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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모택동 사후의 사인방(四人幇)

by 중은우시 2012. 1. 24.

글: 서염(徐焰)

 

1976년 9월 9일, 모택동(毛澤東)이 서거한 후 1시간여가 지난 새벽2시경 중앙정치국은 202루(樓)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장례문제를 논의했다. 강청(江靑)은 회의에서 울며불며 소란을 피웠다. 그녀는 모주석이 등소평(鄧小平)때문에 화가 나서 죽은 것이라고 말하며, 정치국이 계속하여 등소평을 비판하고 등소펑의 당적을 즉시 제명할 것을 요구했다. 강청이 심하게 난리를 피워 회의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회의참석자 대다수의 정치국원들이 제지하면서, 장례문제가 당장 시급한 문제라고 정리하게 되면서 비로소 회의에서는 강청이 제기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모주석의 유체를 보존할 것인지 여부를 계속하여 논의했다. 이치대로라면, 1956년에 모주석이 앞장서서 사후에 화장을 제창하는데 서명하였으므로, 모주석의 유지를 진정으로 받들려면 화장을 하고 유체를 보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 장기간 신격화한데다가 개인숭배를 해왔으므로 이미 그의 생전뜻대로 진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강청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인방"은 이때 고의로 자리를 피한다. 목적은 트집을 잡기 위함이었다. 만일 모주석의 유체를 보존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면, "사인방"은 이를 가지고 중앙과 화국봉(華國鋒)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유체를 보존하겠다고 한다면 뛰어난 기술이 필요했고,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유체보존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벗기 어려운 죄상이 될 것이다. "사인방"은 음험했다. 이 일로 화국봉은 강청과 맕다툼을 벌이게 된다.

 

모택동이 서거한 다음 날인 9월 10일, 왕홍문(王洪文)은 중앙정치국과 화국봉의 뜻에 거슬려, 중남해 자광각에 임의로 "중앙판공청당직실"을 설치한다. 그리고 중앙판공청의 명의로 각 성, 시, 자치구의 당위원회에 모주석 조문기간동안 각 성시에서 발생하는 중대문제는 즉시 보고하도록 통지한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지시를 받아야 할 사상도 적시에 지시를 요청하도록 통지한다. 각 성, 시, 자치구의 보고와 지시요청은 직접 지정받은 당직인원(왕홍문의 비서)를 찾으라고 하였다. 호남성위 서기인 장평화(張平化)는 내용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여, 즉시 전화로 화국봉에게 보고한다. 왕동흥(汪東興)이 조사를 거쳐 상황을 상부에 보고한다. 화국봉, 섭검영의 두 부주석은 중앙정치국의 다수 위원과 상의했다. 왕홍문이 중앙책임자의 동의없이 전국에 임의로 명령을 발할데 깜짝 놀라면서, 즉시 두 가지 긴급조치를 취한다. 

 

1. 중앙정치국의 명의로 왕홍문에게 통지하여, 즉시 중앙의 동의를 받지 않고 개설한 "중앙판공청당직실"을 폐쇄시킨다.

 

2. 중공중앙의 명의로 각 성, 시, 자치구 당위와 군대계통에 통지하여, 모든 중대문제는 모두 화국봉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라고 통지한다.

 

"사인방"은 모택동 서거후에 즉시 전국의 명령권을 장악하고자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여론'을 동원한다. '사인방'이 통제하고 있던 수도의 몇몇 대학교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요문원(姚文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강청에 충성심을 표시하게 하였고, 진언서를 올려서 강청이 '주석'을 담당하게 해달라고 썼다. 당시 이리 어떤 지역에서는 소문이 나 있었고, 어떤 지방은 축하행사를 준비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청은 모주석의 장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당연히 참석해야할 조문활동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때 그녀는 중남해 "202"루 모택동의 원거주지에서 문건을 확보하고,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조어대에서 중남해의 201호루로 들어갔다.

 

9월 14일, 강청은 화국봉에게 전화하여 소란을 피운다. 즉시 정치국상무회의를 소집해달라고 요구하고, 그녀와 모원신(毛遠新)등도 참석하겠다고 한다. 이처럼 중앙최고지도자에게 마치 명령하듯이 하는 행동은 화국봉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 자리에서 강청의 요구를 거절한다.

 

9월 17일 오후,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인민대회댱 신강청에서 개최된다. 회의가 시작되자, 강청은 앞장서서 발언한다: "주석처의 문건정리보관업무는 왕주임이 주석의 장례준비로 바빠서 신경쓸 틈이 없으니, 모든 문건, 필적, 원고 및 각종자료의 정리보관업무는 모조리 모원신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제안한다. 모원신은 시간이 있고 그 곳의 상황도 잘 알고 있다."

