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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중일국교정상협담의 비화

by 중은우시 2007. 6. 8.

구술: 주빈(周斌)

정리: 전역초(錢亦蕉)

 

[주빈은 오랫동안 중국외교부의 일본어통역으로 일했고,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협상에 참석했다. 30여년후 그는 자신이 중일국교정상협상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북경도착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는 1972년 7월 7일 일본수상에 당선된 후, 중요한 말을 하였다. 바로 중국과 협상을 원하고,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본말로 하자면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은래 총리는 때가 되었음을 민감하게 느꼈다. 그래서 즉시 대응했다. 북경공항의 대문은 일본의 신수상에게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내 기억으로 다나카 카쿠에이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1972년 9월 25일 오전이다. 그날 북경의 날씨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엄숙했다. 협상이 성공할지 말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다나카는 아주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일본인들에게는 하나의 습관이 있는데, 처음 만나면 자기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다. 다나카는 "나는 다나카 카쿠에이라고 합니다. 나는 54살에 일본수상이 된 다나카 카쿠에이입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젊고,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주은래 총리는 친히 타나카 카쿠에이를 조어대 국빈관 18호루에 안내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다나카 카쿠에이는 총리의 웃옷을 벗겨드리겠다고 고집했다. 주은래 총리는 "내가 주인인데, 어떻게 당신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가"고 말하니, 다나카는 총리에게 농담조로, "당신에 가장 좋은 18호루를 나에게 쓰라고 주었으니, 내가 바로 이곳의 주인입니다. 내가 당연히 당신의 웃옷을 벗는 것을 도와드려야지요. 이것은 연장자인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리하여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다. 이때 그는 또 다시 자기가 54세에 일본수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정치가중에서 그처럼 높은 학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드물게 보는 것이이다. 또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일본수상이 되는 것도 드물다. 총리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나카선생, 나는 51세에 수상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수상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미 23년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다나카 카쿠에이는 더이상 자기가 54세에 수상이 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만찬시의 '골치"

 

그날 저녁 주은래 총리는 다나카 카쿠에이 수상일행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다나카가 답사에서 한 말에 대하여 주은래등 참석했던 중국측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다나카는 "과거에 일본이 중국에 골치아픈 일을 했고, 이 점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이다. 일본어에서 '유감'은 아주 가볍게 하는 것이다.

 

당시는 일본측의 통역이 통역했었는데, 총리는 중국측 통역에게 일본어에서 '골치아픈 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그 뜻을 확인한 후에 총리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했다.

 

다음 날 협상시, 주은래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때부터 중국은 열강의 침략과 박해를 받아왔고, 많은 나라가 우리를 침략했었고,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일본은 시간이 가장 길고, 정도가 가장 심했다. 중국인민에게 조성한 손해도 가장 컸다. 총리는 이 말을 할 때 아주 격동되어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하에서 다나카 선생은 이에 대하여 의견을 얘기해주고,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평가를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구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일본의 중국침략전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중국은 먼저 이 전쟁의 성격이 침략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햐 하고, 그것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전제라고 견지했다. 일본측은 이 점에 있어서는 피동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중국측이 요구하는대로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더 이상 협상이 진행되지 못했다.

 

차중회담

 

9월 28일 오전, 희붕비(姬鵬飛) 외교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은 장성을 유람하는 도중에 차에서 회담을 가졌다. 당시 나는 통역으로 차 안에 있었다. 그리고 경위(警衛)가 하나 있었다. 이 협상은 국면을 되돌리는 역할을 하였다.

 

오히라는 사람들에게 호인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사람됨이 성실한 기독교도였다. 그는 1910년에 출생하였고, 희붕비와 나이가 같았다. 두 사람은 아주 말이 잘 통했다. 전쟁성격과 책임문제에 대하여 내가 기억하기로 오히라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전쟁의 성격에 대하여 중국인이 견재하는 관점에 대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모두 동의한다. 당시 나는 장가구에서 22개월간 있었다. 군대에 참전하지는 않았다. 나는 대장성의 공무원이었고, 장가구에서 조사를 했다. 내가 어찌 그 전쟁이 중국인민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는가. 내가 어찌 중국인민이 일본군대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모르겠는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나카선생은 나보다 젊다. 그는 1918년에 태어났다. 전쟁후기에 일본은 중국에서의 전투에 병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고, 다나카선생도 징병되었으며, 동북의 목단강으로 파병되었다. 그는 싸워본 적은 없다. 목단강에 도착한 후, 곽란에 걸려서, 목단강의 육군병원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총을 들고 싸운 적은 없고,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도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현재 일본과 대만은 아직도 소위 외교관계가 있다. 친대만세력도 비교적 강하다. 자민당내에 반대세력도 아주 강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당신들이 우리에게 완전히 이 점을 인정하라고 한다면, 중국이 표현해달라고 하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게 된다면, 다나카와 나는 귀국하고나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 우리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혹은 다른 어떤 정부문서에 서명하더라도 돌아가면 우리는 바로 하야해야 한다."

