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오사카 제4사단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3. 28.

오사카제4사단은 1888년에 성립되었다. 일본군중 가장 오래된 사단중의 하나이다.  이 부대의 산하에는 4개의 연대가 있는데, 장비도 1류이어서 일본군의 "정예부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사단은 성립된지 얼마되지 않아, "멍청한 부대"라는 소문이 전 일본에 퍼져버렸다. 특히 제4사단의 핵심부대인 제8연대는 러일전쟁시 연전연패하였으므로 "패전이 두렵지 않은 8연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항일전쟁폭발전까지, 제4사단은 전선에 배치된 적이 없었다.

 

1937년 중국내 일본군병력이 모자라게 되자, 일본군대본영은 제4사단을 만주지역으로 배치하였고, 관동군에 예속되었다. 어떻게 이 부대의 면모를 일신하여 전투정신이 넘치도록 할 것인가? 일본군 대본영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휘관이 부대의 전투력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일본군 대본영은 몇명의 명장을 보내서 이 사단을 훈련시켰다. 예를 들어 별명이 "말레이시아의 호랑이"였던 야마시타장군(山下奉文)에게 바로 사단장을 맡겼다. 그러나, 그도 자유분방한 제4사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1939년, 소련과 일본은 당시 몽고와 만주국을 대리하여 노몬한(諾門罕, 할힌골, Nomonhan, Khalkhin Gol)지구에서 전쟁을 벌인다. 만주국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센다이사단), 제4사단(오사카사단)은 긴급명령을 받들어 전선에 증원 투입되었다. 제2사단(센다이사단)은 명령을 받은 즉시 강행군하여 4일만에 노몬한에 도착하고 그날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다만, 소련군에 일패도지한다.

 

이와는 반대로, 제4사단은 출동명령을 받고도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동원명령이 하달되자, 사단에 병에 걸린 환자가 급증하여, 가지각색의 이유를 들어 전선에 나가지 않고 본부에 남겠다는 병사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연대장은 분노한 끝에, 친히 의무실에 앉아서 진단하는데 참가했다. 이렇게 하여 억지로 인원을 모아 전선을 향하여 출발했다. 연대장이 의사로 직업을 바꾸었다는 우스개는 이때부터 일본군내에 소문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4사단의 사병들은 다시 새로운 수단 즉 소극적인 사보타지를 계속한다. 하이라얼에서 노몬한까지 제2사단이 4일 걸린 거리를 제4사단은 꼬박 8일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게다가 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부대원 상당수가 도망친 상태였다. 그리고 더욱 묘한 일은, 제4사단이 전선에 도착한 바로 그날 소련과 일본은 정전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도망쳤던 제4사단의 병사들은 마치 보약이나 먹은 것처럼 신속히 부대를 따라붙었다.

 

재미있는 것은 되돌아갈 때는 군복도 제대로 갖춰입고, 인원도 꽉 채우고, 사기도 높아서 제4사단은 전일본군중 가장 위무가 당당한 부대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둘러 전장터에 도착했던 제2사단은 무기와 장비를 잃어버리고, 부상자가 온 부대에 가득차 있었다. 관동군의 뉴스와 선전을 담당하던 장교는 더 이상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던지 일본군신문에 <<우리의 무적(無敵)황군 제4사단 위세있게 돌아오다>>라는  제목에서 글자 한자를 바꾸어 <<우리의 무상(無傷)황군 제4사단 위세있게 돌아오다>>로 고쳐써서 이 부대를 조롱했다.

 

비록 온갖 추악한 모습을 다 보여주었지만, 제4사단의 운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화중지구를 침략한 일본군은 전투가 시급하고 증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군부는 제4사단에 대한 책임추궁을 포기하고, 급히 그들로 하여금 남하하여 전투에 증원되도록 조치했다.

 

사실, 제4사단의 명성은 중국군대내에도 일찌감치 유명했고, 서주회전기간동안 중국군대는 이상한 일본군을 하나 만나게 된다. 당시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맞이하여 이종인(李宗仁)은 40만대군을 지휘하여 교묘하게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게 된다. 그러나, 중국군대는 포위망을 뚫은후, 이미 사람은 지치고 말도 피로하여, 중장비를 많이 잃어버렸고, 전투력도 많이 감퇴되었다. 산동 강소 안휘의 변경에 있는 한 도로를 지나갈 때, 피로한 중국군대는 돌연 장비를 아주 잘 갖춘 일본군대를 만나게 된다. 중국군대는 황급히 도로를 벗어나 부근의 산으로 철수한다. 이상한 것은 한참이 지나도록 일본군이 추격해오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군대의 지휘관은 놀란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보내어 왠일인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 일본군은 전혀 추격할 생각이 없었고, 도로양측에서 당당하게 밥을 짓고 있었다. 이 이상한 일본부대가 바로 남하한 제4사단이었다.

