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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절세보물 비취서과(翡翠西瓜)

by 중은우시 2008. 4. 15.

원제목: 한 청나라말기의 여인과 한 쌍의 비취서과에 얽힌 옛 이야기

북경TV 채널3 <<전기중국>> 2008년 4월 13일 저녁 18시35분 방영

프로듀서: 육춘(陸春)

 

서론

 

넓다란 자금성 안에서, 일찌기 24명의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취미의 명,청황제가 거주했었다. 그리고 이들 제왕들 중에서, 2 사람은 완전히 똑같은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모두 옥(玉)을 특히 좋아했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고궁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3만여건의 옥기(玉器) 중에서 2만여건은 모두 이 두 사람이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집정기간이 61년에 달하는 건륭황제이고, 또 다른 사람은 수렴청정 46년의 서태후(자희태후)이다. 우리가 오늘 얘기할 것은 바로 이 청나라말기의 여인의 이야기이다.

 

1793년, 매카니라는 영국사진이 대영제국의 예물을 가지고 청나라의 건륭황제를 배알했을 때, 옥기를 좋아했던 건륭황제는 그에게 정교하게 만든 백색옥여의(白色玉如意)를 선물로 준다. 당시의 매카니는 아마도 잘 몰랐을 것이다. 이런 물건을 왜 중국인들은 진귀한 보물로 숭상하는지. 그의 눈에 이 물건은 그저 돈도 얼마나갈 것같지않은 흰색 돌맹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자주 이렇게 황당하고 재미있다. 여러해가 지난 후, 한 외국인이 그들 서양에서는 아주 귀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서태후에게 바쳤는데, 천하를 주무르던 이 청말의 여인은 이와 같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외래품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별 것아니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그저 손짓으로 휘저으며, 담담하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저리 가져가라" 아마도 이 동방여인이 보기에, 이 반짝이는 서양의 다이아몬드도 그녀가 수장하고 있는 돌맹이보다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서태후는 일생동안 취미가 다양했다. 그녀는 구정을 좋아했고, 극을 보는 것을 즐겼다. 그녀가 구정을 좋아했던 진정한 목적은 그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연말선물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내주는 선물을 서태후는 하나하나 자세히 보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남겨서 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창고로 보냈다. 이들 선물에는 작은 용품, 주보, 비단, 의복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서태후는 28세때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한 후 그녀가 74세로 죽을 때까지 46년간, 매년 구정에는 선물을 받았다. 어떤 때에는 몇개의 방을 채울 정도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서태후는 아예 보관창고를 별도로 만들었다. 서태후가 선물을 아주 중하게 여겼으므로, 대신들도 연말선물을 하는 것을 이 어르신에게 잘보여 관직이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기이한 새옷

 

당시 직예총독을 지내던 원세개는 서태후의 이런 성품을 잘 알았다. 그는 여러번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을 선물해야, 직접 주보를 보내는 것보다 교묘할까? 마침내 원세개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이해에 서태후가 받은 선물에는 원세개가 선물한 아주 호화로운 황색 포자(袍子)가 들어있었다. 호화롭다는 것은 바로 이 포에는 각종 색깔의 다이아몬드, 진주로 거대한 모란꽃을 만들었는데, 이파리는 녹보석을 박아서 만들었다. 서태후는 한눈에 이 선물이 마음에 들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새해의 첫날, 서태후는 기다리지 못하고 이 황포를 자기의 몸에 걸쳤다. 거울 앞에서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루종일 감상했다. 이 값비싼 포자는 그녀의 새해에 적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포자에는 너무많은 보석이 달려 있어서, 입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서태후는 입어본 다음에는 별로 편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태후는 하루종일 입었다. 극을 다 본 후에 침궁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갑옷을 벗는 것처럼 그 포자를 벗었다. 나중에 서태후는 이 보기는 좋으나 입기는 좋지 않은 포자를 보관했다. 비록 이 포자는 그녀가 평생 딱 한번 입었지만, 나중에 이 보석으로 가득찬 포자는 나중에 그녀를 따라 무덤에 배장품을 묻힌다.

