾아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오늘날 소위 '국학'이라는 것은 유학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Karen Horney의 정신분석각도에서 보면, 공자는 자존심이 압박받고 결핍된 소년시대를 보냈고, 공자 및 그의 후학들이 완벽한 인격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확실히 일종의 정신질환적인 특색을 나타낸다. 그러나 유학과 정신병의 관계는 이제 막 일부 학자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고, 앞으로 심리학자들의 더욱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은 일단 방치하기로 하자. 그저 문명사의 각도에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독자들은 그러면 바로 발견할 것이다: 중화문명을 유가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핫도그를 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맥을 집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왜 이런가?

 

첫째, 만일 유가가 중화문명의 주체라면, 여러가지 실용기술들을 꿰뚫고 있는 것이 왜 모두 법가사상를 해석할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구장산술(九章算術)>>과 <<황제내경(黃帝內經)>>과 같은 것은 전자는 법가의 정치경제학을 수리화한 것이고, 후자는 법가의 정치경제학의 기본원칙을 서술한 것이다. 너는 마찬가지로 왜 병가의 기본원칙과 유가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지도 설명할 수 없다. 도학이 주류이던 송나라에서도 정부가 간행한 <<무경칠서(武經七書)>>중에 네권이 법가의 저작이다. 그 중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은 제나라 법가의 작품에 속하고, <<오자병법(吳子兵法)>>과 <<위료자(尉子)>>는 진(晋)나라 법가의 작품이다.(<<위료자>>는 <<상군서(商君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해져오는 상앙학파의 작품이다). 남은 세 권은 <<손자병병>>, <<사마법>>,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인데, 이것도 유가도덕에 배치되는 전쟁관을 가지고 있다.

 

외교측면에서도, 종횡가들은 <<귀곡자(鬼谷子)>>를 대표로 하는 황로심술(黃老心術)은 중국외교영역에서 위대한 저작이다. <<키신저평전>>의 작가인 스벤글러는 이렇게 귀곡자를 평가했다: "귀곡자가 다른 사람을 잘 살핀 것은 역사의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며 당시 외교기교에 대한 파악을 말해준다. 필연적으로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황로심술의 다른 일부저작도 <<관자(管子)>>라는 책에 흩어져 있다. 예를 들어 <<관자>>심술상, 하편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유가이론과 완전히 다른 황로심술은 어떻게 제나라 법가의 대표작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이는 중국고대외교실무의 지도적인 원칙은 역시 다른 문명계통에서 온 것이다. 즉 중화의 법가계통에서 온 것이다.

 

둘째, 만일 유가가 중화문명의 주체라면, 너는 왜 사마천이 한비자, 신불해, 한나라의 여러 황제가 모두 황로(黃老)에 근본을 두고 있는지 해석할 수가 없다. 너는 황로를 신봉하던 서한이 어떻게 법가를 신봉하던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할 수 있었는지 해석할 수 없다. 이런 문제는 중국문화사상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천백년동안 학자들이 아무렇게나 해석해온 문제이다. 1970년대에 장사의 마왕퇴에서 황로의 책이 출토된 후에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황로는 실제로는 제나라 법가의 사상이 연화된 것이라는 것을. 즉, 법가였던 것이다. 진한은 모두 법가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한나라가 진나라의 제도를 승계한 것이다. 해방후, 고길강은 <<주례(周禮)>>도 제나라 법가의 작품이라고 확정했다. <<육도>> 및 금문의 자료를 종합하면, 우리는 대체로 서주초기에 이미 법가로 나라를 다스렸고, 공자가 말하는 예라는 것은 겨우 예의법(禮儀法)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세심한 독자라면 유가가 철학관에서, 사고방법까지 그리고 정치경제측면까지 모두 중화문명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화문명과 맞지 않는 형태이다. 몇개의 예를 들어보겠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帶工程)을 통하여 우리는 유가가 <<상서(尙書)>>를 편찬할 때 삭제한 <<일주서(逸周書)>>가 <<상서>>보다 훨씬 믿을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에 기재한 무왕이 주왕을 벌할 때의 천상을 천문소프트웨어로 계산해보니 진실이었던 것이다. 도가, 경중가(輕重家, 중국의 고전경제학), 법가(중국의 고전정치학), 의가의 핵심경전에서는 모두 "남는 것을 버리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직 유가만이 천명관을 믿고 이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현실생활에서 유가는 이처럼 이단이었다. 더욱 초기일수록 더욱 황당했다. 묵자, 안자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런 것을 느껴볼 수 있다. 나중에 수백년간의 개조를 거쳐, 개략 서한말년에, 다른 사상들과의 융합을 거쳐서 비로소 유학은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초기의 유생들은 정치능력이 모자랐다. 동한초의 왕충이 진한의 법가관리들이 사회질서의 기본이라고 말한 것이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있다. "관리들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가에게 물어보았고, 현관이 사무를 처리함에는 법령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넷째, 유가는 중국이 융성했을 때는 모두 법가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중화문명 자체로서, 유가는 이 문명의 성장원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중화문명이 발전하는 중요한 시기에는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것같다. 미국인들이 확장노선을 걸을 때는 반드시 기독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스스로 천명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라크를 치라고 했다'는 핑계이건 간에 하여튼 그렇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화하문명의 발전에서 핵심작용을 했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유가문명이 흥성한 후이면 반드시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처했다. 동한의 유가가 처음으로 성행하였는데, 나중에 수백년의 동란이 지속되었다. 오호십육국으로 천리가 피로 물들었다. 송나라는 유가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중화민족은 금방 이민족통치의 고통을 맛보았고, 전체 백성이 하등민족으로 전락했다. 명나라의 이학은 송나라의 유학과 감히 겨룰 수 있을 정도였고, 이어서 청나라는 장기간의 정체와 치욕을 가져왔다. 청나라때부터 서방문명은 바다로부터 중국으로 진공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유학자들은 목이 쉬어라 "이학살인"(대진, 1723-1777)을 외친 것도 좋은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송나라 이래의 심성유학이 목숨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진정한" 유학을 찾기 시작했고, 육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진짜유학"을 연구하고자 제자백가들을 고증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중기부터 일련으 학자들은 제자백가의 책들을 살피고 연구했다. 오늘날 독자들이 보고 있는 제자백가의 책들은 대다수가 청나라 사람들이 하마터면 사라질뻔한 지경에서 구해낸 것들이다.

 

처음에는 중국인들이 제자백가의 내지사상을 토론할 수 없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이것들은 경술(經術)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제자백가의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1세기에가 되어서야 우리는 점차 중화의 법가원문명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도가의 핵심이 자연주의세계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법가는 주로 정치경제학이었고, 의가, 산가, 병가, 종행가는 실용과학이며, 중화문명은 일관된 문명체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화용은 비로소 2천년간 유가경학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천년의 세계역사무대로 등비했다.

 

오늘, 계속되는 '국학열'을 바라보며, 신유학자의 허장성세를 바라보며, '현대성인'의 황당한 정치경제주장을 바라보며, 필자는 모든 염황자손들에게 말하고 싶다.

 

중국은 유가문명이 아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배워야할 첫번째 수업과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