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Isaac Taylor Hedland
비록 지금 서태후(자희태후)는 세상에 살아있지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공개적인 장소 혹은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녀와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일생과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나의 처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서태후는 외국공사부인에게 연회를 베풀 때, 앞뒤고 식탁의 배치, 장식이 모두 달랐다고 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서태후가 외국인의 습관에 얼마나 빨리 적응했는지, 혹은 그녀가 어떻게 외국인들의 습관에 영합했는지를 알아보자.
처음에 몇 번 만났을 때는 먼저 어떤 사람이 우리를 이끌고 서태후와 광서황제에게 갔다. 그리고 우리는 푸진(福晋, 만주어로 부인), 거거(格格, 만주어로 아가씨)등과 함께 연회장소로 들어갔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후, 모든 사람의 곁에는 거거가 한 명씩 곁에 있었다. 이때 서태후가 연회청에 나타났다. 황제는 그녀의 왼쪽 약간 뒤쪽에 앉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계속 서 있어야 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후에, 비로소 우리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 푸진, 거거들은 여전히 서 있었다. 서태후의 앞에서 그들은 감히 앉지를 못한 것이다. 이어서, 장포를 입은 태감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중국요리를 내왔다 서태후를 모시는 태감은 요리를 올릴 때, 계속 그녀의 곁에 꿇어앉아 있었다.
우리가 한동안 식사를 한 후, 공사부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거거들이 자리에 앉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서태후는 먼저 고개를 돌려 광서황제에게 말했다: "황상, 앉으시오" 그후 그녀는 몸을 돌려 손으로 다른 거거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녀들은 모두 아주 겁먹은 듯이 자리에 앉았다. 모두 의자의 끝에 앉았고, 보기에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음식도 감히 먹지를 못했다.
식탁 위에는 색깔이 아주 화려한 칠포(漆布)가 덮여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식탁보나 냅킨은 없었다. 우리는 모두 손수건정도 크기의 여러 색깔의 화면포(花棉布)를 냅킨으로 삼았다. 생화도 놓여 있지 않았고, 식탁위의 장식은 주로 크고 작은 접시의 디저트와 과일이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중에 서태후와 광서황제를 접견했을 때, 모든 이런 예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식탁위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색깔이 화려한 생화가 놓였다. Conger부인이 미국공사관에서 거거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후에 궁안에는 외국의 예절을 배우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이로써 볼 때, 이들 거거들은 별 것도 아닌 식탁보를 놓는 것이나 생화를 놓는 것까지 매우 관심있게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다시 궁중에 들어가서 연회에 참가했을 때, 중국요리도 있지만, 서양요리도 나왔다.
한가지 특수한 상황이라면, 바로 이후 서태후는 다시는 손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식 접견활동이 끝난 후에 서태후는 그녀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접견에 참여한 사람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손님들을 연회청으로 들어가게 해서 푸진 거거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했다. 궁중의 규정상 태후가 자리에 있으면 푸진, 거거들이 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고, 음식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연회가 끝나면, 서태후는 다시 뒤에서 걸어나와서, 아주 친절하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아마도 서태후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연회에 참석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된 것같다. 신분이 아주 고귀한 공사부인은 서태후가 식사하고난 접시를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 공사부인이 가지고 싶었던 것은 보통 접시가 아니라, 가치가 엄청난 문화재이고 골동품이었다. 서태후가 쓰는 접시는 손님들의 것과 달랐고, 그녀가 먹는 음식도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과 달랐다.
서태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태감에게 말했다: "우리는 한 개만 드릴 수는 없다. 우리 중국의 규칙은 좋은 일은 쌍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물건도 모두 쌍으로 해야 한다. 가서 접시 두 개를 찾아서 보내라"
그 후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손님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원래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접시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외무부는 나에게 접견할 때는 선물을 주지 못하게 합니다" 이전에 매번 접견하거나 연회가 끝나면, 그녀는 친히 모든 외국공사부인들에게 약간의 작은 선물을 주곤 했다. 나중에 태감을 보내서 각 공사관에 약간의 선물을 보내곤 했다.
또 한번은 위에 언급한 그 공사부인이 궁중에서 진귀한 장식물을 하나 훔쳐내왔다. 그녀가 가져가려고 할 때, 이 물건을 관장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그녀에게 물건을 원래 자리에 놓으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 방안의 모든 물건을 책임지고 있으며, 물건을 잃어버리게 되면, 밥줄이 끊긴다고 했다.
