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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당시

이백(李白)의 정야사(靜夜思)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05. 8. 9.



 

이백의 정야사는 당시(唐詩)중 가장 유명한 것중의 하나일 것이다.


상전간월광 (床前看月光) 평상 앞에서 달빛을 보니

의시지상상 (疑是地上霜) 마치 땅 위의 서리와 같도다

거두망산월 (擧頭望山月) 고개들어 산위의 달을 쳐다보고

저두사고향 (低頭思故鄕) 고개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당시가 중국에서는 약간은 변모되어 전해지고 있다. 위의 내용은 송나라때의 <<이태백문집>>, 송나라 곽무천이 편집한 <<악부시집>>, 홍매가 편집한 <<만수당인절구>>, 원나라때의 소사빈의 <<분류보주이태백집>>, 명나라의 고목평의
<<당시품회>>는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때 조광등이 만력년간에 간행한 <<당인만수절구>>에는 제3구의 "山月"이 "明月"로 바뀌게 된다.


상전간월광 (床前看月光) 평상 앞에서 달빛을 보니

의시지상상 (疑是地上霜) 마치 땅 위의 서리와 같도다

거두망명월 (擧頭望明月) 고개들어 밝은 달을 쳐다보고

저두사고향 (低頭思故鄕) 고개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이후 청나라 때의 왕사신의 <<당인만수절구선>>과 심덕잠의 <<당시별재>>는 또 약간 바뀌게
되는데, 제1구의 '간월(看月)'을 '명월(明月)'로 바꾸었다.


상전명월광 (床前明月光) 평상 앞의 밝은 달빛은

의시지상상 (疑是地上霜) 마치 땅 위의 서리와 같도다

거두망산월 (擧頭望山月) 고개들어 산위의 달을 쳐다보고

저두사고향 (低頭思故鄕) 고개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그리고, 최후로 청나라 건륭년간에 형당퇴사가 편집한 <<당시삼백수>>안에는 제1구와 제3구가 모두 명월로 바뀌어 수록된다. 이 판본이 현재 중국에서 널리 퍼져있고,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정야사는 아래의 싯구로 외우고 있다.


상전명월광 (床前明月光) 평상 앞의 밝은 달빛은

의시지상상 (疑是地上霜) 마치 땅 위의 서리와 같도다

거두망명월 (擧頭望明月) 고개들어 밝은 달을 쳐다보고

저두사고향 (低頭思故鄕) 고개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여기에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의 정야사와 같은 유명한 당시가 왜 명, 청 시대를 겪으면서 싯구의 글자가 변경되게 되는 걸까? 명나라 이전까지는 아무런 의문없이 동일하게 기재되었던 시가 왜 명, 청 시대를 겪으면서 변모된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의 해석이 존재하는 듯하다.


첫째는 명, 청시대의 고루한 학자들이 시의 의미를 곡해하여 싯구를 고쳤다는 것이다. 즉,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1) 이백이 달을 서서 봤는가? 아니면 앉아서 봤는가? (2) 실내에서 봤는가? 아니면 실외에서 봤는가? (3) 왜 하필 상전(床前)인가? 창전(窓前)도 아니고, 문전(門前)도 아니고...


