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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朱元璋)은 왜 탐관오리를 뿌리뽑지 못했을까?

by 중은우시 2009. 5. 29.

글: 유앙(劉仰)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시피, 1, 2, 3, 4, 5, 6, 7, 8, 9,10을 한자로는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이라고 쓴다. 약간 회계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재무제도에서 숫자는 아라비아숫자로도 표시하지만, 동시에 한자로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때 사용하는 한자는 一, 二, 三...과 같이 보통 쓰는 한자가 아니다.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과 같은 한자이다. 전문적인 재무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글자를 잘못 써서 다시 써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불평하기도 한다: "누가 이렇게 복잡한 한자를 생각해 냈을까? 귀찮아 죽겠군." 역사상 처음으로 재무제도에서 "一, 二, 三..."을 "壹, 貳, 參..."으로 쓰게 한 사람은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것은 부패방지를 위한 조치였다. 특히 회계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주원장으로부터 오늘날까지, 60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주원장이 정한 규정은 재무제도에서 여전히 엄격히 준수되고 있다. 약간 다른 점이라면, 주원장이 규정할 때 "百, 千"은 "陌, 阡"이었는데, 현재는 사람들이 "佰, 仟"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원장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부패를 방지하고자 했었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몰아내기 위하여 취한 수단과 강도는 사상유례없는 것이었다. 재무제도는 그중에서 아주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중에서 개국공신들을 죽인 점에 대하여는 후세에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다. 주원장이 공신을 죽인 원인에 대하여 이전에 유방이 공신을 죽였다는 내용을 언급할 때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평민출신 황제이다. 여기에서는 주원자이 공신을 죽인 점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단지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죽인 점만 논하기로 하자. 주원장이 얼마나 많은 탐관오리를 죽였는가? 구체적인 숫자를 정확히 밝히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은 주원장이 6만명의 탐관오리를 죽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주원장이 손에 부패문제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10만 내지 15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에서 연좌되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명나라의 관료백성비율은 오늘날보다 낮았다. 6만명의 탐관오리를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비율상으로는 아주 높은 것이다. 그리고,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죽인 수단도 아주 혹독했다. <<대명률>>에는 5가지 형벌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편형(鞭, 채찍), 장형(杖刑, 곤장), 감금(監禁), 유방(流放, 유배), 처사(處死, 사형). 주원장은 발견했다. 이들 수단만으로는 탐관오리를 겁주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그래서 특별히 탐관오리에 대하여는 더 많은 혹형들을 제정했다. 예를 들면, 능지(凌遲), 효수(梟首), 주족(誅族)등이 있고, 여기에 다시 개수탕(開水), 철쇄(鐵刷), 추장(推腸, 내장꺼내기), 얼굴에 글자써넣기, 코베내기, 궁형, 무릎뼈부수기등이 있고, 박피실초(剝皮實草)도 있다. 소위 "박피실초"라 함은 탐관의 거죽을 벗겨서 그 안에 풀을 채워넣는 것이다. 이것을 그 탐관오리의 후임자의 관청의 자리 옆에 세워두게 하고 옮겨버릴 수 없게 했다. 목적은 후임자가 항상 이를 보고 경계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주원장은 탐관오리들에 대한 혹형을 공개적으로 시행했고, 여러 백성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주원장은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생활하여보았으므로 탐관오리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다. 그는 다른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탐관오리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탐관오리를 그냥 죽이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여러가지 혹형을 썼다. 그 목적은 한편으로는 잠재적으로 탐관오리가 될 수 있는 관료들을 겁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화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들에게 행한 혹독한 수단은 후임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능지라는 형은 명나라이전에는 1000도(刀), 즉 칼질을 1000번이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명나라때에 탐관오리에 대한 능지는 기본적으로 1000도를 넘어섰다. 가장 많은 경우는 3000도를 넘었다. 말그대로 천도만과(千刀萬)였다. 능지를 하는데 며칠간 지속되었다. 첫날은 능지를 받는 탐관이 죽지 않은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대제왕들이 잔혹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왕왕 명나라대의 능지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능지의 대상에 대하여는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대다수는 죄악이 컸던 탐관오리였다. 