위에 언급한 에피소드는 뭐 희한한 얘기들은 아니다. 어떤 때는 푸진, 거거들 앞에서, 이들 유럽에서 온 공사부인들은 식탁위의 요리에 대하여 아주 듣기 거북한 얘기도 했다. 이들 요리는 모두 중국요리인데, 자주 외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비록 서태후의 통역관이 그녀의 뒤에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이들 공사부인은 그 자리에 있는 중국인들이 모두 '서양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는 국가에서, 서태후의 수하들은 사전에 예부에서 예의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조정에서 이들 공사부인들의 행동거지는 무례나 불공으로 비칠 수 있었다. 조정의 사람들은 서태후를 만나기 전에 반드시 예부에서 1주일 내지 6개월의 교육을 받는다. 서태후와 거거들은 아마도 이들 외국공사부인들의 무례와 불공을 눈감아 주었을 지도 모른다. 중국이외는 모두 오랑캐의 땅이고, 중국인 이외는 모두 오랑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중국에서 역사가 깊다. 서태후와 푸진, 거거들이 이들 공사부인들을 용서한 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외국인이고 아직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따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서태후를 접견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공사부인은 이런 행사가 중국을 개방시키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중국궁중의 엄격한 예의를 준수하고자 애를 썼다. 외국공사부인들이 중국의 서방화에 기여를 했다는 점을 얘기하자면, 미국공사관의 Conger공사부인을 빠트릴 수 없다. 서태후와 Conger공사부인이 친밀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서태후를 아주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말의 의문도 없다.
비공식적으로 외국공사부인을 접견할 때, 이 비범한 여인은 그녀의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여자다웠고, 그녀는 여주인으로서의 매력과 흡인력이 있었다. 그녀는 모든 손님들과 악수를 했고, 아주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도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추운 것을 원망했다; 예를 들어, 다과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녀는 아주 안달했다. 그녀는 아주 성의있게, 우리와 만나는 것이 그녀의 복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모든 손님들이 그녀에게 빠져들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이전에 그녀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모든 손님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이는 그녀가 황조의 주인이 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외국의 풍속, 습관과 제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한번은 극원에서 극을 보고 있는데, 그녀는 나를 곁에 불렀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의자를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 후에 나에게 미국에서 부녀교육에 관한 제도를 상세하게 물었다.
"듣기에, 귀국에서는 여자들도 모두 공부를 한다면서?"
"태후, 그 점은 맞습니다"
"그녀들은 남자아이들과 같은 과목을 공부하는가?'
"공립학교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배우는 학습과정은 같습니다."
"나는 모든 중국의 여자아이들도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아주 바란다. 그러나, 백성들은 남자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만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후에 나는 간단히 그녀에게 미국공립학교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국은 현재 세금이 너무 많다. 다시 공립학교를 세우려면, 반드시 세금을 늘려야 할텐데,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명령을 반포했다. 전국에 부녀교육을 시작하라고. 현재는 북경, 그리고 다른 지방에도 수천개의 여자학당이 들어섰다.
그리고, 또 한번은 공사부인들이 다과를 들 때, 서태후는 나를 다른 곳으로 불렀다. 당시 곁에는 태감 하나를 제외하고는 우리 둘만이었다. 그 태감은 공작깃털로 만든 부패로 계속 그녀에게 부쳐주었다. 서태후는 나에게 교회일을 얘기해달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그녀가 로마천주교와 신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 개를 합해서 교회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교회를 설립하는 목적은 민중의 지혜를 증진시키고, 그들의 도덕과 정신의 경지를 제고시킴으로써 부모에 효도하게 하고 국가에 충성하게 하기 위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서태후처럼 미신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 그녀는 운명, 부적, 저주, 악마와 귀신, 하느님과 마귀등에 대하여 모두 믿었다. 이는 그녀의 생활 곳곳에 영양을 미쳤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그녀의 화상을 그려서 세인트 루이스 박람회에 보내어 전시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아주 놀랐다. Conger부인이 잘 설득했다.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의 화상도 모두 그 곳에 전시되는데 그 중에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여왕의 화상도 포함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서태후의 화상이 대량으로 해외에 전해지면, 외국인들의 그녀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불식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Conger부인의 설득으로, 서태후는 경친왕과 협의한 후 다시 답변을 주겠다고 말하게 된다. 이 일은 여기서 흐지부지 되는 듯이 보였따. 그러나, 금방 사람을 보내어 Conger부인에게, Kate Carl을 입궁시켜 그녀의 화상을 그리도록 하라고 한다.
