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예방육(倪方六)
주원장(朱元璋)의 사망시간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홍무31년(1398년) 윤5월 초9일이라는 설이고, 둘째는 윤5월 초5일, 셋째는 윤5월 17일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왜 중요한 개국황제의 사망에 대하여 이렇게 여러가지의 견해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표면적인 이유는 사서상의 기재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사. 혜제기>>에는 "공민혜황제 휘 윤문은 태조의 손자요 의문태자의 첫째아들이다. 31년 윤5월 태조께서 붕어하셨다"라고 하여, 그저 명나라 주원장이 윤5월에 죽었다고만 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날짜인지를 기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장례시간은 아주 구체적이다. "(주윤문)은 신묘일에 황제위에 즉위했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다음 해를 건문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그 날, 고황제를 효릉에 장례지내고, 3년상의 조칙을 내렸다" "신묘일"은 지금 확정이 가능하다. 바로 홍무31년 윤5월 16일이다.
이로써 추산해보면, 주원장의 장례는 그의 사후 7일째일 것이므로, 그가 사망한 시간은 그 해 윤5월 초9일이 된다. 주원장이 도대체 언제 죽었는지는 당연히 명확해야 하는데, 왜 사서에는 이렇게 모호하게 적고 있을까? 이것은 주윤문이 주원장을 매장한 시간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급히 처리했고, 이치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이목을 감추려고 고의로 시비를 혼동시킨 점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명황대정기>>등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당당한 개국황제가 죽은 후 며칠만에 바로 매장해버리면, 그렇게 많은 외지에 분봉받은 황자들은 돌아와서 장례에 참가할 시간도 없지 않은가? 이런 것이 정상적인가? 그래서, 연왕 주체는 조카가 주원장을 급히 매장했다는 말을 듣고는 아주 화를 냈던 것이다. 연왕 주체는 부친의 장례에 참가하겠다는 것을 명분삼았는데, 이것이 나준에 황제위를 찬위하는데 이유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매장시간상 제대로 말하기 힘든 점이 있다. 주윤문이 도대체 어느 날 조부를 매장하였는지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명사. 본기>>에는 "5월 신묘에 효릉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지만, <<통기>> 및 <<건문조야류편>>에는 모두 "6월 갑진"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날을 윤5월 29일이 된다. 또 다른 설은 사후 7일만에 장례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7개월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건학은 <<독례통고>>에서 "건학이 이 사안을 잘 살펴보니, 명나라의 모든 자료에는 태조가 사망후 7일만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유일하게 오박의 <<용비기략>>에는 7월이 지나서 장례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윤문이 아주 예절을 중시하는 황제였기 때문에, 조부를 그렇게 빨리 장사지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때문이다.
현재의 사학자들은 대다수가, 주윤문이 확실히 '주원장을 속히 장사지냈다"는데 일치한다. 그렇다면, 주윤문은 왜 이런 금기를 어기는 일을 했을까?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주원장이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즉위하면서 장례지내고, 같은 날에 처리했는데, 모두 고황제의 유명이었다." 그러나, 비사에는 주윤문은 실제로 즉위하기 하루전인 윤5월 15일에 주원장을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자기의 사후에 난리가 벌이질 것을 두려워하여 유언으로 주윤문에게 속히 장례절차를 처리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윤문은 '유명'을 받드는 것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즉위하는 것이 급했을까> <<황명대정기>>에 의하면, "장사를 지내면서 여전히 황태손이라고 칭한다면, 황제의 장례를 지내면서 후계자인 황제가 제사를 주재하지 않을 리가 있느냐"고 한다. 이곳의 설명은 분명하고 이치에 맞는다. 주원장이 막 죽을 때 그의 장례를 주재하는 주윤문의 신분이 황태손이라면 이것은 예절에 맞지 않는다. 황제가 죽으면 바로 신황제가 즉위하여야 한다. 나라에는 하루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된다.
날씨의 각도에서 고려하더라도, 주원장을 빨리 매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남경은 예로부터 "화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고, 윤5월이면, 이미 여름이어서 매우 덥다. 빨리 매장하지 않으면 악취가 날 것이다.
주원장이 도대체 언제 죽고, 언제 매장되었는지, 매장전에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하여 관련 사료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주윤문은 주원장이 눈을 감자마자 즉위할 것을 생각했는데, 이것은 모두 주체가 남경으로 찾아와서 일을 일으키지 못하고, 자신의 황제즉위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을 급히 매장하고 급히 황제위에 올랐으며 여러 왕에게 유조를 보내어, 남경으로 조문하러 올 수 없도록 하였다.