 

비취의 내력

 

한번은 한 사람이 버마에서 난 녹색옥석을 서태후에게 바였다. 이 깨끗하고 녹색이 영롱한 물건을 보고 서태후의 눈은 홀연 빛났다. 그녀는 바로 큰 소리로 소리쳤다: "좋은 물건이군. 상을 내려라." 이후 이 선물을 바친 자는 적지 않은 하사품을 받았다. 버마에서 나는 녹색보석이 바로 "비취(翡翠)"이다.

 

비취의 내력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비취"라는 단어는 원래 두마리 새의 이름이다. 붉은 깃털을 가진 새는 "비"라고 하고, 녹색 깃털을 가진 새는 "취"라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은 같은 색깔의 옥을 가리켜 '비취'라고 하게 된다. 소위 "홍비녹취(紅翡綠翠)"는 명말청초에 중국에 전래되고, 서태후시기에는 이미 비취수장이 중국에 아주 성행하게 된다.

 

비취가 중국에 전래된 후, 비취는 바로 옛날부터 전해져온 백옥(白玉)을 대체하고, 옥기천하를 통일한다. 건륭황제이래의 황제들이 모두 비취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비취는 청나라때 "황가옥(皇家玉)"이라는 미칭을 얻는다. 사람들은 신비한 기운을 지니고, 장중함을 품고 있고 순결하고 부드러운 옥석의 왕을 행운과 행복의 상징으로 보았다. 서태후는 비취에 대하여 거의 열광적이라 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녀가 거주하는 장춘궁에는 어디서던 비취옥기로 만든 용품을 볼 수 있었다. 차를 마시는 것도 비취찻잔이고, 식사할 때 쓰는 것도 비취옥젓가락이다. 머리에 꽂은 것도 비취비녀이고, 손에 낀 것도 비취반지이다. 손에 들고 노는 것은 비취백채(翡翠白菜, 김치모양의 비취)였다. 서태후가 비취를 남다르게 좋아하게 됨에 따라, 버마의 유명한 특산품은 일시간에 청나라경내에서 가격이 백배나 뛰게 되고, 명성을 크게 얻는다. 청나라의 왕공귀족은 모두 한두개의 좋은 비취물건을 가지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았다.

 

비취서과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서태후는 이화원내에 주보방(珠寶房)을 가지고 있는데, 사면에 단목으로 만든 장식장이 있고, 여기에는 크고 작은 유리금합이 있으며, 비단으로 싼 정교한 합의 안에는 각양각색의 주보, 금은, 보석, 마노, 비취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수천수만의 보물중에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비취서과(서과는 수박이라는 뜻임)였다.

 

비취서과는 어떤 모양인가? 왜 진귀한가? 일반인들은 비취가 녹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자주 보는 진하기가 똑같지 않은 녹색이외에, 비취는 홍, 황, 백, 흑, 회, 남, 자의 구분이 있다. 각각의 색에도 진하기는 다르다. 동시에 여러 색깔이 병존하는 비취는 의미가 풍부할 뿐아니라 더더욱 진귀하다. 전설중의 비취서과는 바로 녹색, 홍색, 흑색의 세가지 색깔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이 비취서과는 원래부터 껍질은 파란색이고, 거기에 묵록색의 줄이 있으며, 안에는 검은 씨, 붉은 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대자연이 만들어낸 신기한 물건이고, 귀부신공(鬼斧神工)이라 할만하다.

 

이 비취서과는 곤륜산에서 자연스럽게 생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각도 아주 정교하게 하였다. 서태후는 이를 무가지보로 아꼈다. 가장 튼튼한 장식장속에 넣어두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중에 기계자물쇠를 달았다. 만일 이 자물쇠를 열려면 반드시 열쇠를 왼쪽으로 다섯번 돌려야 했다. 만일 방향이 틀리거나, 혹은 한번이나 반바퀴 잘못 돌리면 열수가 없다. 이 비취서과의 안전을 위하여, 서태후는 태감으로 하여금 삼인1조로 밤낮없이 이 주보방을 지키게 했다. 매번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서태후는 태감에게 비취서과를 가져오게 해서, 자기의 손안에 놓고 만지며 감상했다. 그녀는 자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여 말하기를: "이 비취서과는..네가 천하를 다 뒤져봐도 이 한쌍 뿐이다."