이들은 중국고대사회가 잔혹한 사회였다고 묘사하기 위하여 능지의 과정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여, 능지형을 당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들도록 하거나, 혹은 그 탐관오리들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는지는 잊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주원장이 이렇게 탐관오리들에게 혹형을 가한 효과는 어떠했을까? 아쉽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 자신도 아주 기괴하게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였는데, 저녁에 어떤 자는 또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도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가? 주원장은 그저 혹형으로 탐관오리와 부정부패현상을 처리하려고 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처리한 태도와 수단은 중국역사상 공전절후라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째, 왜 여러가지 혹독한 공개처벌을 당하면서도 탐관오리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둘째,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왕조가 처음 건립될 때에는 관리들이 비교적 청렴하고 조정의 아래위의 기풍이 건전한 편인데, 왜 명나라는 중국역사상 다른 왕조들과 달리, 개국초기부터 이렇게 많은 탐관오리들이 나타나쓸까? 이러한 현상은 다른 왕조의 개국초기에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상의 두 가지 문제를 해석하면서, 일반적으로 낡아빠진 이론을 들이댄다. 예를 들면, 한 서방인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그러나, 이 주장은 주원장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주원장의 통치하에 절대권력을 가진 자는 그 혼자 뿐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아주 근검절약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릴 때의 경력에서 출발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아주 잘 헤아려 주었다. 그러므로, 독재로 부패하였다는 것은 주원장에게 적합한 해석은 아니다. 만일 주원장이 부정부패를 처리하면서 법률제도를 만들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주원장은 부정부패에 대한 법률을 아주 명확히 규정했다. 그리고 주원장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률을 거의 모든 백성들에게 교육보급시켰다. 관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도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읽어서 외우고 있었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한 회계제도도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중 하나이다. 만일 주원장이 감독매커니즘을 두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이다. 주원장의 중앙정부에는 전문적으로 감독기능을 행하는 기구가 있었고 일백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고관에서부터 왕공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감독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임의로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주원장의 금의위(錦衣衛)가 특무기관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러면서, 금의위의 직능중 하나가 바로 탐관오리를 고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만일 주원장이 그저 고압적인 정책만 썼다고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청렴한 청백리에 대하여 주원장은 자주 파격적으로 상을 내리고 발탁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해석은 모두 설득력이 없다. 왜 명나라의 초기에 그렇게 탐관오리가 많았고, 계속 죽여도 연이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주원장이 탐관오리현상을 소탕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현대의 어떤 사람은 그저 한가지밖에 내놓지 못한다. 주원장은 민주제도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주원장은 현대서방의 민주제도를 택하지 않았다. 다만, 이걸 가지고 주원장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서방의 민주제도라는 것도 주원장이 죽은 후 500년이 지나서야 나타났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백성들에게 탐관오리를 고발하도록 장려했다. 만일 백성이 어떤 관리의 부정부패행위를 발견하면, 스스로 탐관을 붙잡아 경성으로 보내어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연도에 누군가 이를 저지하면, 저지한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심지어 구족이 주살될 수도 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많이 죽이다보니 어떤 지방관청에는 일처리할 관리가 없게 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주원장은 할수없이 "대죄(戴罪)"제도를 실시한다. 