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당시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

중은우시 2009. 4. 7. 12:05

글: 정계진(丁啓陣)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봄잠에 노곤하여 날새는 줄 몰랐는데

곳곳에서 들려오는 새우는 소리

밤사이 비바람이 치던데

꽃은 또 얼마나 졌을까?

 

맹호연은 시인중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이 오언절구는 시가중의 시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천고에 전해지는 저명한 시가는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작자는 아주 독특한 시각을 골랐다. 바로 아침에 잠이 막 깨는 시점이다. 사람은 방안에 있고, 청각, 상상을 통하여 방밖의 세계는 새가 우짖고 꽃향기가 풍기는 봄날이며, 봄냄새가 물씬 풍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햇볕만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날은 아니다. 비바람도 있다. 마치 소동파가 서호(西湖)를 읊을 때 했던 말처럼, "청방호, 우역기(晴方好, 雨亦奇, 맑으면 좋고, 비가와도 그 나름대로 풍취가 있고..)"의 경지이다. 시인이 봄날을 좋아하는 느낌이 그대로 우러나 있다. 다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봄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과 짝을 이루고 이다. 사랑이 지극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맹호연의 시가이다. 온자(蘊藉), 담원(淡遠), 청일(淸逸)하며 전원풍취가 넘친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송나라때 양만리(楊萬里)의 <<한거초하오수기>>와 섭소옹(葉紹翁)의 <<유원불치>>는 각자 <<춘효>>의 일부 정취와 수법을 승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자유산연치아(梅子流酸軟齒牙)

파초분록여창사(芭蕉分綠與窓紗)

일장수기무정사(日長睡起無情思)

한간아동착유화(閑看兒童捉柳花)

 

매실을 깨물어 먹으니 신즙이 이빨 사이에 남고

파초의 잎은 녹색이어서 커튼과 잘 어울린다.

봄은 가고 여름이 오니 낮은 길어지는데, 낮잠에서 일어나서 아무 생각없이

한가로이 아이들이 버드나무에서 떨어지는 버들솜을 잡으며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 양만리, <<한거초하오수기>>

 

응련이치인창태(應憐履齒印蒼苔)

소구시비구불개(小柴扉久不開)

춘색만원관부주(春色滿園關不住)

일지홍행출장래(一枝紅杏出墻來)

 

주인은 아마도 나막신으로 바닥의 이끼를 밟는 것을 아쉬워했나보다

작은 사립문은 닫아두고 오랫동안 열어주지를 않네

봄빛이 정원에 가득한데 가둬둘래야 가둬둘수가 없지

살구나무 가지 하나가 담장 밖으로 슬며시 삐져나왔네

- 섭소옹: <<유원불치>>

 

양만리와 섭소송의 시의 뒷쪽 두 구절은 맹호연 <<춘효>>의 뒤 두 구절과 기본적으로 정경이 비슷하다. 그러나, 각자 운치가 있다. 양만리의 "일장수기무정사, 한간아동착유화"에서 쓴 것은 처음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나른 함을 그린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것은 지는 꽃이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이다. 그리하여 동취(童趣)가 넘친다; 섭소송의 "춘색만원관부주, 일지홍행출장래"는 만연한 봄빛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호연처럼 청각을 통하여 안에서 바깥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통하여 바끝에서 안의 정원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춘효>>는 봄날의 찬가이고, 시인의 심정은 유쾌하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 글을 하나 보다 보니, 필자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깊이가 얕은 것이라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이 시는 슬픔과 죽음에 대한 비탄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필자가 유학생들에게 개설한 <<중국고시선독>>이라는 선택과목에서 나의 이런 의견을 얘기하자, 두 외국여학생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시베리아에서 온 러시아 여학생은 나의 의견에 반대했다. 오사카에서 온 일본여학생은 나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녀들의 반대와 찬성은 모두 일시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각자의 민족역사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이다. 러시아의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시가에서 "비바람(風雨)"은 '어두운 세상' '불합리한 제도'와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 '꽃이 진다(落花)'는 것은 이러한 어두운 세상, 불합리한 제도, 나쁜 사름에게 유린당하고 박해당하는 착한 사람 또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소련, 러시아의 역사상 이런 상징은 혁명시인들의 시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여학생은 맹호연의 <<춘효>>는 아름다운 생명이 죽어가는데 대한 비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 여학생은 달랐다. 그녀는 "꽃이 진다"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일본에서는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고, 비애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아름답다고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람등은 아카도 벚꽃에서 인생의 짧고 순간적임을 느낄 것이지만, 그렇다고 비애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주장을 고집했고, 누구도 자기의 의견을 꺽으려 들지 않았다.

 

그녀들이 격렬하게 논쟁하는 것을 보면서, "시에는 확실한 해석이 없다(詩無達)"는 것을 다시 느꼈다.  나는 한편으로 문화적인 의사소통이 어렵다는데 난감해 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이해를 한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야 나의 시야도 넓어질 수 있고, 나의 사고도 넓힐 수 있다. 내가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세번째 눈, 네번째 눈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