 

황궁안에도 도적이

 

한 해는 이화원내에 일련의 괴이한 일들이 발생했다. 하루는 원보를 몇 개 잃어버리고, 다음 날은 진주를 몇 개 잃어버렸다. 서태후의 진궁인 낙수당에 진열한 것도 누군가가 몇 개를 훔쳐가 버렸다. 이화원내에도 좀도둑이 있는 것이다. 이때, 서태후는 즉시 그녀가 가장 아끼는 그 비취서과를 생각했다. 황급히 수하 태금에게 그녀의 두 보배를 더욱 잘 지키도록 당부했다. 바로 이때, 한 태감이 황급히 뛰어와서 보고했다. 비취서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태후는 듣자마자 대노했고, 즉시 주보방을 지키던 태감을 매질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기괴한 것은, 이들 태감들 중에서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억울하다는 말만 했다. 서태후는 즉시 명하여 이화원내를 샅샅이 수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성내외에 고시를 붙여 현상금을 걸었다. 그때, 이화원일대에는 보초가 가득 깔리고, 엄밀하게 조사했다. 곳곳에서 비취서과에 대하여 물었다. 바로 이때, 옥천산 서쪽의 분호영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 관청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람은 왕노도(王老道)였다. 그는 반년전에 산동에서 왔고, 이씨의 가게에 머물렀다. 그는 머리에 도사머리모양을 하였는데, 아는 것이 많고 의로운 것에는 참지않았다. 그는 장사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았지만, 먹고 마시는데 걱정이 없었다. 그는 매일 옥천산과 이화원일대를 오갔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정명원 천하제일천에서 세수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청수원에 가서 발치가무술을 연마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어떤 때에는 서정묘 묘회에서 주먹과 발길질을 선보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그를 본 사람은 모두 그가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는 발바닥에 털이 나서, 높은 곳도 뛰어오르고, 담장을 넘을 수 있으며, 하루에 천리를 가며, 명실상부한 비모퇴(飛毛腿)라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왕노도가 분호영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에 부근의 삼리오둔에는 확실히 적지 않은 기괴한 일들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분호영의 이화자는 원래 찢어지게 가난했고, 다른 사람의 무덤을 봐주면서 겨우 굶어죽지 않았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창문에 두 개의 원보가 놓여 있었고, 아래에는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집안이 빈한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안된다. 돈있다고 바로 쓰지 말고 땅을 사서 농사를 지어라"라고 쓰여 있었다. 이화자는 자기의 명이 좋다고 생각하고, 재신이 땅에 내려와서 돈을 주었다고 생각하여 땅을 몇마지기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에 북오촌의 허화는 80세된 모친이 병이 들어도 의원에게 찾아가지 못해서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가 걱정에 빠져 밥을 하려고 하는데, 아궁이에 종이로 싼 것이 있어서 꺼내서 열어보니 진주가 두 개  있었다. 나중에 그는 모친의 병을 치료하고 다시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하여 먹을 걱정은 안하게 되었다. 관청에서 이런 괴이한 일들을 듣고 나서 계속 조사해보았다. 그리고 이 행적이 괴이한 왕노도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하루는 저녁을 먹은 후, 왕노도가 가게주인인 이씨에게 말했다: "내가 가게에 머문지 반년여가 되는데, 당신의 보살핌을 받아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그동안 머문 비용이다"라고 하면서 원보를 하나 꺼내서 이씨에게 주었다. 이씨는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왕노도는 "받으십시오. 나때문에 불편하게 된다면 아주 미안합니다. 만일 나때문에 손실을 입으면 이것을 배상비로 생각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왕노도는 작은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동쪽으로 가버렸다. 이씨가 막 원보를 잘 넣어놓자마자, 관리들이 들이닥쳤다. 칼과 검을 들고, 산동에서 온 늙은 도사를 찾았다. 그들은 이씨를 심문한 후, 상자와 가게를 한동안 뒤지면서 애를 먹였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분호영에서 물러갔다.