남경의 민간에는 주원장의 장례와 관련된 여러가지 전설이 떠돈다. 주원장의 장례식에 "미혼진"이 출현했다. 즉, 남경의 13개 성문으로 동시에 장사행렬이 나갔다. 이 설에 대하여는 사서에도 기재가 있다. 주국정의 <<황명대정기>>에는 주원장이 장사날에 "이발인, 각문하장(而發引, 各門下葬)"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떤 모양인가? 민간에서 돈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도굴을 방지하며, 선조의 매장지점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황제가 이렇게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원나라때는 황제가 능도 쓰지 않았으므로, 이런 '미혼진'을 쓰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주원장은 자기가 죽은 후에 묻힐 곳을 미리 잘 선정해두었고, 자금산의 남쪽의 좋은 땅을 잡아두었는데, 그가 그곳에 묻힐 것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미혼진'의 수법을 쓸 필요가 있었는가?
원래, 장례후 얼마되지 않아 바로 소문이 하나 나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효릉에 묻힌 것이 아니며, 홀로 조천궁(朝天宮)에 묻혔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남경 왕부대가 남쪽 천미터 지점의 오른쪽편에 있는 조천궁이다. 구체적인 지점은 "세상에 전하기를 삼청전 아래가 바로 주원장이 진짜 매장된 곳이다" 이전 사람들의 글에서도 이런 기재를 찾아볼 수 있다. 청나라때 절동학파의 대표인물인 전조망의 <<종조천궁알효릉>>에서 명효릉은 주원장의 의관총(衣冠塚)이고, 주원장이 진정으로 쉬고 있는 곳은 조천궁이라고 쓰고 있다.
민간에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당시 효릉에는 저녁만 되면 부인의 곡성이 들렸는데, 원래 이것은 마황후의 곡성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법사를 벌여서 곡성이 멈추게 되었다. 마황후는 왜 울었는가? 바로 홀로서 분묘를 지키게 되니 슬퍼서 그랬다는 것이다.
조천궁은 송나라때는 천경관(天慶觀)이었고, 원나라때는 원묘관(元妙觀), 영수궁(寧壽宮)이었다. 주원장이 남경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 조천궁으로 개칭했다. 당시 백관들이 황제를 만날 때의 예를 연습하던 곳이 이곳이었다. 조천궁에 묻혔다는 견해는 바로 주윤문이 주원장을 급히 묻고, 미혼진을 펼치고, 13성문으로 동시에 장사행렬을 내보내었다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조천궁은 성내에 있으므로, 급히 장사지내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 만일 명효릉내에 장사지낸다면 이런 일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나라때의 문인 감희는 그의 저작인 <<백하쇄언>>에서 주원장이 수백만의 은자를 들여, 십여년간 명효릉을 만들었는데, 설마 마황후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주윤문은 아주 효도를 중시하던 황제인데, 어찌 주원장을 능외의 장소에 묻을 수 있겠는가?
나중에 나온 또 하나의 소문은 주원장은 명효릉에 묻히지도 않았고, 조천궁에 묻히지도 않았으며, 남경성을 떠나 북경의 만세산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북경에 묻혔다면, 연왕 주체가 주장한 찬위의 첫번째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원장이 명효릉이 묻혀 있을까에 대하여 현재 어느 학자도 "확실"하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효릉박물관에서 일하는 요금한 선생은 명효릉에 대하여 문화유적신청을 하기 전에, 중산릉관리국은 남경대학등 관련 기술, 사학전문가를 조직하여 수년간 과학저긍로 탐사하였는데, 명효릉은 도굴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전문가들도 1998년부터, 강소성 지진국 지진공정연구원의 전문가들이 무덤내에서 GPM기술을 사용하여, 이미 면적이 수천평방미터에 이르는 건축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 공간에 이르는 길이 100미터의 통로의 방향과 입구도 알아냈다. 이 건축공간이 바로 명효릉의 지궁이고, 지궁의 입구는 바로 명루 동쪽 십여미터지점에 내려앉은 곳이며, 갈라진 틈이 있는 성벽의 아래라고 한다.
그러나, 주원장의 시신이 지궁내에 있는지의 진상은 명효릉을 발굴하는 날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황릉의 발굴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아무 먼 훗날이 되어야 주원장이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동안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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