 

왕홍문, 장춘교(張春橋), 요문원이 즉시 동의한다. 모원신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거들었다.

 

그들이 말을 마친 후, 왕동흥이 발언한다: "주석이 계시던 곳의 문건, 원고, 필적, 서신은 우리 당과 국가의 고귀한 자산이다. 당의 관련조직이 보관해야 한다. 어느 개인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모주석이 생전에 확정한 이 정확한 원칙은 지금도 지켜져야 한다."

 

화국봉과 섭검영 두 부주석도 명확히 표시한다. 모주석 거처의 문건, 필적, 원고 및 각종 자료는 관례에 따라 중앙판공청이 정리 및 보관하여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9월 17일 저녁 8시경, 왕동흥과 비서 고성당(高成堂)이 함께 모주석이 생전에 거처하던 202호로 갔다. 침실과 서재의 출입문에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판공청의 인장이 찍힌 봉조(封條)를 붙인다. 그리고 장옥봉(張玉鳳)에게 감시감독의 책임을 맡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이미 결정했다. 모주석의 이곳의 문건은 모조리 봉쇄보존하기로. 중앙의 비준이 없이는 누구도 규정을 위반할 수 없다." 장옥봉이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처리하기 좋겠다."

 

그날 10시경, 강청이 중남해 202호루로 온다. 모주석의 침실과 서재의 문에 이미 봉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끝까지 화를 낸다. 그리고 장옥봉에게 묻는다: "이건 누가 한 짓이냐." 장옥봉이 대답했다: "왕주임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붙였습니다."

 

강청은 이를 갈며 말한다: "좋다. 왕동흥 네가 기습을 해버리다니." 강청이 돌아가서는 바로 화국봉에게 전화를 걸어 난리를 피웠다.

 

9월 16일, 사인방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인민일보> <홍기> <해방군보>에 사론 <모택동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라는 글을 실었고, "기정방침(按旣定方針辦)에 따라 처리한다"는 유언을 위조하고, 모주석이 원래 한 말을 마음대로 고쳐서 대거 선전했다.

 

10월 2일, 화국봉은 교관화(喬冠華)의 유엔 제31차총회에서 발언할 원고를 결재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지시한다: "원고에 모주석의 당부를 인용한 부분을 내가 확인해보았다. 모주석이 친필로 쓴 것과 3글자가 달랐다. 모주석과 내가 정치국에 전달한 것은 모두 "과거방침에 따라 처리한다(照過去方針辦)"이었다. 잘못 알려지면 안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삭제했다."

 

장춘교는 화국봉의 이 지시를 보고는 그들의 음모가 들통난 것이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래서 문건의 아래에 이런 말을 추가한다: "국봉 동지의 비주는 하달하지 않도록 건의한다. 불필요한 분쟁이 생길 수 있다."

 

"기정방침"과 "과거방침"은 겉으로 보기에는 두 글자의 차이에 불과하고, 의미도 비슷하지만, 이해하는데 차이는 아주 크다. "과거방침"은 이미 내렸고 모두 알고 있는 방침이다. "기정방침"은 이미 비밀리에 정해지고 그 내용을 추측하기 어려운 방침이다. '유언'을 장악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내용을 추가시킬 수 있다. 모원신은 모택동이 죽기 전에 곁에서 '연락원'을 지냈으므로, 여기에서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인방"의 원래 이름은 "상해방(上海幇)"이다. 그들의 소굴은 상해이다. "일월탈권"으로 성공한 왕홍문의 동생들이 상해의 당정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 28일, 장춘교는 유례가 없는 비상조치를 취한다. 왕홍문의 비서 소목(蕭木)을 직접 상해시위로 파견하여 말을 전한다. 그안에 우선 "경계심을 제고하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상해는 아직 진정한 시험을 거친 적이 없다. 임표, 등소평이 상해를 해보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임표가 해냈다면 큰 시험이 있었을 것이다. 싸워야 한다."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 장춘교가 그의 일당들에게 내린 발동령이다. 상해의 일당들은 즉시 여론준비를 하고, 민병에 총을 추가지급하여, 무력행동에 나설 준비를 한다.

 

10월 1일 국경절, 강청은 청화대학으로 가서 강연을 한다. 그때 등소평이 모택동을 '박해'했다고 말하며, '등소평의 당적을 제적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반드시 몸을 잘 단련하여' 그들과 싸워나가겠다고 하면서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10월 2일, 왕홍문은 개인적으로 '표준상' 114장을 찍어, 21장의 8촌크기 샘플 중에서 표준성을 뽑고, 주은래의 표준상에 따라 7차례의 수정을 거친다. 원래, 사인방은 정권탈취후의 '서열'명단까지 작성했다. 강청을 당의 주석으로 하고, 왕홍문이 제1부주석 겸 군사위원회주석을 마고, 장춘교는 총리가 되며, 요문원이 위원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앞당겨 개인의 표준상을 찍은 것이다.

