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도금(淘金)
일본은 온갖 머리를 짜내서 중국을 먹어삼키려고 했다. 마침내 1937년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우세를 점했으나, 일본은 여러가지 전략적인 잘못을 저질렀고, 마침내 지구전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중국의 군민에 발목이 잡혀서, 8년간의 험난하면써도 탁월한 투쟁하에 일본은 마침내 치욕스러운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투력이 중국군보다 강했고, 일본군은 훈련되 훨씬 잘되어 있을 뿐아니라, 아주 용감하였고, 장비도 아주 우수하였으며, 일본군대는 내부단결도 아주 잘되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저항역량은 여러 파벌로 나뉘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만일 일본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중국은 아마도 정나라군대에 의하여 중원을 점령당한 전철을 다시 밟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범했던 잘못은 아래와 같다.
첫째, 통일된 방침이 없었다. 9.18사변이건, 7.7사변이건 모두 하층군관들이 돌발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그러다보니 필요한 조치가 부족했고, 충분한 전쟁동원과 준비가 없었다. 황급히 일으킨 전쟁이어서, 중국측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이미 충분한 역량과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중국인들이 전쟁이 금방 시작될 것이라고 느끼고 있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 국내의 내분을 중단하고 각 당파들이 역량을 유래없이 집중하여 단결하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일본은 전쟁발발의 돌발성이 부족했고, 전쟁의 효과는 아주 낮아질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일본의 지휘부에 우수한 전략가가 없었다. 일본의 전쟁지휘부에는 인재가 많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휘부에는 백숭희, 이종인, 모택동등 일련의 전략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모택동의 "지구전을 논한다"이다. 그는 성공적으로 전쟁의 발전방향과 추세를 예측했다. 백숭희는 지구전을 '공간을 시간으로 전환한다',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룬다'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전략방침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중국군대를 이끌었다. 중국군대는 열세의 상황하에서, 성공적으로 일본의 발목을 잡았고, 일본의 경제력은 대폭 하락했으며, 전쟁능력도 거의 소모되었으며, 중국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다.
셋째, 일본은 전쟁초기에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국군대에 대하여 우세한 병력을 기초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점차 군대를 증강시켰는데, 이는 중국으로 하여금 고귀한 시간을 벌게 해주었고, 중국군대로 하여금 느긋하게 후퇴하면서, 전투능력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유럽의 됭케르크(Dunkerque) 대철수도 영국으로 하여금 전투역량을 보존하게 해주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하늘의 뜻이었나보다.
넷째, 일본은 전쟁폭발후 중국군대의 전투역량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중국의 대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함았다. 만일 전쟁초기에 중국의 주력부대를 놓치지 않고 계속 추격하면서, 대도시는 점량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공하여, 독일의 번개작전과 마찬가지로, 주요한 저항역량인 국민당군대를 몰살시켰다면, 나머지 작은 군대들은 아마도 연이어 투항하였을 것이고, 점령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시 도시를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하였다면, 중국은 아마도 망국으로 갔을 것이다. 중국은 아주 넓어서, 일본은 대도시를 점령한 이후, 도시의 방어와 도시간의 교통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것은 진격능력을 많이 약화시켰다. 그리고 중국은 전선을 안정시킨 후에, 유격전술로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일본군대의 전쟁역량을 많이 약화시켰다.
다섯째, 일본은 대돌격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한층 추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만일 일본이 대돌격전술을 사용했더라면, 그리하여 하남에서 과감하게 섬서를 거쳐 사천으로 진입함으로써 중국군대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이런 대우회전술을 사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중에 공산당이 국민당을 물리친 전술이 바로 대우회전술이었다.
여섯째, 전선이 너무 길었다. 일본이 동남아로 진군한 조치는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돌연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미국을 전선에 끌어들인 것도 전쟁의 균형추를 중국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종합하면, 일본의 전쟁야심은 너무 컸고,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했고, 지휘는 엉망이었다는 것이 일본의 군사측면에서 실패한 주요 원인이다. 당연히 일본의 전쟁은 사악한 것이었고, 사악은 정의를 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중국의 정치 > 중국과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중국은행(中國銀行) (0) | 2007.04.11 |
---|---|
오사카 제4사단 이야기 (0) | 2007.03.28 |
일본 관동군(關東軍)내의 3개 외국인부대 (0) | 2007.01.08 |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배한 또 다른 원인 (0) | 2006.11.17 |
중국에서 일본군인을 왜 태군(太君)이라고 칭했는가? (0) | 2006.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