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중국에서는 갑오전쟁이라 함)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거짓말이 떠돌고 있다. 예를 들어, 청나라정부가 해군에 지급한 돈이 부족했다느니, 새로 함정을 살 돈이 없었다느니, 가장 좋은 포탄을 매입하지 못했다느니, 청나라의 실력은 일본보다 못했다느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영국의 해전사학가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해전의 결과는 쌍방의 해상전투이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일 일본이 해상전투이론을 좀 더 많이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절대 실력이 더 강하고, 견고한 철갑선을 보유한 북양함대에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청나라가 해상전투이론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거함과 대포를 보유한 상황하에서 5:0으로 참패하였겠는가?
양계초에 따르면, "여러 신하들이 해군을 훈련시킬 것을 주청했고, 3000만냥의 자금을 준비했다...이화원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모았던 자금은 모두 토목공사에 투입했다" <<음빙실합집. 문집>> 제2권 제40페이지에 있는 이 주장은 해군의 경비조달에 대한 일반 방식과 너무나 차이가 크다. 해군에서 광서14년에서 20년까지 2000만 내지 3000만냥을 준비하는 것은 평균 매년 300만냥 내지 400만냥을 모아야 하는데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계초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서태후에 반대하기 위함이었고, 사실을 과장한 측면이 강하므로, 이를 믿기는 힘들다. 양제초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냈는데, 무술변법때 강유위는 이화원을 포위하고 서태후를 죽이려던 시도를 감추기 위하여, 일본으로 도망친 후, 양계초와 함께 담사동의 "옥중제벽"시도 고쳐버렸다. 그러나, 중국근대사에서는 기본적으로 양계초의 거짓말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광서17년 4월 28일부터, 서태후는 이화원에 주로 거주했는데, 이는 이때부터 이미 이화원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공사는 계속되었고, 처음에 모은 자금은 서태후의 60회생일기념을 위한 것이었으며, 해군아문경비(海軍衙門經費)를 이용하여 계속 공사했다. 그해 2월 16일에 혁광은 이화원자금이 부족하여 해군자금을 일부 가져다 쓴 사실이 있으나, 8월 15일에 이 금액은 모두 채워넣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얘기할 것은 꺼내 쓴 것은 해군아문경비이지 북양함대의 비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해군아문경비도 이미 다 갚았다는 것이다.
해군경비를 보면, 청나라정부가 해군에 투입한 경비는 일본보다 절대 적지 않았다. 북양함대는 1861년부터 1888년까지 27년간, 청나라정부가 투입한 해군경비가 모두 1억냥백은에 달하고 매년 약 300만냥에 달하였다. 이는 전체 재정의 4%-10%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일본정부는 1868년부터 1894년까지 26년간 모두 해군에 9억일원(日元)을 투입했는데, 이를 중국백은으로 환산하면 6000만냥에 해당하고, 매년 230만냥에 해당한다. 청나라와 비교하여 60%수준 밖에 투입하지 않은 것이다.
정여창(丁汝昌)이 전쟁전에 주요함선에 속사포를 배치하도록 제안하였고, 은60만냥이 필요하였다. 이홍장은 돈이 없다고 말했다. 북양함대는 황해해전에서 패전했는데, 그제서야 이홍장은 해군자금의 내역을 보고한다: "회풍은행(HSBC)에 은107만2900냥, 덕화(德華)은행에 은44만냥, 이화양행(怡和洋行)에 55만9600냥, 개평광무국에 52만7500냥, 총합계 260만냥" 돈이 없다던 해군이 예금하고 있던 금액은 이렇게 많았던 것이다.
