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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중국혁명

by 중은우시 2008. 12. 9.

글: 천인합일(天人合一)

 

영여우방, 불여가노(寧與友邦, 不與家奴)

차라리 우방에게 넘겨줄 지언장, 집안노비에게 넘겨주지는 않겠다.

- 서태후

 

100년전의 오늘 1908년 11월 15일, 서태후가 서거했다. 그녀가 죽기 하루전에 그녀는 광서황제를 독약을 죽였다(자백해둔다. 본인은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광서황제의 사인에 관해서는 그저 추측이다). 이 완강하고 권모술수를 잘 쓰던 여인은 숨을 거둘 때까지, 중화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비록 개혁파가 있고, 비록 민간폭동이 있고, 비록 이들 역량이 충분히 강성했지만, 최종적으로 서태후에게 모두 소탕되었다. 유신변법이 실패한 후, 광서황제도 그녀에 의해 유폐되었다.

 

역사에 가설은 없다. 다만, 오늘의 중국현실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서태후가 없었다면, 중국은 100여년전에 전제정치의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이 가설은 확실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철학의 하나의 근본명제와 관련된다: 역사는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청말역사중, 권력집단내에 서로 다른 역량간의 힘겨루기가 있었다.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역사변혁의 요소를 개인의 사상에 돌릴 수 있을까? 혹은 역사는 정말 마르크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인민이 창조하는 것일까?

 

이 특수한 시절에, 나는 뭔가를 써야한다고 느꼈다. 많은 사람들을 곤혹하게 하는 문제의 답안을 찾아야 한다고 느꼈다. 다만, 나는 역사의 비밀을 해석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중국청년보>>의 한 소식을 보고서야 비로소 찾았다. 답은 내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작은 사건들 속에, 어제의 역사소식이 있다. 이 소식은 바로 중국이 처음으로 세계위생조직(WHO)에 "망은(網, 인터넷중독증)"을 정신질환으로 신고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돌연 깨달았다: 나는 이미 정신병자이구나.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는 2.53억명의 인터넷중독자가 있다. 이들은 대체로 정신질환자와 다름없다. 내가 곧이어 생각한 것은 "왜 이들은 인터넷중독에 빠진 것일까?" 설마 그들은 정말 할 일이 없는 것일까? 나의 답은 '네티즌들의 정신병은 현실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들은 할 수없이 인터넷을 통하여, 사이버공간에서, 자기가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낸다, 네티즌들의 목소리는 현실세계에서는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아무리 뜨겁게 달구어지더라도, 현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소식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중국사회의 역량은 인터넷에 있지 않고, 민의에 있지 않고, 목소리에 있지 않고, 언론에 있지 않고, 사상에 있지 않고, 현실에 있다는 것이다. 이 현실은 인터넷을 신경쓰지 않고, 민의를 신경쓰지 않고,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고, 언론을 신경쓰지 않고, 사상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다. 여전히 '봉쇄'상태이다. 인터넷, 민의, 목소리, 언론, 사상, 이들은 모두 "개인주의"의 것들이다. 즉, 중국은 "대외개방"이 있을 뿐, "대내개방"은 영원히 실현불가능하다. 오늘 우리는 정신병이라는 압력을 등에 지고 있어, 더더구나 "개인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는 다시 서태후와 중국혁명의 주제로 되돌아가보자. 서태후는 한 여린 여인이지만, 주위의 권신들은 사분오열되어 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여전히 방대한 전체 중국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억누를 수 있었을까? 이것은 바로: 중국은 왜 영국, 프랑스와 같은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사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왜냐하면 전체 중국의 사회구조(사회사상 포함)가 수천년동안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나는 황조교체는 통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이거나 혹은 외족의 침입에 불과했다. 소위 "농민반란"은 승리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무수한 농민폭동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위 성공한 농민반란도 최종적으로 이전의 역사전통을 계승해서, 농민이 황제에 오르는 결과만을 낳았다. 즉, 다시 원래 자기의 동류를 압제하는 것이다.

 

이런 양극사회에서 사회사상은 반드시 봉쇄되며, 진보할 수 없다. (왜 이런가? 더욱 깊은 역사적인 원인이 있는가? 이것은 또 다른 주제이다.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중국사회형태와 거의 상반되는 영국을 돌아보자. 영국의 사회구조는 균형있고 개방되어 있다. 개인주의의 결과로 반드시 민주,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그리고, 사회는 이로 인하여 활력이 넘친다; 혁명적이지만 연속성도 있다, 사회는 자유와 보수가 통일되어 있고, 사회사상도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곳에서 혁명이 쉽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사회계층간에 손쉽게 균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쉽게 연맹, 타협과 협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여하한 사회계층도 홀로 다른 사회계층들을 억누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롭게 서로 다른 민의, 목소리, 언론과 사상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추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없으면, 진정한 현대국가는 없다.

 

개인주의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왜 중국에서 진정한 사회개혁이 일어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은 일찌기 <<역사철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개인의지의 최고체현이다" 그의 이 말은 만일 서방국가의 큰 배경에서 이해하지 않는한 우리는 왕왕 그것의 양면성을 보게 된다. 사실 이것은 바로 "개인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중국사회는 개인주의의 역사전통이 없으므로, "국가"는 계속하여 엄격하게 "가족주의"로 구속했다. "가천하(家天下, 천하를 한 집안이 소유함)"는 중국의 "국가형태"로 되었다. 이는 중국역사가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공자는 천고의 죄인이다"라는 주장이 기본적으로 성립될 수 있다. 유가의 윤리도덕은 도덕의 자유본성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성장할 수 없었다. 당연히 외곽문명이 있었고, 농업문명과 유목문명의 충돌이라는 요소도 있었다.

 

심성이 없는 중국인들은 수천년동안 최대의 추구점이 그저 생물적 본능이었다. 배부르게 먹는 것이 지금까지도 국가의 가장 큰 임무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태후와 같은 악독한 마음을 지닌 여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세살짜리 어린아이도 이 국가를 통치해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광서황제가 죽은 날, 서태후는 부의라는 3살짜리 어린아이를 중국의 황제에 임명한다. 만일 서방국가의 식민침입과 서방문명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여전히 황제사회였을 것이고, 절대 사회변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주의의 전통이 없으므로, 사회구조에서 균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민"은 영원히 비천한 노비이다. 반란에 성공을 한다고 치더라도, 머리가 없는 천민은 인성 자체의 탐욕을 더욱 심하고 두드러지게 드러낼 뿐인 것이다. 사실, 젊은 광서황제는 현명한 군주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변혁을 요구한 사상은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주위의 몇몇 서양글을 읽은 선비들만이 따랐을 뿐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중국의 역사조건이 다른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전통하의 사회변혁은 비교적 온화하다. 유혈사태를 몰고오지 않는다. 미국의 금년 대통령선거결과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중국은 개인주의를 배양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사회변혁으로 인한 파괴적인 폭풍우를 피할 수 있다. 다만, 역사관성이 작용하므로, 중국과 같은 나라는 개인주의를 배양하기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대국굴기'의 꿈이 직면한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세계역사의 조류가 우리에게 개방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글로벌화와 인터넷의 역량하에서, 우리는 확실히 "대외개방"을 이루었다. 다만, 개인주의를 배양하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대내개방"에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는 한가지만 하면 된다: 모두 마음대로 말하게 하고, 언론자유를 실현하면 된다. 국가가 나서서 우리의 정신병을 감정하지 않으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병들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