즉, 이미 유죄를 판결받은 탐관오리는 감옥에 가둬두지만, 일단 관청에서 일처리를 해야할 것이 있으면, 대죄관리는 칼과 족쇄 수갑을 찬 상태로 관아로 끌려나와서 대당(大堂)에서 업무를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원장이 아주 잔혹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때는 동시에 이런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명나라초기에 탐관오리는 정말로 많았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미워한 것은 부패를 제거하기 위하여 필요했기 때문이고, 부득불 엄격하고 혹독한 수단을 썼다. 그러나, 명나라의 개국초기에 왜 그렇게 많은 탐관오리가 있었는지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한가지 중요한 원인은 도덕수양이 결핍된 것이라고 본다. 당송이후로 주국인의 도덕교육은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위주로하 서당교육이었다. 이것은 도덕교육과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유가경전을 기초로 전국적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ㅡㄴ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이전에 약 100년에 걸친 원나라에서는 이러한 도덕을 주시하는 유가전통이 철저히 파괴된다. 원나라는 초기에 과거제도를 두지 않았다. 비록 후기에 과거를 실행하기는 하지만, 원ㄴ라의 전기에 과거를 폐지하였으므로, 과거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적었다. 그리고, 원나라는 한족을 차별대우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한족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의 수가 아주 적었다. 한족사회는 "사서오경"등 유가경전을 읽는데 기울이는 관심도가 아주 저하된다. 관한경과 같이 재능이 있는 인물들도 그저 극본이나 쓰게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원나라의 근 100년에 걸친 역사로 한족들의 사회도덕수준은 심각하게 퇴보하였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한족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지만, 주원장은 도덕수양에서 합격점을 받는 관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역사상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한 왕조의 개국초기에 부정부패현상이 만연하여, 법률도 소용이 없고, 제도도 소용이 없고, 민주도 소용이 없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익만 쫓는 소인무리들이 각급 권력을 장악하면서 하나하나 리스크를 안고 죽음을 무릅쓰고 부정부패를 벌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주원장이 대거 사람을 죽이고,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특무제도를 사용하는 등등의 수단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다만,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소인배들은 죽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부패현상을 처리하면서 우리는 도덕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덕은 반드시 법률, 제도등 기타 수단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도덕은 확실히 부정부패를 소멸시킬 수 없지만, 확실히 부정부패를 줄일 수는 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대거 살해하였지만, 그래도 부정부패를 없애지 못했다. 이는 도덕이 결핍되어 있고, 타락해 있으면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저 제도, 감독, 민주등 외부수단에만 의지하여서는 무수한 소인배들의 마음 속에서 용틀임하는 부패의 욕망, 충동과 행동을 억지할 수 없다. 도덕이 발현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심에서 자제하고 자각하게 할 수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법률은 범죄를 처벌할 뿐이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겨나는 범죄의 생각까지 저지할 수는 없다고. 명나라개국초기를 보면 이것은 확실히 맞아떨어진다. 각도를 바꾸어 말하자면, 원나라는 근 100년간 과거를 경시하고,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써서 도덕수준이 하락하였고, 주원장은 그 악영향을 그대로 짊어졌다. 명나라의 개국고인들중 대부분은 평민출신의 무장이고 문신은 얼마되지 않았다. 유기(劉基)와 같은 인물이 그들인데, 대부분 계모(計謀)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고, 후세인들이 자주 신선과 같은 도가인물로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얘기하자면, 명나라초기는 다른 왕조초기와는 달리 위대한 유학자가 없었다.

 

오늘날의 중국에 있어서, 명나라개국초기의 탐관오리범람현상은 그 교훈을 깊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당연히 현재 중국현실에서 도덕교육을 강화하는데, 단순히 "사서오경", 과거제도같은 방법에 의지할 수는 없다. 현대에 적합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다만, 주원장이 관리를 계속 죽여도 뿌리뽑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세인들은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내심의 도덕적인 자율에 근거하지 않고, 그저 외부적인 제약으로만 처리하려고 해서는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의 계속되는 부패를 뿌리뽑을 수 없다. 도덕건설을 경시하여서는 부패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도덕은 소수인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원칙이다. 광범위한 도덕적요구는 한편으로 사람들을 자율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여론의 감독을 강화한다. 이를 통하여 진정으로 유익한 민주가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법률, 규정, 규율, 제도등등이 추가되어야 비로소 부패는 억제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