 

그러나, "골치아픈 일"이라는 정도의 말로는 중국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협상은 아주 곤란했다. 희붕비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나이가 같고, 각자 자기의 상사가 있고, 각자 자기의 국가를 위하여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오늘 태도는 매우 좋다. 아주 성의있다. 당신이 당신의 처지와 곤란한 점을 얘기했으니, 나는 그 내용을 주총리에게 그대로 보고하겠다. 우리가 적당한 표현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래서 너희도 괜찮고, 중국인민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보자."

 

합의달성

 

9월 28일 밤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쌍방의 외교부장과 수행관리들은 조어대 국빈관에서 계속 전쟁책임문제를 협상했다.

 

새벽 2시경, 오히라 외상은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한장의 메모를 끄집어 냈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오히라는 이렇게 말했다: "희부장,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입니다. 만일 다시 이 내용을 초과하여야 한다면 우리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판를 거두고 돌아가야 합니다"

 

일본측 통역이 메모의 내용을 읽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런 표현방법이었다. "일본국정부는 과거 일본이 전쟁을 통하여 중국인민에게 조성한 중대한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심각하게 반성합니다" 이 말을 다 듣고, 희붕비는 그대로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오히라 선생에게 이 메모의 내용을 다시 보라고 얘기했다. 그 메모는 오히라가 손으로 쓴 것이었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초안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희붕비부장은 통역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지 우려하여, 나에게 "소주(小周), 한자 한자 정확하게 나에게 번역해줘 보게"라고 했고, 나는 "바로 그 뜻입니다"라고 말했다.

 

희부장은 한참을 생각한 후, 대답을 했다. 그 때는 이미 새벽 3시였고, 인쇄소의 노동자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일공동성명"은 그 다음 날 오전 9,10시경에 서명할 예정이었고, 전쟁책임에 관한 문구는 반드시 확정되어야 했다. 희부장은 "오히라 선생, 우리 10분만 휴식합시다"라고 했다. 오히라도 아주 기뻐했다. 그는 "지금 드린 그 메모는, 내가 아직 노친네(老頭子)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다나카가 그보다 8살이나 어렸지만, 그보다 직위가 높으므로, 뒤에서는 그냥 '노친네'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습관이다. 그는 "아마도 다나카는 아직 자고 있지 않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가서 그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희부장도 즉시 주은래 총리를 만나러 갔다. 총리도 조어대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략 12,3분후, 그들은 모두 돌아왔다. 희부장은 "오히라 선생, 당신이 제안한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정합시다"라고 했다. 내 기억에 일본측도 매우 기뻐했고, 박수까지 쳤었다.

 

대만문제

 

9월 29일 오전, 주은래 총리, 다나카 수상, 희붕비 외교부장, 오히라 외교부장은 정식으로 인민대회당에서 <<중일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중일관계정상화에 관하여 주은래 총리는 일찌기 10여년전에 "3대원칙"을 정한 바 있었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둘째, 대만은 중국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이다; 셋째, 대만과 일본간의 소위 평화조약은 무효이고 불법이다. 그런데, 일본측에 이 세가지 원칙을 모두 받아들이라고 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평화조약은 1950년에 체결되었고, 일본은 삼권분립제도를 취하고 있어, 이런 조약은 당시 일본국회에서 비준한 것인데, 22년후의 정부가 22년전에 통과시킨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셋째 조항에 대하여 일본측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은래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세가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아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주요한 목적은 그들이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히라 선생이 의견을 내달라." 공동성명을 발표한 당일에, 서명을 마치고, 오히라는 인민대회당을 떠나 민족문화궁으로 갔다. 많은 일본인, 중국의 기자가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중일협상을 취재하던 신문계의 언론인들이 모두 있었다. 오히라는 정식으로 선포했다: "현재, 오늘 부터, 우리는 이미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국교정상화의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는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종지합니다." 문제는 그대로 풀렸다. 그리고 아주 교묘하게 풀었다.

