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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국봉22

모택동의 임종유언의 역사진상 글: 학길림(郝吉林) 1976년 9월에서 10월, 중국정계는 한 마디 말을 둘러싸고 경심동백(驚心動魄)할 투쟁을 전개한다: 그것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按旣定方針辦)"는 말이다. 이 말의 영향력은 아주 크고 깊어서, 지금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모두 .. 2012. 4. 23.
모택동 사후의 사인방(四人幇) 글: 서염(徐焰) 1976년 9월 9일, 모택동(毛澤東)이 서거한 후 1시간여가 지난 새벽2시경 중앙정치국은 202루(樓)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장례문제를 논의했다. 강청(江靑)은 회의에서 울며불며 소란을 피웠다. 그녀는 모주석이 등소평(鄧小平)때문에 화가 나서 죽은 것이라고 말하.. 2012. 1. 24.
모택동기념당은 왜 천안문광장에 만들었는가? 글: 조굉(曹宏) 당중앙은 모택동의 유체를 보존하여 기념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후,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반복하여 연구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중산릉을 본받아 북경의 서산에 기념당을 만들 것으로 추측했지만, 결국 천안문광장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인 곡목(.. 2011. 1. 29.
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글: 축을(丑乙) 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임표반혁명사건"이다. 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 2009. 11. 14.
화국봉(華國鋒)의 신세내력 작자: 미상 화국봉의 원래 성은 소(蘇)씨이다. 이름은 외자로 주(鑄)이다. 1938년 유격대에 참가할 때, 소주는 "중화민족항일구국선봉"에서 세 글자를 따서 '화국봉'이라고 가명을 지었다. 나중에 그는 '화국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그의 본명이 '소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적게 .. 2008. 6. 11.
모택동의 다섯 명의 후계자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모택동이 다섯번째로 선택한 후계자이다.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가 모택동이 선택한 첫번재 후계자이고. 1945년 중공칠대(中共七大,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의 후계자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때 유소기를 위해서 여론을.. 2008. 6. 6.
화궈펑(화국봉, 華國峰)의 글씨 2007. 5. 31.
모택동 만년의 비밀거주지 : 202와 305 전 중공중앙판공청 경위국 부국장 무건화(武健華)는 모택동의 경위중의 하나이며, 모택동이 서거한 후, 무건화는 명을 받들어 강청 및 모택동의 조카 모원신을 체포함으로써, 사인방시대를 마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최근 그는 구술로 사인방체포의 전후의 경력을 이야기하면서, 모택동을 위하여 .. 2007. 4. 2.
모택동의 정치유언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왕왕 역사의 발전이나 방향을 뒤바꿔놓는다.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강청의 시대에 이런 일이 발생했었다. "사인방"은 모주석이 "기존에 정한 방침대로 하라(按旣定方針辦)"고 하였다고 하고, 화국봉은 모주석이 "과거의 방침에 따라 하라(照過去方針辦)"고 하였.. 2007. 1. 8.
기등규(紀登奎) : 모택동 말년의 4 총신(寵臣) 기등규의 아들인 기파민(紀坡民)의 부친에 대한 회고의 글이 나온 이후, 사람들이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역사를 찬개(纂改)하고 문혁과정에서 엄중한 잘못을 저지르고 극좌노선을 일관되게 집행한 인물을 분식하는 것은 드물게 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을 놀라.. 2006.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