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당시

행화촌(杏花村)은 어디에 있는가?

중은우시 2009. 4. 15. 19:53

글: 문재봉(文裁縫)

 

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

노상행인욕단혼(路上行人欲斷魂)

차문주가하처유(借問酒家何處有)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때는 청명이라 봄비가 흩날리는데,

(가족과 떨어진) 나그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같다

(외로움을 잊기위해) 술집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목동이 저멀리 살구꽃 핀 마을(행화촌)을 가리키더라

 

당나라때의 시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라는 시는 후세에 전해지는 천고의 절창이면서 동시에 "행화촌"을 온천하에 이름날리게 하였다. 이 시는 술문화에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행화촌"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논쟁을 불러왔다. 알려지기로는 전국에 10여곳의 행화촌이 있는데, 강소, 안휘, 호북, 산서등 8개 성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안휘만 하더라도, 역사상 4곳의 행화촌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곳이 두목의 <<청명>>에서 읊은 그 행화촌일까?

 

산서 분양(汾陽)에 위치한 행화촌은 남북조이래로 좋은 술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기에서 생산된 분주(汾酒)는 예로부터 "감천가양(甘泉佳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당나라때가 되어서, 마을안에는 이미 72곳의 술집이 생겨났고, 시인은 "처처가두게취렴(處處街頭揭翠簾, 곳곳에 술집깃발이 걸려 있다)"고 읊었다.

 

산서는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어떤 사람은 "청명시절우분분"에서 묘사한 곳은 강남의 봄풍경이지 산서라른 위치에 대하여는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다만, 당나라때 산서의 봄날은 확실히 봄비가 흩날렸고, 빗물이 충분했다고 한다. 사실, 당나라시에서 산서와 북방의 봄날을 묘사한 싯구는 아주 많은데, 당나라때의 저명한 재녀인 어현기(魚玄機)의 <<기유상서>>라는 시에서는: 분천삼월우(汾川三月雨) 진수백화춘(晋水百花春)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서 분수, 진수는 모두 산서의 강물이름이다. 요합(姚合)의 시에는 "진야우초족, 분하파역청(晋野雨初足, 汾河波亦淸)"이라고 적고 있다.

 

산서의 분양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되는 점이라면, 현재까지 그 어느 누구도 두목이 산서로 갔고, 분양을 지나갔다는 문헌기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번천문집. 별집>>에서 유명한 <<병주도중>>이라는 시가 있는데, 병주(幷州)는 바로 태원(太原)의 옛이름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두목이 임분(臨汾)을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그가 산서에 갔었다고 보기는 부족하다. 두목의 <<번천문집>> 20권은 두목이 생전에 생질인 배연한에게 부탁하여 편찬한 것이고, 서문을 썼으니 믿을만하다. 소위 두목의 <<별집>>이라는 것은 북송때 전기가 모은 것이다. 그런데, 선택에서 엄격하지 아니하여, 이백, 장적, 조가, 이상은등의 작품도 섞여 들어가 있다. 심지어 무명씨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고, 다른 사람이 두목에게 준 시도 들어 있으니 신뢰도가 아주 떨어진다. 두목연보, <<두목전>>을 편찬한 바 있는 무월(繆越)교수에 따르면, 두목의 평생 사적과 매년 행적을 고증해보고는 두목이 병주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당나라말기와 북송때 편찬된 각종 문헌 및 <<산서통지>>, <<분주부지>>, <<분양현지>>등에서도 두목이 지금의 산서성 경내로 들어왔었다는 여하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금방 새로운 시를 들이밀며 두목이 병주, 분양을 지나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과전가댁>>을 보면, "안읍남문외(安邑南門外), 수가판축고(誰家板築高), 봉성원리지(奉城園裏地), 장결견봉호(墻缺見蓬蒿)"라는 시가 있는데 여기서 안읍은 당나라때 태원으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당나라때 태원으로 북상하는 노선은 포주(지금의 영제), 진주(임분), 분주(분양), 병주(진원), 안읍(운성북쪽)의 바로 포진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목이 만년에 남방에서 관리를 지낼 때 쓴 시중에는 <<우언>>이라는 시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이런 시가 있다:

 

난풍지일유초함(暖風遲日柳初含)

고영간신우자참(顧影看身又自)

하사명조독추창(何事明朝獨惆悵)

행화시절재강남(杏花時節在江南)

 

바람은 따스해지고 날을 길어지면서 버들개지에 싹이 돋는다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니 부끄러울 뿐이다

내일아침에는 무슨 일로 혼자서 슬퍼할 것인가

살구꽃피는 계절에 강남에서

 

이 시를 맑은 봄날 아침에, 강남의 봄풍경을 바라보면서, 관청의 숙사에 머물고 있는 시인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고, 뭔가를 잃은 것같다. 그 이유는 바로 북방에서 살구꽃이 피는 계절에 자신은 강남에 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안휘(安徽)의 귀지(貴地)가 행화촌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는데, 문헌이나 고서적에서 방증이 많다. <<강남통지>>(1829년), 명나라 가정24년(1545년)과 청나라 건륭43년(1778년)의 두 부 <<지주부지>> 및 청나라 도광연간, 광서연간의 2부의 <<귀지현지>>, 그리고 청나라 강희24년(1685년)에 만든 <<행화촌지>>, 민국4년(1915년)의 <<행화촌속지>>에서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이기는 하지만, 두목의 <<청명>>에 나오는 행화촌은 바로 안휘 귀주의 서쪽근교에 있는 행화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중 청나라 도광연간의 <<귀지현지>>는 각종 서적에서 지주가 행화촌이라는 기술을 종합하여 적고 있다: "행화촌부지: 수산문의 바깥 1리쯤 떨어진 곳에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황공청천'이라고 4글자가 새겨져 있다. 명나라 천계연간에 고원경이 만든 '행화정'도 이 곳에 있다. 마을 사람 랑수는 <<행화촌지>>를 지었다."