서태후는 길일을 택한 후에 Carl로 하여금 그녀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화상을 외무부로 보내기 위하여 그녀는 아예 철로를 새로 깔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의 초상을 둘러매고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마치 시신을 들고 가는 것같다고 생각해서이다. 서태후의 60회생일에, 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그리하여 융성한 잔치를 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69세가 되자, 70회 생일을 거창하게 거행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은 옷에는 곳곳에 "수(壽)"와 "복(福)"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중 많은 것들이 길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녀의 침궁에는 여러 접시의 사과를 놓았는데, 사과의 중국어는 평과(?果)인데, '평'은 평화의 평(平)과 발음이 같다. 그리하여 '평안'하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침궁안에는 많은 복숭아를 두었는데, 복숭아는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장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은 옷에는 많은 부적이 새겨져 있었다. Conger부인이 중국을 떠날 때, 서태후는 자기의 목에서 부적을 하나 풀어서 그녀에게 주었다. 이 물건이 Conger부인의 항해가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1900년에 태원으로 도망쳤다가 평안하게 되돌아온 것도 바로 이 부적이 그녀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누구라도 입은 옷이 상복과 비슷하면 절대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만주족들은 여자들이 전족을 하지 않았다. 서태후는 전족에 그 어느 누구보다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하들은 만일 중국의 전통적인 풍속습관을 고치고자 한다면, 서태후라고 하더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일찌기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의 외국주재공사의 부인이었다. 그녀와 두 딸은 유럽에서 보고 들은 바가 많았고, 유럽에서 가장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서태후에게 말했다: "청나라는 여인에게 전족을 시켜서 우리는 모두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서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서양인들도 이상한 습관이 하나가 있다고 하더라. 지금 여기에는 외인이 없으니, 외국여인들은 뭘로 허리를 조으는지 한번 보고 싶다"
그 부인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었따. 언뜻 보기에 큰 물통 같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몸매가 날씬한 딸에게 말했다:
"아이야, 태후께 보여드려라"
그 아가씨는 부끄러워 했다. 이어서 서태후가 말했다: "너는 내 요구는 곧 명령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킨 이후에, 그녀는 그 부인과 딸에게 만주족 복장을 한 벌 선물했다. 그리고 말했다:
"서양의 부녀들도 이렇게 고생하니, 정말 가련하다. 그녀들은 쇠줄로 자기의 허리를 조르지 않느냐. 숨도 쉬기 어려울 때까지. 가련하구나. 가련해."
둘 째날 그 아가씨는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태후는 그녀의 모친에게 왜 딸이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모친이 대답했다: "딸 애는 오늘 몸이 계속 좋지 않습니다"
서태후는 말했다: "과연 내 생각대로이군. 허리를 묶는 띠를 푼 이후에 원래의 모양으로 회복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태후는 마치 중국여인들이 잠을 잘 때도 전족을 하듯이 외국여인들도 잠을 잘 때도 허리를 묶어둔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2년전에 나는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첫번째 겨울을 지냈다. 북경성은 아주 요란했다. 어린 황제는 이미 성장했고, 서태후의 수렴청정지위도 곧 끝날 것이다. 청나라 황조는 아거(阿哥, 황실남자)와 거거(황족여인)의 결혼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혈연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근친간에는 결혼할 수 없다. 이것은 중국인의 규칙이다. 그러나 규칙은 만들어지기도 하고 없애기도 한다. 어린 황제가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어린 황제는 서태후의 외조카이면서 조카이다. 그녀는 자기의 조카딸을 황후로 하였다. 어린 황제는 이 결정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다른 아가씨를 황후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서태후의 결심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혼을 강행했다. 궁중에서 성지를 내려 저녁에 아무도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 날 밤에 황제의 신부가 가마를 타고, 친정에서 황궁으로 들어로기 때문이다. 황제가 황후를 선택하는 것이나, 다른 일이나 모두 그녀의 의지는 누구도 꺽을 수 없는 천명이었다.
서태후의 키는 중간에서 약간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신는 신발은 매우 높았다. 어떤 것은 6인치에 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녀는 만주족 복장을 했다. 두 어깨에서 늘어뜨린다. 이런 것들은 그녀에게서 제왕의 풍모를 느끼게 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황실히 제왕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체형은 아주 완벽했다. 걸을 때는 발걸음이 아주 경쾌했고, 몸동작은 우아했다. 신체의 외모로 보면, 그녀는 확실이 매력이 뛰어난 여인이었고, 그녀의 황태후 신분과 어울렸다. 그녀의 용모는 경국지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력이 충만했고, 활력이 넘쳤다. 그녀의 피부색은 감람색을 띄고 있었고, 검은 속눈썹 아래에 한 쌍의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이는 그녀의 얼굴이 빛나게 해주었다. 그녀의 칠흙같은 두 눈동자에 때때로 미소를 띄고 때때로 분노를 나타냈다.
서태후는 역사상 유례가 없고, 세계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다. 그녀는 19세기 후반기에 대청제국을 통치하였을 뿐아니라.그녀는 대청제국의 멸망을 늦추기도 하였다. 그녀는 중국정치가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개혁조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만주족의 다른 부녀와 비교하여, 그녀는 군계일학이었다. 다른 민족의 부녀와 비교하여도 그녀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성격의 강인함이나 능력을 보더라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어릴 때 모친을 도와서 잡일을 했고, 나중에 궁중에 들어와서 '귀인'이 되었다. 그녀는 황제의 생모이자, 황제의 처였다. 그녀는 황제를 세웠고, 황제를 쫓아냈다. 그녀는 중국을 반세기가량 통치했다. 이것들은 모두 여자들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었던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19세기후반에 가장 대단한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과장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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