 

잃었다 다시 찾다.

 

분호영촌의 바깥에는 쌍수문(雙水門)이 있다. 바로 이화원에서 향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하루는, 북오촌의 간씨가 분뇨를 수거하기 위하여 쌍수문을 지나는데, 악취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누군가가 죽은 아이를 버렸나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똥푸는 것으로 벌려보니, 썩은 돼지고기안에 두 개의 수박이 쌓여 있었다. 간씨가 자세히 보니, 이것은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수박이 아니라, 단단하고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비취서과였다. 간씨는 깜짝 놀라서 관청에 알렸다. 나중에 궁안의 태감들이 이것이 바로 이화원에서 잃어버린 바로 그 비취서과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간씨는 서태후의 보물을 되찾아오는데 공을 세웠으므로, 궁에서는 그에게 옥천산에서 황궁까지 샘물을 운송하는 일을 맡겼다. 이 일은 수입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간씨집안은 이 일대의 부호가 된다. 비취서과는 다시 이화원의 주보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보물을 훔친 자는 잡히지 않았다. 하루는 정명원의 한 석장(石匠)이 옥봉탑으로 가서 탑문을 수리하고자 했다. 제7층까지 올라갔는데, 한 노도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노도사를 감히 깨우지 못하고, 상사에게 보고했다. 칼을 든 관병이 붙잡으러 왔을 때, 탑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탑의 벽에 글자흔적만 볼 수 있었다. 보니 바로 "왕노도"의 세 글자였다.

 

서태후는 흔적없는 비적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했다. 그녀는 일찌기 왕노도의 화상을 그려서 전국에 수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세상에는 다시는 왕노도의 종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관청의 조사도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서태후는 잃었다 다시 찾은 보물을 더욱 아꼈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들어올 때, 황급히 서태후가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쳤다. 황궁을 떠날 때, 그녀는 태감에게 자기가 아끼는 주보, 비취, 보석음 상자에 담아서 들고 가게 했다. 이 비취서과는 한번도 그녀의 신변을 벗어난 적이 없다.

 

동릉도굴시 묘에서 비취서과를 얻다.

 

1908년 겨울,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력을 누린 서태후는 결국 황천으로 가고, 하북 준화의 청동릉에 묻힌다. 그 이후, 비취서과를 언급하는 사람은 적다. 마치 그들도 주인과 함께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20년후, 국민혁명군의 장교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나라는 어지러워 군대에 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1928년 6월, 그는 잔여부대를 이끌고 하북성의 계현으로 간다. 이곳은 바로 청동릉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도박꾼 출신인 그는 건륭, 서태후등의 무덤에 수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를 훔칠 마음을 먹는다. 나중에 그는 서태후를 모신적이 있는 태감의 입을 통해 놀라운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대태감 이연영의 구술을 조카가 받아적은 <<애월헌필기>>를 베낀다. 이 장교는 즉시 경천동지할 결정을 내린다.

 

이연영은 서태후가 가장 신임한 태감이다. 서태후가 죽은 후 관에 보물을 넣을 때 그도 참여했었다. 이연영과 조카가 함께 쓴 <<애월헌필기>>에는 서태후의 부장품의 종류, 수량, 위치와 가치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당시 이연영은 서태후를 매장할 때 직접 목격자이다. 손전영은 바로 이 목록을 받아들고 서태후의 무덤에는 확실히 보물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이 장교가 바로, 후인들이 "동릉대도"라고 부르는 국민혁명군 제12군 군장 손전영이다. 손전영은 공개적으로 도굴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만천과해의 사기극을 꾸민다. 6월중순, 손전영은 부하에게 사방에 포고문을 붙이게 한다. 그리고 군사훈련을 시행한다고 하며 청동릉 10리주위는 통행을 금지시킨다. 일체의 조치를 취한 후, 그는 전군을 이끌고 청동릉으로 들어간다. 각 황릉과 비빈의 능침을 점령한 후, 대규모의 도굴작업이 시작된다.