"<<강남통지>>: 당나라 두목의 시에 '목동요지행화촌'이라는 구로 이름을 얻다."

"<<남기지>>: 옛날 우물이 앴는데 석권(石圈)에 '황공광윤옥천'이라는 6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 <<귀지현지>>에는 청나라 강희연간 지주동지 <<주강축행화정비기>>, <<우모행화촌종행수격>>과 장소의 <<행화촌기>>를 싣고 있다. 상술안 세 책에서는 각각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목의 청명시이래로 마을은 행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자를 지어서 사람들이 놀 수 있도록 했다"

"행화촌은 두공이 싯구를 남긴 애리로 천고의 유명한 곳이 되어 버렸다. 그 이름을 듣고 와서 노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화촌은 당나라 두사훈이 지주자사로 있을 때, 목동요지행화촌이라는 싯구로 이름을 얻었다."

 

<<행화촌지>>의 편저자인 낭수(郞遂)는 원래 귀지 행화촌 사람이다. 강희때 태학에 입학했는데, 박학하고 다재다능했다. 강희 갑인13년(1674년)부터 <<행화촌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11년이 걸려 강희 을축24년(1685년)에 완성한다. 본문외에 총도면(행화촌경도), 분도(12경도)와 두목행추도 합계 14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행화촌지>>는 <<사고전서>> 총편찬관이자 대학사인 기효람등이 심의한 후 <<제요>>를 쓴다. "행화촌지 12권. 절강순무가 바친 책임. 국조(청나라)의 낭수가 편찬함. 낭수의 자는 조객, 호는 서초자로 지주 사람임. 두목이 지양수로 있을 때, 청명일에 놀러나가서 시를 지었는데, '차문주가하처유, 목동요지행화촌'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릇 풍경을 가르키는 말은 버드나무 갈대숲과 같다. 반드시 하나의 마을을 실제로 가리키게 되면 살아있는 싯구는 오히려 빛을 잃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풍속은 많은 경우 고적을 부회하여 장식하고자 하는 기풍이 있다...."

 

중국의 지(誌), 원(苑)중에서 자고이래로 "통지" "부지" "현지" 산지"가 있는데, "촌지"는 쓰고 또 그것이 <<사고전서>>에 들어간 것은 귀주 <<행화촌지>>가 유일하다. 이를 보면, 행화촌지의 권위와 진실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시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청명시절우분분"은 강남의 풍경이다. 귀지의 날씨와 맞아떨어진다. 귀지는 강남에 있고, 산과 물을 마주하고 있다. 기후는 온화하며, 사계절이 분명하다. 아열대계절풍기후이다. 명나라 가정때의 <<지주부지>>에 따르면, 귀지는 봄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새로 편찬한 <<지주지구지>>의 '기후'를 보면, "전지역에 봄에는 3월 15일부터 시작하여, 개략 70일이다. 이 기간동안 남북 냉온기류가 서로 빈번히 만나서, 자주 저온에 비가 오는 날씨가 지속된다. 봄의 날씨는 변화가 많고 비가 많이 온다. 4월의 평균강수량은 175.83밀리미터(최고로 많이 내린 해의 강수량은 366밀리미터)이다. 평균기온은 15.7도이고, 수목, 화초와 농작물의 생장에 적합하다. 두목의 <<청명>>과 <<우언>>의 시에서 쓴 '청명시절우분분'은 귀지지역의 청명때 기후특징과 일치한다.

 

그리고 역사상 두목은 확실히 지주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무종 회창4년 우이당쟁(牛李黨爭)이 격렬해지면서, 두목도 거기에 연루된다. 황주에서 지주자사로 좌천되어 관운이 좋지 못했다. 두목은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인 두우(杜佑)는 고관이면서 학자였고, 3명의 황제아래에서 재상을 지냈고, 저술이 풍부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두목은 분명히 정치적인 이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계속 배척을 받아 관운은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술로서 우울함을 풀었던 것이다.

 

곽말약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명인의 유적지는 후세인들이 왕왕 아무렇게나 덧붙인 경우가 많다" 각지역에서 행화촌을 놓고 벌이는 논쟁은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아무도 상대방을 철저히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어떤 학자는 행화촌이라는 것이 특정지명이 아니라 그냥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고 하기도 한다.

 

이 설에 따르면, 고대시인들이 시를 지을 때, 마을이름이나 산이름과 같은 지명은 시제나 서문에서 실제이름을 쓰고, 싯구에서 실제이름을 쓰는 것은 드물다고 한다. 왕왕 경치나 특징을 가지고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믄 것이다. 두목의 시에서 '목동'이 가리키는 '행화촌'이라는 것은 진짜 마을이름이 아니고, 어느 술집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목동은 살구꽃이 활짝핀 마을을 가리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행화촌이 실제지명이건 아니건, 어느 곳을 가리키건, 아무도 확실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청명>>이라는 시가 우리에게 남겨준 맛은 계속 기억될 것이다. 행화촌이 어찌 되었건간에, 우리는 여전히 살구꽃아래의 술집을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와중에 보일듯 말듯한 광경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