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고궁박물원의 紅燒肉
대만고궁박물원의 玉白菜
글: 수은하(水銀河)
서태후에 대하여 나는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중국을 거의 반세기동안 통치하면서, 자신의 권세는 하루하루 확장시켰고, 중국의 국력은 하루하루 쇠퇴시켰다. 그리하여 중국은 수천년이래 가장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최근 관련자료를 읽다보니, 나는 서태후가 어떤 때에는 좋은 일도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로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예를 들면, 1900년, 살기등등한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밀려올 때, 서태후는 범상치 않은 일을 한가지 해냈다. 바로 이 조치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토지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물려준 우리의 보배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옥백채(玉白菜), 홍소육(紅燒肉)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야기는 무술정변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태후는 말을 잘 듣지 않는 광서황제를 폐위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수하의 대신과 어의들로 하여금 광서황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여론을 조성하게 한다. 그때 청나라정부는 이미 상당히 위축되어 있어서, 황제를 폐위시키는 일까지도 자기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먼저 서방열강들과 협의해야 했다. 서태후는 이홍장을 보내어 영국 프랑스등의 입장을 타진해보았는데,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중국의 북방에는 각국열강들이 중국을 나눠먹으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많은 지역에서 의화단운동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양인들을 죽이자는 것을 구호로, 외국영사관공사관을 빈번히 습격했다. 그리고 전도사와 국내의 친서양인들을 공격했다. 이런 국면하에, 청나라조정내부의 단친왕등은 극력 의화단의 힘을 빌려서 서방열강에 대항하자고 주장한다. 화가난 서태후도 묵인해주고, 의화단의 활동은 이로써 합법화된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은 지금까지 온순했던 청나라조정의 태도가 졸지에 애매해지고 의화단의 활동을 본척만척 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서양인들도 화가 났다. 그리하여 스스로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사정이 이런 지경에 이르자, 서태후도 더이상 모른척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금후 십여일동안 청나라정부의 정규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복상(董福祥)이 이끄는 감군(甘軍)이 직접 공사관영사관구역을 공격하는 전투에 가담하게 된다. 즉, 이때 전투의 성격이 이미 바뀐 것이다. 만일 이전에는 의화단이 사관구역을 공격하는 "민란"이었다면, 이제는 청나라정부의 정규군이 조직적으로 공격하니, 청나라정부의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국제외교준칙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이전에 했던 약속도 생각지 않고, 공공연히 다른 나라에서 설치한 대사관을 공격한 것이다. 그 심각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서방열강이 병력을 출동시킨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미 나라와 나라간의 충돌로 승화된 것이다.
이때 이미 나이 환갑을 넘긴 서태후는 돌연 용기를 내어 팔국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서양인들을 모조리 쫓아내버리고, 외국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겠다고 호언한다. 아쉽게도, 의화단은 진정 "도창불입"이 아니었다. 팔국연합군의 대공격하에, 6월 17일, 대고포대가 함락된다. 7월 14일에는 천진이 함락된다. 8월 14일에는 북경성아래까지 밀고 들어왔다. 다급해지자,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영국프랑스연합군의 공격으로 원명원이 불탄 것을 보았던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외국군대는 북경에 도착하면 반드시 그녀가 가지고 가지 못한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해갈 것이라는 것을. 외국군대는 귀국할 때마다 그녀의 보물들을 가지고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 영국등의 상인들에게 팔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들 보물의 진정한 가치를 잘 몰랐으므로, 그들을 진귀한 기념품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떠나기 전에 그녀는 이 거대한 재물을 보호할 독특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녀는 모든 가장 진귀한 기진이보를 하나의 특수한 방안에 집어넣게 한다. 거기에는 금덩이와 은덩이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방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2겹의 가운데가 비어있는 벽이었다. 외벽은 옛날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서 그냥 보기에는 낡은 담벼락에 불과했다. 옛날 벽돌의 안에는 새로운 벽돌로 담을 쌓았다. 서태후의 보물들음 모두 이 가운데 빈 틈에 넣었다. 서양인들의 약탈을 방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하늘의 도움을 바랄 뿐이었다. 이외에 서태후는 다른 금은주보를 크기가 서로 다르게 묶어서 여러개의 보자기로 싸서 자금성내에 곳곳에 있는 우물에 던져두었다. 당연히 중궁의 재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이상 적절하게 숨길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일부분은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외국사병들에게 모조리 약탈당했다. 사실상, 이렇게 파괴된 부분도 적지는 않다. 거기에는 영락대전도 포함된다.
1902년에 이르러, 바깥을 2년간 떠돌아다닌 서태후가 북경으로 마침내 되돌아온다. 이 강인한 할머니가 처음 한 일은 즉시 외국오랑캐에 의하여 파괴된 자금성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기 전에 숨겨두었던 우물속의 재물을 하나하나 건져올린다. 수하를 시켜서 금고의 내벽을 허물어뜨리자, 궁중의 가장 진귀한 보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양인들이 보물을 찾아내기 위하여 곳곳을 뒤졌지만, 이곳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지척지간에 이런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줄은.
비록 서태후가 이들 보물을 보호한 것이 사리사욕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행동은 많은 국보가 팔국연합군에 약탈당하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서태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청궁녀회고록: 궁녀들은 서태후를 어떻게 모셨는가? (0) | 2010.04.06 |
---|---|
서태후의 두 정변공신의 서로 다른 운명 (0) | 2009.08.22 |
서태후와 중국혁명 (0) | 2008.12.09 |
어느 미국인이 본 서태후 (0) | 2008.04.30 |
서태후와 절세보물 비취서과(翡翠西瓜) (0) | 2008.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