전쟁발발전에 수량상으로 보든, 수준으로 보든, 북양함대의 장비는 일본연합함대보다 훨씬 나았다. 북양합대의 장갑수량과 품질은 일본의 연합함대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당시 북양함대와 연합함대의 철갑선에 있어서의 수량은 6:1이었다. 중국이 훨씬 앞섰다. 비철갑선에서는 8:9로 일본이 약간 더 나았다. 정원호(定遠號), 진원호(鎭遠號)의 철갑두께는 14촌이었고, 경원호(經遠號), 내원호(來遠號)의 철갑도 9.5촌이었다. 일본은 위력이 가장 컸던 삼경호(三景號)도 북양함대정도의 장갑방어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북양함대중 정원호, 진원호는 영국과 독일의 기술중 우수한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었고 모두 12인치대포 4문을 장착했으니,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단단한 철갑선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최선진수준이었다. 화포로 보더라도, 대구경화포이건, 소구경화포이든 모두 청나라가 우세를 점했다. 200밀리이상의 대구경화포는 북양함대와 연합함대의 보유비율이 26:11이었다. 청나라가 훨씬 앞섰다. 소구경화포의 측면에서 북양함대와 연합함대는 92:50이었다. 중구경화포에서만 일본이 약간 앞서서, 141:209의 비율이었다. 평균적인 항해속도로 보면 일본의 함선이 청나라보다 1.44노트 빨랐는데,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큰 차이가 아니었다. 청나라정부는 이런 우세를 믿었기 때문에 의연하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홍장이 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배를 보전하려고 했고, 전쟁중에 위력이 가장 큰 개화탄을 사용했다면, 정원호, 진원호의 두척만으로도 일본함대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청나라와 일본의 모든 함대를 함몰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쾌속정을 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널리 알려진 소문은 청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돈으로 좋은 탄약을 사지 않았다고 하여 모든 죄명을 서태후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데, 이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다.
풍도해전과 황해해전에서 북양해군은 포탄이 일본배에 떨어졌는데도 터지지 않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것은 탄약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풍도해전에서, 제원호(濟遠號)는 150밀리구경화포를 사용하여 포탄을 발사했는데, 일본에서 속도가 가장 빠른 길야호(吉野號)의 옆구리를 맞추었다. 갑판을 여러 겹 뚫고 들어갔고, 발전기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방어갑판을 뚫고 선창안에 떨어졌다. 아쉽게도 포탄의 품질이 안좋았고, 안에 폭약을 장전시키지 않아서, 명중시키고도 터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길야호는 요행히 침몰을 모면했다. 황해해전에서 길야호는 다시 포탄에 여러번 맞았는데, 결정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당시 진원호에서 전투를 도와주던 미국인 Paul W. Bamford(1860-1897, 미국 아나폴리스해군학원졸업)에 의하면 길야호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포탄이 장갑층을 뚫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해해전에서 북양함대가 발사한 포탄에서 어떤 탄약에는 "모래와 진흙만 장전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는 "석탄가루만 들어 있어서 적선을 맞추고도 터지지 않았다"
함포에서 발사한 포탄이 터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해안의 포대에서 발사한 포탄도 터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군대의 여순포대에서 발사한 포탄은 "비록 소리는 대단했지만, 우리 병사들의 피해는 아주 적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해안의 포대에서 발사한 적의 대구경포탄은 안에 대부분 콩이나 흙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격중하지만 터지지 않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발사한 포탄 자체가 폭약을 장전하지 않은 포탄이었다는 것이고, 그저 선체를 뚫을 수는 있지만 폭발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둘째는 발사한 포탄에 장전한 폭약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전된 것은 석탄가루, 모래흙따위였다. 이런 포탄은 속사포를 보유한 일본함선과 격전을 벌이는데는 적절하지 않았고, 그저 포탄발사연습하는데나 쓸 것들이었다.
아주 세심하게 이 현상을 관찰해본 연구자에 의하면, 정원호와 진원호에서 발사한 197매의 12인치(305밀리) 구경포탄중에서, 반은 고체탄이고 폭파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가 최후에 이르자, 정원호와 진원호의 포탄은 고갈되었다. 각각 겨우 12인치구경 강철탄 3발, 2발이 남았다.