 

"외강(外强)"과 "내수(內秀)"

 

9월 29일 오전, 주은래 총리는 다나카수상일행을 따라 상해를 방문하기로 했다.

 

주은래 총리가 타는 전용기는 전소련의 비행기였고, 다나카의 일본전용기는 미국의 비행기였다. 다나카는 "당신의 비행기를 타겠습니다"라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주은래 총리가 농담처럼 그에게 말했었다. "내 비행기는 당신 것만큼 좋지 않아요." 다나카 카쿠에이는 "다른 사람들은 먼저 상해로 가서 기다리게 하겠습니다. 나와 오히라, 니케이도(二階堂) 세 사람이 당신의 비행기를 타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주총리는 "좋다"라고 했고, 다나카는 "오히라군과 희붕비선생은 차안에서 회담하여 아주 성공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비행기에서 애기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자, 다나카는 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코까지 골았다. 오히라 외상은 아주 미안해 하면서 그를 깨우려고 했다. 주총리는 오히라의 손을 막고 말했다: "그는 피곤할 겁니다. 깨울 필요없습니다. 당신과 얘기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히라는 격이 맞지 않고, 총리는 총리와 장관은 장관과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총리는 "당신과 얘기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으니, 오히라도 아주 기뻐했다.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서, 주은래 총리가 다나카 수상에게 내린 평가는 "외강"이었다. 일본인들은 다나카 수상에게 "컴퓨터를 단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한번 한다고 하면 끝까지 밀어부쳤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고 마치 컴퓨터로 제어하는 것같았다. 오히라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보편적으로 둔우(鈍牛)로 알려졌다. 매우 온화하고 착실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총리의 평가가 정말 뛰어났다고 느꼈다. 그는 "다나카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외강이다. 오히라가 사람에게 주는 인상은 내수이다"

 

오히라는 중국어의 유래, 성어를 잘 알았고, 한시도 지을 줄 알았다. 오히라는 그가 쓴 한시를 주은래총리에게 보여주었다. 주총리는 오히라선생과 같은 정치가가 시를 지을 줄 아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하고, 게다가 중국의 고체시를 짓는 것은 놀랍다고 하였다. 오히라는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논어, 맹자는 모두 배웠고, 특히 제갈공명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라는 총리에게 "나라는 사람, 나라는 친구는 당신이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일본에서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총리와의 사이에 달성한 이 협의를 끝가지 지키겠습니다. 절대로 중도에 물러서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후 다시 다나카에 대하여 말했다. "이 사람은 거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매우 민감하고 총명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는데, 누구의 말도 끝까지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경에서 출발하기 전에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다나카선생 절대 상대방의 말을 끊지 마십시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위대한 주은래입니다. 절대로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시고, 말을 절대 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큰 실례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하려는 말의 절반도 하기 전에 그는 '당신이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라고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북경에 와 있는 요 며칠동안 그는 진짜 무슨 말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한번은 주총리께서 40분간 말하는데도, 억지로 참고 다 듣더군요."

 

마오타이와 천황

 

그날 밤, 상해에서 성대한 환연만찬이 개최되었다. 주은래 총리와 다나카 수상은 함께 잔을 들어 축하했고, 다나카는 그날 마오타이주를 적지 않게 마셨다. 그는 술을 아주 잘 마셨다.

 

만찬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다나카는 각 탁자를 돌면서 건배를 했는데, 모두 마오타이였다. 비서는 그에게 이 술은 55도인데, 아십니까. 이 술은 불이 붙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시켜 불을 붙여 보여주기도 했다. 당신이 마시는 것이 지금 불입니다. 그러나, 다나카는 듣지 않았다. 오늘 총리가 나와 함께 상해까지 왔는데, 내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했다. 마오타이주가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이때 부터이다.

 

다음 날, 즉 30일, 다나카 수상일행은 상해를 떠나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비행기에 타려고 할 때, 총리가 앞으로 나가서, 다나카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천황폐하에게 안부를 여쭈어주십시오". 천황폐하. 이 말이 총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 천황은 중국에서 금기어였다. 전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수교했으니, 정부간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고, 이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나는 당시에 이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중에 보니, 일본 신문의 반응은 뜨거웠다. 주은래와 같은 도량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신문에서는 만일 여론조사를 한다면, 이 한마디 말이  중국을 지지하는 비율을 적어도 10%이상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