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원나라 이후에 주원장이 건립한 대명황조가 들어선다. 원나라는 주원장이 무너뜨렸으므로, 원나라군대도 주로 주원장이 무너뜨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원나라말기에 일어난 여러 반란군들 중에서 주원장이 이끄는 부대는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찌른 부대이다. 그렇다면,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찌른 주원장이 어떻게 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까? 주원장은 어떻게 가장 적은 댓가를 치르면서 개국황제의 옥좌에 오르게 되었는가?
군웅이 궐기하던 시대에 무기만 들면 왕으로 행세했다. 1356년에 여러 반란군들은 각자 자기의 지방을 지니고 있었다. 유복통은 한림아를 황제로 받들고 안휘, 강소, 하남, 산동등의 큰 땅을 차지하고 잇었고, 계속 북쪽과 서북으로 진공하고 있었다; 서수휘는 무창에서 황제에 오르고, 호북, 호남, 강서등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사성은 소주에서 황제에 오르고, 강소, 절강등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옥진은 사천, 운남으로 들어가서 역시 황제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 네 무리의 세력은 황하이남의 원나라세력을 무너뜨린 주력군이고, 그들은 이미 황하이남의 거의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의 주원장은 안휘중부의 제현, 화주의 작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2,3만의 병사밖에 없었다. 이것마저도 그의 장인인 곽자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는 역량이 약했지만, 혜안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남방의 한 곳이 아직 원나라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곳은 바로 장사성과 서수휘의 세력중간인 강소중부에서 절강중서부에 이르는 장류지방이었다. 이곳은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그 중간에는 호거용반의 역사적인 도시 남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즉시 병사를 일으켜, 채석기에서 몰래 장강을 넘고, 남경을 함락시킨 후, 계속 남으로 진공했다. 4년의 시간을 들여 절강의 금화, 구주에까지 이른다.
이후 주원장은 남방에서 다른 한족무장세력과 싸웠지만, 원나라 몽고군대와는 싸우지 않았다. 원나라의 황하이남의 군대는 대부분 다른 반란군의 손에 멸망한다. 주원장이 이끄는 부대는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찔렀다. 이 기간동안,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군은 대거 북벌하여, 4로로 나누어 원나라를 향하여 진공했다. 그 자신은 중로에서 하남성 전부를 차지했고, 개봉으로 천도했다. 북로는 산서에서 원나라의 대도까지 진격했다. 동로는 산동을 차지했다. 서로는 섬서성 봉상까지 치고 올라갔다. 일시에 홍건군은 백만대군을 자랑했고, 거의 원나라를 무너뜨릴 것같았다.
원래, 유복통의 역량이라면 원나라를 철저히 전복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유복통은 전략상 큰 실책을 범한다. 그는 병력을 집중하여 북경을 치지 않고, 병사를 4로로 나누어, 4방으로 공격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역량을 분산시켰고, 원나라군대가 각개격파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여기에 원나라에는 한 뛰어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차칸테무르이다. 그는 포의(布衣) 출신으로 홍건적에 전력을 다해서 대항하고, 거의 백전백승의 기적을 이룬다. 마침내 그는 백만 홍건군을 격파하고, 원나라의 강산을 유지시킨다.
홍건군이 궤멸당한 후, 주원장의 안휘 영지는 직접적으로 차칸테무르의 위협하에 놓이게 된다. 만일, 차칸테무르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은 바로 주원장이다. 주원장의 당시 실력과 남방이 4분5열되어 있던 상황을 보면, 절대로 그에게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주원장을 도왔다. 바로 이때, 원나라군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다. 귀족출신의 원나라 장수 볼로드 테무르는 차칸테무르와 같이 평민출신의 인물의 실력과 지위가 자기를 넘어서자, 질투하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를 이끌고 차칸테무르의 군을 공격한다. 차칸테무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군대는 산서, 하북에서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 몽고인들이 끊임없이 내부투쟁을 전개하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1362년 6월, 차칸테무르는 수하장수의 독수에 돌연 사망한다. 원나라는 대들보를 잃었다.
차칸테무르가 죽자, 주원장에게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전력을 기울여 남방의 각 한인무장세력들에게 공격을 가한다. 1363년,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대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고, 강서 전부를 차지한다. 1364년, 무창을 함락시키고 호북을 차지한다. 1365년, 호남, 광동을 평정한다. 1367년, 장사성, 방국진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기본적으로 남방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와 동시에, 북방몽고통치자의 내분은 더욱 가중되었다. 각 군대도 서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한번 싸우면 수년간 지속되었다. 원순제도 조정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원나라는 혼란상태에 빠지고, 날로 쇠약해 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원나라멸망의 천고죄인인 간상 츄스젠이 나타난다.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가짜화폐를 발행케 하여 큰 돈을 번다. 이뿐아니라, 그는 황제가 그에게 보로테무르와 쿠쿠테무르간의 갈등을 조정하라고 보냈을 때, 성지를 돈거두는 보검으로 생각했다. 그들중 누가 뇌물을 많이 주는지에 따라 성지의 내용을 조작했다. 남쪽에서 돈을 많이 보내면 남쪽에 유리하게 말해주고, 황제가 너희에게 밀지를 주었으니, 북쪽을 쳐도 좋다고 말해준다. 북쪽에서 보내준 돈이 많으면, 다시 북쪽을 향해서, 황제가 밀지를 내렸으니 남쪽을 치라고 말해준다. 국면은 점점 더 험악해지고, 내전은 끊이지를 않았다.
1367년, 남방에서 기본적으로 승리를 거둔 주원장이 고개를 북쪽으로 돌였다. 북방의 통치자들은 마치 남쪽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같았고, 내부투쟁에만 급급했다. 주원장은 바로 북벌의 명을 내린다. 10월 서달, 상우춘은 대군25만을 이끌고, 북방으로 진격한다. 공격하는 동안 거의 무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산동, 하남, 섬서등지의 원나라군대는 바로 항복했거나, 도망쳤다. 전투라고 할만한 것은 낙양에서의 한번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낙양의 수비장군인 토인테무르는 낙양성밖에 5만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주원장의 군대와 일전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우춘이 돌격하자, 즉시 궤멸했다. 당시 차칸테무르가 10년동안 회복한 섬서에서 산동에 이르는 광대한 중원지역은 주원장군대에 의하여 겨우 8개월만에 모두 점령되고 만다.
1368년 8월, 주원장의 군대는 북경으로 진공한다. 원순제는 삼궁의 후궁, 황태자등을 데리고 북경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모두 몽골대초원으로 가버린 것이다. 나머지 코케테무르, 리스치등 군대를 이끌고 있던 장군들도 더 이상 내전을 계속할 힘이 없어지고, 모두 아무런 저항없이 도망쳐버리고 만다. 주원장은 10개월만에, 아주 적은 댓가만을 치르고, 모든 북방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통일된다. 대명황조가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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