 

당시 중국군은 금방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도망쳐왔으므로 상황이 아주 위험했다. 중국군대는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도로를 횡단했는데,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이후, "오사카의 일본병사는 싸울 줄 모른다"는 소문이 금방 퍼져갔다. 매번 전투때마다 중국군대는 상대방이 "오사카사단"이라는 말만 들으면, 사기가 급증하였고, 서로 제4사단과 싸우려고 했다. 금방 전선에 투입된 제4사단은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연이어 몇번의 패전을 겪게 된다. 심지어 우군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인접부대는 관동군사령부에 호소했다: "제4사단이 참전하면,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전투도 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일본군 제11군의 지휘관은 할 수 없이 제4사단으로 하여금 후방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한다. 한번은 제11군사령관 아나미(阿南)가 소문을 믿지 않고, 제4사단을 장사(長沙)회전에 주력부대로 보낸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제4사단은 장사에 들어갔다가 바로 쫓겨나오고 전원이 궤멸당한다. 장사를 지키던 국민당군대의 설악(薛岳)이 이끄는 부대가 정예부대였던 것이다. 그저 아나미처럼 전투가 뭔지 모르는 지휘관만이 제4사단과 같은 부대를 장사에 주력부대로 출동시킬 것이다.

 

장사회전에서의 전투이후로 제4사단은 일본군의 '상문성(喪門星, 보면 죽는 별)'이 되었다. 어느 군도 제4사단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본영은 할 수 없이 제4사단을 직할부대로 재편성한다. 제4사단은 이렇게 떠벌리고 다녔다. "우리들은 갑종사단이다. 개전시에는 관동군-정예부대에 속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는 제11군-역시 정예부대였다. 마지막으로 제11군도 우리를 거느리지 못하여, 할 수없이 대본영의 직할부대로 들어갔다..."

 

제4사단이 비록 멍청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갑종사단이고, 오래된 병사들이 많았다. 일본군의 작전손실이 매우 컸으므로 노병을 보충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제4사단의 병사들은 시도때도없이 다른 사단으로 차출되었다. 당시 일본 각부대는 인사할 때 모두 자기의 특색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제2사단은 전황이 비교적 좋을 때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이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 "구단판견(九段坂見, 구단판은 일본 동경의 야스쿠니신사가 위치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4사단의 관병들은 인사할 때, "어신대절(御身大切)"인데 번역하자면 신체를 보중하라,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중에 일본군이 형양과 지강에서 중국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전투가 시작되자, 제4사단에서 온 병사들은 옛 장기를 살려서, 장교부터 사병까지 계속 병원에 입원하고, 소극적이지만 합리적으로 작전을 거부한다. 부상당한 일본사병이 의원으로 오면, '병치료'하던 제4사단의 선배들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왜 그렇게 죽어라고 싸웠냐?"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할 때, 이 제4사단은 바로 태국의 방콕 부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쟁패배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다른 부대와는 달리, 제4사단은 바로 투항하고 순조롭게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은 혈색이 좋았고, 신체가 건장했다. 이들이 일본항구에 내렸을 때, 본토의 영양실조로 메말라있던 일본인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통계에 의하면, 제4사단은 일본군 남방군중에서 전사자가 가장 적고, 장비물자가 가장 잘 보존된 부대였다. 미군의 이 사단에 대한 평가는 "평화를 애호한다"는 것이었다. 귀국한 다음 날, 제4사단의 병사들은 바로 이 특색을 드러낸다.  제4군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바로 미군부대 앞에 노점상을 질서정연하게 펼치고, 전쟁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제4사단의 특수한 현상에 대하여, 일본작가인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오사카의 독특한 문화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오사카는 유명한 상업도시이고, 주민은 대다수가 상업과 관련됩니다. 가혹한 잡세등의 문제로 오사카는 수백년동안 다이묘와 힘으로 머리로 싸워오면서, 조건을 놓고 협상해왔습니다. 천황이 오사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다른 지방과 다릅니다. 비록 제2차세계대전때 오사카출신의 사병들도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천황을 위하여 죽는다'는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상부의 명령이 내려오더라도, 오사카출신의 군인들은 습관적으로 네고를 했습니다, 다른 부대처럼 눈감고 끝까지 집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관행보(關幸輔)는 <<일본군의 가장 멍청한 사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일본부대가 모두 제4사단과 같았다면, 아마도 중국과의 사이에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는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이 유명한 약체사단은 전쟁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번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육상자위대에는 여전히 제4사단이라는 이 부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