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는 어떻게 권신 숙순(肅順)을 무너뜨렸는가?

by 중은우시 2008. 2. 15.

 

1861년 10월 6일 오시, 압송도중에 백성들이 던지는 기왓조각, 진흙덩어리도 얻어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오른 봉두난발의 중년남자가 북경 서시의 형장에 꿇어앉아 있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는 얼굴색에 변함이 없었으며, 시종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마침내 망나니의 칼이 그의 목을 몸에서 분리시켰다. 그가 바로 함풍제시절 일세를 풍미했던 숙순이다.

 

몇 시진 전에 숙순일당의 또 다른 핵심인물인 재원(載垣), 단화(端華)는 자진을 명하는 성지를 받고 자기의 목숨을 끊었다. 중국과 세계를 놀라게 한 6일간의 "신유정변(辛酉政變)"은 이렇게 서태후일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어떻게 해서 6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숙순일당을 제거할 수 있었을까? 경위를 설명하자면, 함풍황제의 사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861년 7월 17일, 함풍황제가 열하(熱河)에서 서거한다. 유언으로 재원, 단화, 숙순등 8명의 대신을 "찬양정무왕대신(贊襄政務王大臣)"에 봉하고, 갓 6살된 새 황제 재순(載淳, 동치제)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던 서태후와 숙순은 모두 심기가 뛰어났다. 한 사람은 어린 황제의 생모이고, 한 사람은 전임황제가 임명한 어린황제의 보정대신이다. 모두 기회를 붙잡고 싶어 했으며, 청나라의 최고통치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서태후를 대표로 하는 후궁과 숙순을 대표로 하는 귀족간의 권력투쟁은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유약한 여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숙순일당을 제거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변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서태후는 여러가지 심기를 �던 것이다.

 

첫째, 성공적인 열하의 밀모.

 

황태후의 지위를 획득한 후, 서태후는 그녀를 도와 숙순을 무너뜨릴 강대한 세력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때, 열하의 형세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공친왕(恭親王) 혁흔이다. 서태후는 바로 혁흔을 주목한다. 혁흔은 함풍제의 동생으로 함풍제가 재위하는 동안 계속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함풍이 열하로 도망갔을 때, 일찌기 북경의 일체업무를 혁흔에게 위탁해서 처리하게 한 일이 있었다. 혁흔에게 있어서 북경은 자신의 근거지였다. 서태후가 함풍이 죽은 후에 열하에서 받은 정보들에서 당시의 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혁흔 또한 권력에의 열망이 큰 사람이었다. 공동의 정치적 이해관계하에서, 그들은 금방 인식을 같이 하게 된다. 그리고 숙순을 제거한 후의 권력분배에 대하여 협의를 하고, 신사협정을 체결한다. 그리하여 양대세력은 공동으로 숙순일당을 제거하기 위한 밀모를 초보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연합은 숙순에게 있어서 실패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성공적인 귀경

 

북경으로 돌아온 혁흔은 신속히 병권을 장악하고 북경,천진일대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던 병부시랑 승보(勝保)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정변을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서태후(자희), 동태후(자안)도 조치를 취하여,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자희는 잘 알고 있었다. 열하는 숙순일당의 근거지이다. 북경으로 되돌아가야만이, 혁흔의 세력을 빌어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금방, 서태후와 동태후는 밀담을 거쳐, 함풍제의 장례식과 신황제의 즉위식을 명분으로 삼아 북경으로 하루빨리 돌아가자고 요구한다. 정치적으로 열하에 눌러앉아 떠나고 싶어하지 않던 숙순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숙순을 무너뜨리는 계획에서 큰 발걸음을 하나 내딛은 것이다.

 

셋째, 성공적인 기선제압

 

서태후는 숙순이 지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상대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숙순과 재원, 단화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서로 연락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귀경하는 무리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숙순으로 하여금 함풍제의 관을 모시고 큰 길로 가게 하였고, 재원, 단화로 하여금 두 황태후와 어린 황제를 모시고 지름길로 가로질러 북경으로 가도록 하였다. 이처럼 길을 나눈 것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숙순을 뒤에 멀리 떨어뜨려 놓았을 뿐아니라, 그로 하여금 어린 황제를 이용할 기회를 봉쇄한 것이다. 동시에 서태후는 4일먼저 북경에 들어오고, 계획에 따라 정변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넷째, 성공적인 동정유발

 

서태후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영접나온 문무백관들에게 열하에서의 고초와 힘들었던 일을 호소하고, 숙순등의 불법무천(不法無天, 법도 없고 하늘도 몰라보는 것), 기군망상(欺君罔上, 황상을 기만하는 것)의 짓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아주 적절한 때는 눈물 콧물까지 흘렸다. 그녀의 이런 과장된 읍소와 진술은 여러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이 모두 평소에 전횡하고 발호하던 숙순이 확실히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고,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졸지에 숙순은 공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분개한 대학사 주조배(周祖培)는 심지어 앞으로 나와 서태후에게, "왜 중죄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어서 그는 "황태후께서 명을 내리셔서, 먼저 직위를 박탈하고, 다시 죄를 물으십시오"라고 말했다. 행동방안과 숙순일당을 치려는 투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다섯째, 성공적인 체포활동

 

서태후와 동태후는 북경에 돌아온 다음 날, 신속히 정변을 일으킨다. 9월 30일, 황제의 명의로 포고를 내려, 숙순등의 관직을 박탈한다. 10월 2일, 재원, 단화를 체포하고, 그들이 숙순에게 통보할 수 없도록 만든다. 10월 2일 밤, 귀경길에 있던 숙순을 체포한다. 10월 6일, 숙순, 재원, 단화를 처결한다.

 

서태후는 숙순일당을 신속하고 노련하게 처리했다.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겨우 6일의 시간내에 숙순, 재원과 단화의 세 주요인물을 처리했을 뿐아니라, 다른 5명의 보정대신도 직위해제할 사람은 직위해제하고, 유배를 보낼 사람은 유배를 보냈다. 그리하여 '찬양정무왕대신'은 모두 사라졌다. 서태후, 동태후와 공친왕 혁흔은 행동이 신속했고, 조치는 적절했다.

 

가장 깔끔하게 성공한 정변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