 

손전영은 공병장에게 공병을 지휘하여 서태후묘를 파게 한다. 서태후묘는 설계가 교묘하고 기관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암도가 은폐되어 있었다. 공병들은 곡절을 겪으면서 겨우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묘도를 찾아낸다. 이어서 폭약을 터뜨려 서태후릉의 문을 연다. 몇몇의 사병이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칼로 관을 열자, 관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태후는 잠자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전신에는 금은주보로 감싸여 있었다. 살아있을 때 그녀가 아끼던 물건은 모두 그녀의 몸에 덮여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진주로 된 봉관이 있고, 입에는 야명주를 하나 물고 있었다. 머리에는 녹색의 비취 "하엽(荷葉)"이 있고, 손에는 항마옥저가 쥐어져 있었다. 발아래에는 벽새연화(碧璽蓮花)가 놓여 있고, 곁에는 두 개의 비취백채와 4개의 비취첨과(甛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도화, 이화, 행화, 대추등 비취보물이 크고 작은 200여건이었다. 서태후의 두 다리 양쪽에는 각각 하나씩 전설 속의 비취서과가 놓여 있었다. 길이는 7,8촌이었고, 역시 껍질은 녹색이고, 속은 붉었으며 몇 개의 검은 씨가 진짜 같았다. 이때, 모든 도굴범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생동안 호화스럽게 살았던 서태후는 역시 비취광이었따.

 

국보의 신비스런 실종

 

1928년, 서태후 몸의 몇개 수의외에 서태후 지하궁전의 모든 진보는 강탈당한다. 그해 7월 11일, 하북준화 마신교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 제12군은 동릉을 떠난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손전영은 지방에서 30대의 트럭을 강제로 끌어모았다고 한다. 후인들의 추측에 의하면, 이들 차량의 용도는 동릉의 진보를 우송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보의 가치는 도대체 얼마나될까? <<애월헌필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태후에게 부장된 물건은 발끝에 놓인 두 개의 "비취서과"의 당시 평가가격은 500만냥백은이었다. 후세인의 추산에 의하면 1928년, 동릉에서 도굴된 희세진보의 가치능 억이 넘을 것이고,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나중에 손전영의 추악한 죄상이 드러나자, 세상이 깜짝 놀란다. 전국각지의 각계인사는 손전영을 엄벌할 것과 보물을 회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동릉도굴사건을 조사하게 시킨다. 손전영은 재물로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뇌물믈 바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서태후의 입에 있던 커다란 야명주는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 송미령의 신발에 붙은 장식품이 된다. 비취서과는 송자문에게 보내어진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손전영이 당시 송자문에게 보낸 것은 비취백채이지, 비취서과가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서과이든 백채이든 이런 뇌물로 손전영은 법망을 빠져나간다. 이들 보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 까? 그 비취서과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1947년, 손전영은 탕음전투에서 유등대군(유백온, 등소평) 휘하의 초영은 장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초영은 장군의 전기문학에 따르면, 초장군은 손전영의 부하가 휴대한 상자에서 옥석서과(수박)을 하나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초장군은 이미 사망했고, 이 기록이 진실인지 알 방법이 없다. 후인들도 이 옥석서과가 바로 비취서과인지 아닌지는 알 방법이 없다.

 

꼬리말

 

나중에, 어떤 사람이 타이페이고궁박물원을 참관할 때, 두 개의 진관지보를 보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서태후 지하궁전에 있던 그 비취백채라고 한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서태후의 비취서과는 흔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의 행방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대만에 가 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대륙의 모모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아마도 여러가지 이유로 수면위로 드러나기 힘든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의론이 분분할 때, 1990년대초, 미국의 펜실베니아박물관에 동릉에서 도굴된 중국문화재를 전시하였다. 놀라운 것은 70년간 사라졌던 비취서과가 의외로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중국내외에서 경탄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곳까지 갔는지는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그에 관한 사진이나 영상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생각해본다. 그 비취서과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왜 서태후가 그렇게 아꼈을까? 우리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방송을 들은 후, 우리에게 비취서과에 관련된 단서를 제공해주기 기대한다. 우리는 또한 세계각지에 흩어진 중국의 국보들이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