'상전간월광, 의시지상상'을 해석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침상 앞으로 비치는 달빛은 창문을 통할 수밖에 없는데, 당시의 창문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방안으로 달빛이 비쳐야 그다지 넓게 비치지는 않았을텐데, 땅위가 온통 이슬이다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이백이 당시 시골에 가서 지붕도 없는 집에서 잠을 잤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즉, 지붕이 없으니 방바닥이 온통 달빛이어서 마치 바닥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지붕이 없는 집에서 잤다는 것은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상을 집둘레의 난간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상을 일본의 다다미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거두망산월'이라는 싯구도 약간 모순된다. 달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움직이는데, 당나라시절의 침실의 창은 현재와 비슷하게 대부분 남북방향에 둔다. '산월'이라는 것은 달이 막 산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인데, 시각적인 각도에서 본다면 실내의 침상앞에서 고개를 들더라도 산위에 뜬 달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혹시 몸을 숙이거나 하여 겨우겨우 볼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 달빛이 온 방안에 침상앞에 서리처럼 비친다고 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명월광', '망명월'로 수정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순히 밝은 달빛이 비친다고 하고, 단순히 밝은 달을 본다고만 한다면, 실내의 침상 앞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최근에는 '상(床)'이라는 것은 이백의 시에도 여러번 나오는 호상(胡床)으로 보아야 하고, 호상이라는 것은 접을 수 있는 현대의 의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백의 시에도 호상은 여러번 나오는데, "동쪽벽에는 호상을 걸어뒀네"라는 문구도 있고 "유공은 가을 달을 좋아하여, 흥이 나면 호상에 앉았다"라는 문구도 있다. 이하의 시에도 "단정히 호상에 앉아..."라는 문구가 나오고, 송나라의 소동파도 "한가롭게 호상에 의지하여..."라는 문구를 육유는 "그림다리 남쪽 물가의 호상에 의지하여..."라는 문구도 있다. 그러므로, 이백이 앉아있던 상이라는 것은 호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실외의 정원에서 호상을 놓고 앉아서 그 아래 비치는 달빛을 서리같다고 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산 위의 달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고향을 생각하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상이라는 것이 호상으로 의자에 유사한 것인데, 이를 침상으로 읽은 명,청시대의 고루한 유학자들이 침상으로 해석하였을 경우의 모순점을 의식하여 시의 문구를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의견은 이와는 달리, 명, 청시대의 학자들이 상이 호상 즉, 의자를 의미하는 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쓴 데에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명나라 만력제 때부터 "고개들어 명월을 본다"고 썼는데, "명월(明月)"을 명나라 조정으로 비유하였다는 것이다. 즉, 당시 환관이 득세하고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생각하여 이백의 시의 문구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청나라에 들어와서 "간월"을 "명월"로 바꾸고, "산월"을 "명월"로 바꾼 것은, '반청복명(反淸復明,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명나라를 세운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부터 외우는 당시삼백수에 "평상 앞의 밝은 달빛은 마치 땅 위의 서리와 같도다. 고개들어 밝은 달을 쳐다보고, 고개숙여 고향을 생각하네"라는 것을 집어넣었는데, 명월광(明月光)이
땅바닥의 서리처럼 널리 퍼져있다(疑地霜) 라고 하여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온 나라에 퍼져있다는 것을 비유하고, 고개를 들어 명월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고향(명나라때의 옛시절)을 생각한다고 함으로써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청나라때 명나라를 명월(明月)에 청나라를 청풍(淸風)에 비유한 시를 지었다가 문자옥을 당해 죽임을 당한 경우까지 있었는데, 이백의 정야사는 개사된 내용이 다행이 큰 사단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갔다. 예를 들어, 고염무의 외조카인 서준(徐駿)이 지은 시중에...

 

청풍불식자(淸風不識字)     맑은 바람은 글자도 읽을 줄 모르면서,

하고란번서(何故亂飜書)     어쩐 일로 어지럽게 책장을 넘기는고...

 

이 글의 청풍은 만주인을 비유하여, 만주인이 글을 못읽고 무식하다고 쓴 글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서준의 또 다른 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도 있었다.

 

명월유정환고아 (明月有情還顧我)   밝은 달은 정이 있어 나를 돌보는데,

청풍무의불유인 (淸風無意不留人)   맑은 바람은 정이 없어 머무르질 않는구나.

 

이처럼 청풍과 명월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비유하는 글은 청나라시대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무심코, 청풍과 명월을 시에 썼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다음과 같은 시도 마찬가지였다.

 

청풍수세난취아 (淸風雖細難吹我)    맑은 바람이 비록 세세하나 나를 날려보낼 수 없고,

명월하상부조인 (明月何嘗不照人)    밝은 달이야 언제 사람을 비추지 않은 적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