그렇다면, 북양함대는 왜 전쟁이 발발하였는데도, 실전에는 적합하지 않고, 연습에나 적당한 포탄을 군함에 적재하고 있었을까? 왜 가장 위력있는 개화탄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1991년초, 연태해군항공공정학원의 소소동 선생과 해군의 유관부서는 북경유리창중국서점에서 직예후보도 서건인이 쓴 <<상독판군무처차험북양해군품>>이라는 글을 찾아냈는데, 품의 뒤에는 첨부로 <<북양해군각원우열단>> , <<북양해군각선대포및존선각종탄자수목청절>>, <<북양해군존고비용각종대포탄자수목청절>>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그 비밀이 풀렸다.
서건인의 통계숫자에 따르면, 황해해전에 참전한 정원, 진원, 정원(靖遠), 내원, 제원, 광병(廣丙)의 7척의 배에 보관된 개화탄만 3431매였다. 그중 305밀리구경포에 사용되는 포탄이 403매, 210밀리구경포탄이 952매, 150밀리구경포탄이 1237매, 120밀리구경포탄이 362매, 6인치구경포탄이 477매였다. 황해해전후, 다시 북양해군에 360매의 개화탄을 보급했는데, 그중 305밀리구경포탄이 160개, 210, 150밀리구경포탄이 각 100매였다.
3431매의 개화탄중 3071매는 일찌감치 황해해전의 전투개시전에 북양해군에 내려보냈다. "이 개화탄이 왜 황해해전에 쓰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유일한 해석은 당시 이 개화탄이 배에 실리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계속 여순, 위해기지의 탄약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북양해군이 황해해전에서 탄약부족을 겪은 책임의 소재는 기기국(機器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군계국(軍械局)에 있는 것도 아니며, 북양해군제독인 정여창에게 있었던 것이다" 중일쌍방이 개선한 후, 정여창은 이홍장의 "배를 지키면서 적을 제압하는" 방침을 세운다. 그리하여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하게 된다. "요행을 바라고, 출항할 때, 탄약조차 충분히 가져가지 않는다. 이리하여 북양해군은 탄약부족상태에서 일본함대와 5시간이 걸친 해상전투를 벌였고, 이는 전투력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이외에 북양해군의 주력선은 모두 어뢰관 3-4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함선에 대하여 어뢰를 한번도 쏘지 않았다. 정여창은 전황을 보고하면서, 어뢰를 발사하였다는 말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일본함선이 경원, 치원호에 어뢰공격을 했다고만 적고 있다. 이로써 볼 때, 대량의 개화탄이 함선에 실리지 않은 것처럼, 함선구매시 이미 장착되어 있던 대량의 어뢰도 전쟁후에 계속 창고속에 처박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약에 모래흙, 석탄가루와 콩등이 섞여 있어 폭발에 영향을 주었던 것과 관련하여, 원인은 천진군계국의 업무인원이 일본에 매수되어 일본의 간첩이 되어 고의로 파괴한 것이라고 한다. 이홍장과 그의 부하들은 일본간첩을 체포하고도 다시 풀어주었다. 풍도해전때는 방백겸이 도망치면서 먼저 백기를 올리고, 디시 일본기를 올렸다는데, 그렇다면 일본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닌가?
패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평천국의 난이다. 이 사교조직은 청나라를 참혹하게 파괴했다. 또한 청나라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군대는 각자 자신을 위해 싸웠으니, 사병과 같았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좌종당과 같은 경우에는 애국자이다. 그는 신강을 회복하고, 조이풍도 티벳으로 판도를 넓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홍장은 좌종당도 아니고, 조이풍도 아니었다. 이홍장은 시종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지,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해군이 없어져도 육군이 보전되었고, 실력은 여전했다.
이홍장이 무너져도 수천수백의 이홍장이 또 나타났다. 원세개는 청나라황제를 평화적으로 퇴위시켰고, 더 많은 "이홍장"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파란만장한 민국시대이다. 일본이 침입해도 내전에 골몰했다. 이후 중국과 일본의 격차는 점차 더 벌어졌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년후인 오늘 날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청일전쟁에 대한 거짓말을 믿고 있고, 거짓말을 퍼트리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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