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휘(江暉)
1945년 9월 2일 오전 7시반, 여수석(黎秀石)은 중경<<대공보(大公報)>>의 영국군 태평양함대 종군기자의 자격으로 동경만에 정박해있던 미국군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서명의식을 친히 목도하였다.
항복의식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제일 먼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고, 전투시간도 가장 길었으므로, 9개국대표의 입장순서는 중국이 제일 먼저 앞서고, 그 다음에 미국, 소련,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카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의 순서였다.
9시정각, 동맹국의 항복접수의식이 정식 시작되었다. 항복접수의식을 주재하던 맥아더 장군이 먼저 말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적지 않은 기자들은 맥아더의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꼈다. 한쪽은 항복하고, 한쪽은 항복을 받는 입장인데, 무슨 공동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평화를 회복하자고 하는 것은 일본의 체면을 너무나 세워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맥아더는 갑판에 놓여진 탁자를 가리키며, 일본대표에게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먼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장관이, 이어서 우메즈 미지로(梅津美治郞) 육군대장이 서명했다. 항복접수문서에는 맥아더가 동맹군의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먼저 시작해서, 그 다음은 니미츠 해군대장이 미국전권대표의 자격으로 서명했고, 이어서 중국전권대표 서영창(徐永昌) 장군이 서명했다.
역사를 회고하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 때 일본이 진정 무조건투항한 것인가? 여수석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항복접수를 받던 그날, 수행기자들의 손에는 항복문서의 전문 복사본을 나눠주지 않았다. 그저 모두 일본이 무조건투항했다고 보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항복문서를 보니, 그 안에는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군대의 투항과 국가의 투항은 차이가 크다. 왜 일본이 정식으로 투항하는 날에, 무조건이 유조건으로 바뀌고, 군국주의의 일황체제를 폐지하는 것은 일황 히로히토(裕仁)의 지위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는가? 이 두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는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일황 히로히토는 1945년 6월 22일 중신과 군대지휘관을 소집하여 강화(講和)에 대하여 구두로 지시를 내렸다. 당시 일본의 패전은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히로히토는 소련이 나서서 '조정'해주기를 바랐으며, 교전쌍방이 "명예로운 평화"를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소련은 일본에 있어서 여전히 중립국이었다. 그리고 일찌기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미 1945년 4월 5일에 소련은 이 조약의 폐지를 선언했었다.
7월 27일, 일본의 주소련대사인 사토(佐藤)는 두번째로 명을 받아 소련에게 조정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중국, 미국, 영국의 삼개국은 전세계에 <<중미영삼국의 일본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그 안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는 즉시 무조건투항해야 한다. <<카이로선언>>의 조건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일본의 군대는 반드시 완전히 무장해제되어야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영원히 폐지되어야 한다. 일본전범은 재판에 회부한다. 일본국민의 민주를 저지하는 모든 장애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일본이 다시 무장할 수 있는 공업을 보유할 수 없다. 그 외에 <<포츠담선언>>은 일본정부에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은 신속하면서도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소련의 외교부장 몰로토프는 일본의 주소련대사와 8월 8일 밤에 회담하기로 약속했다. 6일, 일본정부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 모스크바로부터 날아오자마자, 그들이 듣게 된 것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탄을 투하한 폭발성이었다. 히로시마시는 졸지에 폐허로 되었고, 주민들중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했다.
히로히토는 이로써 신속히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더욱 조급하게 소련측의 회신을 기다렸다. 8월 8일, 일본이 들은 답변은 바로: 소련이 그날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8월 9일, 미국은 두번째 원자탄을 투하했다. 나가사키의 주민은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 10일, 히로히토는 어전회의에서 결정했다. 일황체제가 변경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포츠담선언>>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8월 12일, 미국은 공개적인 방송을 통해서 일본에 회신했다. 그 내용은 바로, "투항한 날로부터 일황 및 일본정부의 국가통치권한은, 투항조건을 실시하는 때로부터, 반드시 동맹군최고사령관의 제한아래에 둔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답변은 바로 일황을 폐지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다. 다만, 그의 권력을 동맹군최고사령관의 제한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완전히 <<포츠담선언>>에서 정한 두 가지 투항조건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군국주의는 반드시 영원히 폐지되어야 하고, 일본전범은 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일황은 삼군총사령관이고, 매번 침략전쟁, 중국침략부터 진주만기습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결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점에 관하여는 일본의 역대 어전회의기록이 바로 증거이다. 일황은 원래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가 투항도 하기 전에 그가 계속 '천황'의 지위에 있을 수 있도록 동의해준 것이다.
바로 이 점때문에, 일본인들은 '득촌진척(得寸進尺)'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히로히토는 미국이 그의 황위를 보전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미친듯이 날뛰었따. 14일 그는 국내인민에게 "종전(終戰)"조서를 내렸는데, 한 마디도 동맹국에게 투항한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중. 미. 영. 소의 공동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말만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을 "당초 전쟁개시는 자존과 동아시아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변명했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중국을 침략하였다는 점을 승인하지 않고 있는데,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동맹국은 항복문서를 받으면서, 원래 요구한 "일본국(日本國)"의 무조건투항을 "일본군(日本軍)"의 무조건투항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에 진주한 미군도 일본군의 무조건 투항을 감독하지 않았다.
일본군참모본부는 부대에게 일체의 기밀문건을 파기하도록 명령했고, 동경 시부야구에서만 파기하는 문건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3일간 하늘을 뒤덮었다. 이렇게 일본군은 그들이 침략전에서 자행한 독가스전, 세균전, "삼광(三光)"정책등등의 죄행을 담은 기록을 없애버렸다.
지금까지, 중국각지에 매장된 독가스탄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 한 원인은 바로 일본군이 독가스전의 기록을 담은 모든 기록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중요한 또 다른 원인은 일본정부가 아직까지도 독가스탄의 제거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일본군이 고의로 무조건투항의 조건을 위반하여 증거를 훼손시킴으로 인한 악과(惡果)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증거훼손은 전쟁범죄자를 엄호했다. 이것은 드러내놓고 동맹군에 대하여 투항한 조건의 하나에 항거한 것이다:"전쟁범죄자를 재판한다"
항복문서의 또 다른 규정은 "일본이 군사공업을 갖는 것을 엄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군부는 명을 내려, 군수물자를 "긴급하고 비밀리에" 민간용으로 전환시켰다. 더욱 엄중한 사태는 그 뒤에 발생한다. 동맹국이 원래 지정한 일본의 850개 군수공장으로 중, 미, 영, 소의 사개 국에 넘겨서 배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있는데, 일본의 지배권을 독차지한 미국은 이 공장을 일본정부와 사영기업에 넘겨주어버린다.
1946년 8월, 중, 미, 영, 소, 프의 오 개국은 파리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강화회의를 진행할 때, 여수석은 기자의 자격으로 다시 미, 영, 소의 삼국에 대하여 일본에 대한 강화의견을 물은 바 있다. 그가 들은 답변은 이 세개국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즉, 일본이 다시는 중공업을 갖지 못하게 하고, 다시 무장할 수 없도록 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포츠담선언>>의 "일본에 다시 무장할 수 있는 공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미국은 다시 한번 180도 입장을 선회한다. 동맹국의 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의 중공업을 다시 회복시킨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그후 몇년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발생한 전쟁은 답안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미국은 일본을 그가 전세계를 지배하는데 하나의 졸(卒)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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