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당시

두목(杜牧)의 행화촌(杏花村)은 어디를 가르키는가?

중은우시 2007. 8. 17. 17:50

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

노상행인욕단혼(路上行人欲斷魂)

차문주가하처유(借問酒家何處有)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청명에 비는 흩날리고

길가는 행인은 슬픔에 혼이 끊어지는 것같네.

묻노니 술집은 어디에 있는가?

목동이 멀리 행화꽃 핀 마을을 가르키네.

 

두목(杜牧)의 유명한 <<청명(淸明)>>이라는 시이다. 이 시가 유명하다보니 다시 무수한 행화촌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중국에는 두목의 시와 관련있다고 주장하는 행화촌이 모두 19개나 된다고 한다. 행화꽃이 핀 곳이라면, 바로 행화촌이 되는 것같다.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 주장은 세 가지이다.

 

첫째, 산서행화촌(山西杏花村). 산서의 분주(汾酒)는 예로부터 유명하고, 분주의 고향이 바로 행화촌이다.

둘째, 지주행화촌(池州杏花村). 두목이 이 곳에서 일찌기 자사(刺史)를 지냈기 때문에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셋째, 마성행화촌(麻城杏花村). 현재의 마성 서남쪽, 신주북쪽의 기정(岐亭)을 가리킨다. 이 곳도 두목이 황주자사를 지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남경(南京)에 행화촌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행화촌이 남경에 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첫째, 송나라때 시인인 양만리가 금릉의 서봉황대를 와서 논 후에 쓴 시에 "봉황은 보이지 않고 행화촌만 옛날 그대로 남아 있구나"라는 말이 있다. 이외에 <<경정건강지>>라는 책에서도 남경 "행화촌"이라는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원곡(元曲)에서는 "어제는 석두성(石頭城, 남경성의 별명)을 잃더니, 오늘은 오의항(烏衣巷, 남경의 길거리)을 잃었네, 내일은 다시 행화촌(杏花村)을 잃겠구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외에 청나라때는 "행화고주(杏花沽酒, 행화촌에서 술을 파는 것)"이 금릉48경중의 하나로 들어가 있다.

 

북송초기에 편찬한 <<태평환우기>>의 승주(남경) 강녕이라는 조에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행화촌은 현성의 서쪽에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두목이 술을 사서 마신 곳이다" 이 문헌에서는 분명하게 행화촌이 금릉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청나라 가경연간에 진문술이 편찬한 <<금릉역대명승지>>에서도 "행화촌은 두목이 술을 사 마신 곳이다. 두목의 시에는 '남조사백팔십사', '야박진회근주가'가 있는데 모두 금릉에서 일어난 일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하나의 시를 덧붙여 두었는데, 그 곳에 "일자번천제구후, 지금인설행화촌(一自樊川題句後, 至今人說杏花村, 번천이 싯구를 지은 이후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행화촌을 얘기한다)". 번천은 두목의 호이다.

 

이외에 이어(李漁)는 <<입옹대운>>에서 행화촌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행화촌은 금릉에 있다"라고 적었다. 명나라 만력년간에 새로 쓴 <<강녕현지>>에서는 "행화촌은...봉황대 가까이 있고, 마을안의 사람들은 행화나무를 많이 심어서 숲을 이루었. 봄이 오면 꽃이 피는데 푸른 깃발에 붉은 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리고 명나라 초굉의 <<중건봉유사비기>>, 청나라 진작림의 <<봉록소기>>, 중화민국 <<수도기>>등의 문헌에서도 모두 남경 행화촌이 두목이 술을 사마신 곳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료들에 의하면 행화촌이 남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다. 그렇다면, 두목과 남경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두목이 남경을 놀러온 것은 기록상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이 당문종 대화7년(833년) 봄과 당선종 대중2년(848년) 가을이다. 833년은 두목이 선주에서 양주로 부임해 가는 길에 강녕(남경)을 들른 것이고, 행화촌에서 술을 사먹고 취했으며, 여러 수의 명작을 남겼다. 여기에는 <<박진회>> <<강남춘>>등이 포함된다. <<청명>>도 <<박진회>>, <<강남춘>>등의 시와 뜻이 일맥상통하고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청명>>도 이 때 지은 것이라고 추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화촌은 남경의 어디에 있었을까? 대체로 행화촌은 남경성의 서남쪽에 있는 진회하변에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집경문 부근이다. 지금 이곳은 사람이 붐비는 거주지구로 되어 있어서, 당시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