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화국봉)

화국봉의 네 자녀의 근황

중은우시 2016. 1. 10. 13:18

글: 왕남방(王南方)

 

1981년 중공중앙주석직을 사직한 후, 화국봉은 27년간 정치무대를 떠나서 생활했다. 비록 그 동안 4번이나 높은 득표로 중공중앙위원에 당선되었지만, 한번도 어떤 연설을 하거나 매체와 인터뷰를 한 바 없다. 화부(華府) 주위의 이웃이 우연히 그가 문을 나서 산보할 때 만나는 외에, 그가 공중이 시야에 드러나는 일은 모택동탄신일과 기일에 모주석기념관을 참배할 때 뿐이었다.

 

화국봉의 일상생활에서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은 서예와 그가 친히 마당에 심은 포도였다. 그러나, 이 노인은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매일 오전, 그는 많은 시간을 들여 신문을 읽었다.  당보외에 도시보등의 신문도 읽었고, 매일 저녁 에는 변하지 않는 습관 즉 CCTV의 "신문연파(新聞聯播)"를 본다.

 

국가지도자가 화부를 방문하는 것은 위문이 많았다. 어떤 때는 일부 인사안배를 통보하는 것이었다. 이때, 화국봉이 자주 하는 한 마디는 "너희가 잘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약간의 구체적인 사례를 얘기하곤 했다.

 

비록 이미 권력중심에서 벗어났지만, 화부를 찾는 손님은 적지 않았다. 화국봉의 산서 고향사람도 있고, 호남에서 온 옛 부하들도 있었고, 동시대 친구의 자손도 있으며, 당과 국가의 현임 지도자들도 있었다. 화국봉 자녀들에 따르면, 모택동, 호요방, 유소기 등의 후손은 모두 화국봉집안과 자주 연락하였다. 305병원에서 화국봉의 조문을 할 때, 유소기의 아들 유원등이 참석하고, 모택동의 손자 모신우도 화국봉의 팔보산 화장당일에 영당으로 따라간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화국봉의 화제는 전혀 국내정치를 언급하지 않았다. 누가 그의 앞에서 얘기를 꺼내더라도 그는 손을 흔들어 듣지 않겠다는 표시를 했다.

 

화국봉의 본명은 소주(蘇鑄)이다. 1938년 혁명에 참가할 때, 화국봉으로 개명한다. 그 뜻은 "중화항일국국선봉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성이 '화'를 쓰지 않고, '소'를 쓴다. 4명의 자녀는 하나도 출국한 사람이 없고, 하나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본분을 지키는 보통사람들이다.

 

화국봉의 장남 소화(蘇華)는 원래 공군의 모부대에서 임직했고, 지금은 퇴직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관에서 나눠준 집에 살고 있다. 동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소박하고, 과시하지 않는다. 동료들과의 관계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작은 아들 소빈(蘇斌)은 북경 위수구의 간부였고, 지금은 퇴직했다.

 

작은 딸 소리(蘇莉)는 국무원 기관사무국의 간부였고, 화국봉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생활비서로 있었다.

 

자녀들에 따르면, 화국봉은 그들을 혼내지 않았고 그저 그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근검절약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이것은 외손녀 소가(蘇佳)가 머리 속에 확실히 기억하는 그의 말이다.

 

네 자녀중 비교적 유명한 사람은 큰 딸 소령(蘇玲)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현임 중국민항총국 교통관리국당위상위, 공회(노동조합) 주석이다. 2008년에 정국정협위원에 당선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소령은 "의외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