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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朱元璋)은 왜 손권(孫權)의 묘를 남겨두었는가?

by 중은우시 2010. 7. 27.

글: 예방육(倪方六)

 

남경은 중국장강유역에서 제일고도이다.

 

남경이 이처럼 대단한 역사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삼국시대 동오대제 손권에게 감사해야 한다. 손권은 도성을 남경으로 정한 첫번째 인물이다. 즉, 손권이 남경에서의 첫번째 귀인인 것이다. 현재까지 남경에서는 명나라문화포럼, 민국문화세미나등의 학술활동이 이루어졌지만, 손권 혹은 동오문화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는 없었다. 이는 손권에게 면목없는 일이고,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손권은 신봉원년(252년) 사월에 사망했고, 당시 나이 71세때였다.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7순이 넘도록 생존한 황제이다. 사후에 묘지는 성의 동쪽 종산(鍾山)부근으로 정해진다. 지금의 자금산(紫金山)이다. 손권묘의 구체적인 장소는 사실 확정되지는 못하고 있고, 그저 개략적인 위치만 알고 있을 뿐이다.

 

<<경정건강지.풍수.고릉>>(권43)에 따르면 손권묘는 "장산(蔣山)의 남쪽에 있고, 성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현대의 현지고찰에 따르면 이곳은 오늘날 중산능원내의 매화산(梅花山)이다. 즉, 명태조 주원장의 명효릉의 정남향 방향에 있다.

 

이곳의 원 이름은 손릉강(孫陵岡)이다. 아마도 손권이 이 곳에 묻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민국시대에 매화산으로 이름을 바꾼다. 현재는 그저 높은 언덕만 남아있을 뿐이고, 지상유적지는 남아있지 않다. 현재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석비, 주석비, 석상등이 있는데, 모두 후세인들이 세운 것이고, 당시의 유적은 아니다.

 

언덕 뒤에는 손권을 기념하는 석각이 새겨진 긴 복도가 있다. 모두 12개의 화상을 새겨두었는데, "강동을 차지하고 패업을 도모하다" "손권이 책상을 내리쳐 자르면서 조조와 싸우겠다고 맹세하다"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다" "손권이 물을 끌어들여 악독한 귀족을 징벌하다" "모녀가 바둑을 두며 손권에게 가리키다" "손권이 화가나서 마간으로 가다" "검으로 돌을 내리쳐 사업이 성공할 것인지를 시험하다" "전쟁의 성공을 도우며 각분고(북)를 두드리다" "어부가 신선탕을 전수하다" "손권이 육손을 알아보다" "장비가 과원에서 손권을 방문하다" "봉황이 백발로 혼인을 청하다"등 모두 역사전설에 있는 내용들을 돌에 새긴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손권이 강동에서 패업을 이루는 일생을 묘사하고 있다.

 

한때는 손권묘를 서릉(西陵) 혹은 장릉(蔣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손릉(孫陵)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왜 그런가? 원래, 종산(鍾山), 즉 자금산은 과거에 장산(蔣山)이라고 불리웠다. 이 산의 이름에는 내력이 있다. 한나라말기에 말릉위 장자문(蔣子文)이 도적을 쫓다가 이곳에서 사망한다. 손권은 그를 위하여 묘를 세웠주고, "장후(蔣侯)"에 봉했다. 손권은 조부의 이름이 손종(孫鍾)이어서 이를 피휘하여 "종"자를 쓰지 않고 "종산"을 "장산"으로 개명했다. 손권묘는 산의 이름을 따서 후세인들이 "장릉"이라고 부른 것이다.

 

손권묘는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파헤쳐질뻔했다. 이것은 바로 명태조 주원장이 손권이 선택한 이 묘지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 자신의 능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독룡부(獨龍阜)를 묘혈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부하들은 능지 주변의 묘들을 모조리 파버렸다. 남조의 고승 양나라승려 보지(寶志)의 묘도 이때 이장된다.

 

당시 능공대신 이신(李新)은 손권묘도 파헤쳐 없애려고 준비했다. 하루는 주원장이 현장으로 시찰을 나왔는데, 이신의 보고를 듣고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명나라때의 사람인 장대(張垈)가 쓴 <<도암몽억.종산>>(권1)에 따르면 주원장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손권도 사내대장부이다. 그를 남겨두어 문을 지키게 하라" 주원장이 이렇게 말해줌에 따라 손권이라는 동오의 제1대황제는 "제1문장"이라는 별명도 없게 되고, 황제가 황제를 위하여 문을 지키게 된다. 이는 중국제왕들 중에서는 아주 보기드문 경우이다.

 

주원장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인효군(仁人孝君)'의 선행을 베푼 것으로 이야기한다. 당초 주원장은 안회 봉양에 자신의 부모의 묘 즉, 안휘봉양황릉을 만들 때, 넓다란 능원을 만들었다. 규정에 따라 적지 않은 백성의 묘는 이장해야 했다. 주원장은 보고를 듣고는 "이들 묘는 우리 집안과 과거에 이웃들이다. 이장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당시 청명제때 성묘를 할 때면, 현재 백성들이 마음대로 황릉을 들어갈 수 있었다.

 

주원장이 마음이 좋아서 이렇게 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주로는 그의 사사로운 욕심때문이다. 이웃들의 묘를 이장하지 않은 것은, 그의 모친으로 하여금 지하에서도 같이 지낼 사람이 있게 해준 것이다. 혼자서 쓸쓸히 있지 않아도 되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손권묘를 훼손하지 않은 것에는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이는 풍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손권이 사내대장부이기 때문에 그를 '문지기'로 모신 것은 아니다.

 

풍수적으로 보아서 제왕릉은 모두 풍수상 명당이다. 뒤에는 조산(祖山)이 있고, 앞에는 안산(案山), 조산(朝山)이 있다. 가까운 곳이 안산이고 먼 곳이 조산이다. 손권묘가 소재한 매화산은 바로 효릉의 풍수상 '안산'에 해당한다. 만일 주원장이 손권묘를 파버린다면, 그것은 안산의 풍수를 해하는 것이다. 미신을 믿은 주원장은 이런 일을 꺼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효릉의 신도는 손권묘에서 한바퀴를 돌아간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전체 능구역은 북두칠성의 모양과 비슷하고, 손권의 묘는 바로 그 북두칠성의 바가지(杓頭)안에 있다. 그리고 표두를 통제하는 자루(柄子)는 주원장의 지궁이다.

 

이를 보면 주원장이 손권묘를 남겨둔 의도는 손권으로 하여금 문지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손권으로 하여금 그의 풍수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분명히 주원장 본인이 아닐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위로는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통달한 풍수대가 유기(劉基)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