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국선(楊國選)
1981년 6월, 화국봉은 중공중앙 11기 6중전횡서 중공중앙주석, 중앙군위주석에서 사직하고, 2008년 8월 20일 별세한다. 자연히 화국봉은 이미 매체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화국봉의 네 자녀들은 중국인들이 대부분 모르고 있다.
화국봉의 원래 이름은 소주(蘇鑄)이다. 1938년 혁명에 참가할 때 화국봉으로 개명한다. 그 뜻은 "중화항일구국선봉대"에서 따왔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은 모두 "화"씨성이 아니라, "소"씨성을 가졌다. 4명의 자녀는 해외로 나간 사람이 없으니, 모두 본분을 지키는 보통사람이라 할 수 있다.
화국봉의 장남은 소화(蘇華)이고 원래 공군 모부대에서 재직했으나 지금은 퇴직했다. 지금도 여전히 단위에서 분배해준 집에서 살고 있다. 동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소박하고, 티를 내지 않는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다."는 것이다.
차남은 소빈(蘇斌)이다. 1962년에 태어났고, 중국인민해방군국방대학을 졸업했으며, 북경위수구의 간부였으나 지금은 퇴직했다. 2010년 7월, 소빈은 금산에너지집단회사의 비집행동사에 선임된다.
회사자료를 보면, 소빈은 10년동안 주로 부동산개발, 주식투자 및 기업인수합병에 종사했다. 2005년에서 2009년까지 중국매탄 및 코크스투자기금의 공동주석을 맡았다. 2007년부터 홍콩에너지광산연합회의 명예주석을 맡고 있다. 소빈의 금산에너지지반의 동사로서의 연봉은 매년 18만홍콩달러이다.
네 자녀중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장녀인 소령(蘇玲)이다. 대학졸업후, 민항총국 교통관리국에 취직해서 레이다통신네비게이션설비의 관리업무에 종사했다. 그녀는 북경시 동성구와 조양구의 인민대표이다. 현재는 중국민항총국 교통관리국 당위원회의 상임위원이며, 노동조합주석이다. 2008년에는 전국정협위원에 당선되었다.
자녀들에 따르면 화국봉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시시때때로 그들을 채찍질하면서, "그는 우리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외손녀인 왕소가(王蘇佳)가 단단히 기억하고 있는 한 마디 말이다.
화국봉의 차녀인 소리(蘇莉)는 국무원기관사무관리국의 간부이다. 화국봉의 생전에는 그의 생활비서를 맡았다.
한지준(韓芝俊). 1931년 2월 21일 산서 오대현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어났다. 1949년, 한지준은 진중지구부녀간부를 지낸다. 그녀는 당시 중공진중지구위 선전부부장으로 있던 화국봉과 결혼한다. 남편보다 9살이 어렸다. 1975년 한지준은 중국경공업수출입회사의 정치부주임이 된다. 1980년 50세때 은퇴한 후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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