 

10월 3일, 왕홍문은 평곡현에서 이런 말을 한다: "중앙에 수정주의가 나타났다. 너희는 무엇하는가?"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건국이래, 중앙에 고강, 요수석, 팽덕회, 유소기, 임표, 등소평이 나왔다. 안나오는게 오히려 불가능하다. 이후 무슨 당소평, 왕소평같은 류가 나올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왕홍문은 여기에서 대담하게 공격을 개시한다. 화국봉, 섭검영등을 수정주의로 몬다.

 

같은 날, 강청은 득의만면하여 따르는 사람들 30여명을 데리고 경산공원으로 가서 사과를 딴다. 그녀는 사과나무 아래서 자세를 잡고 군복을 입은 사진을 찍었을 뿐아니라, 이런 말까지 한다: "사과는 남겨두어라. 나중에 성대한 명절이 왔을 때 다시 먹자." 이 말은 그녀가 나중에 '여황제'에 오르고 싶다는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이날 깊은 밤, '사인방'의 일당이자 청화대학 당위서기인 지군(遲群)은 글쓰는 사람들을 시켜 당,정,군 지도자들의 기밀자료를 정리하도록 시킨다. 이것은 사인방이 준비한 또 하나의 포탄이다. 언제든지 권력탈취를 위해 쓸 요량으로 준비한 것이다.

 

10월 4일, <광명일보>의 제1면에 양효(梁效)의 명의로 <영원히 모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글이 실린다. 그 안에는 "모주석의 기정방침을 임의로 바꾸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하의 계속혁명의 위대한 학설을 배신하는 것이다." "여하한 수정주의분자도 모주석의 기정방침을 임의로 바꾼다면, 절대로 끝이 좋을 수가 없다." 여기의 창끝은 명확히 화국봉, 섭검영을 향하였다. 신문잡지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던 이흠(李鑫)은 즉시 이 상황을 화국봉에게 보고하고 형세가 위험하다고 설명한다.

 

'사인방'이 권력탈취를 위하여 날뛰고 있을 때, 섭검영등 혁명원로들은 이들을 제거할 마지막 준비단계에 들어섰다. 10월 2일 오후 3시경, 섭검영은 왕동흥이 있는 중남해 남루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섭검영 원수는 처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문을 들어서가 곁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바깥에 머물게 하고, 혼자서 건물로 들어간다.

 

섭검영을 자리에 앉자마자, 왕홍흥에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사인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의 당과 국가는 출로가 없다." 곧이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왕동흥에게 묻는다. "잘 생각해봤는가?"

 

왕동흥은 태도를 표명한다: "제가 보기에 형세가 급박해서 더 이상 늦출 수 없을 것같습니다. 결심을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섭검영은 즉시 이제는 패를 던져야 할 때이고 시기를 놓쳐서는 안되며, 병법은 빠른게 최고이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즉시 화국봉 동지를 찾아가서 얘기하자. . 신속히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10월 2일 오후와 저녁, 섭검영, 왕동흥은 각각 단독으로 화국봉이 거주하는 동교민항으로 간다. 화국봉의 사무실에서 어떻게 '사인방' 문제를 해결할지를 논의한다.

 

그날, 왕동흥은 당직을 서는 고성당비서를 통하여 중앙판공청 부주임 장요사(張耀祠), 당시 중앙경위국 부국장, 8341부대 정치위원인 무건화(武建華)등에게 중남해 남루 판공실의 회의에 참석하도록 통지한다. 그리고, '중앙이 이미 결심을 내렸다. 사인방에 대하여 행동을 취하여야 한다.'

 

당시 중앙판공청과 8341부대의 주요지도자들은 비록 '문화대혁명'의 극좌착오에 대하여 인식은 결핍되어 있었지만, 모택동의 지시는 일관되게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전에 '사인방'이 모주석의 질책을 받은 바 있고, 강청이 과거에 걸핏하면 신변에서 일하는 업무인원들을 '특무'로 몰아서 잔혹하게 박해했던데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모주석의 얼굴을 봐서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다.

 

모택동이 서거한 후, 중남해 안에 있는 중앙경위국의 고위간부들은 더더구나 강청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끼리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주석이 갔다. 우리는 이제 끝났다." 지금 새로운 중앙지도자가 이들을 잡으라면 임무를 내린다면, 그것은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사인방'의 멸망은 강청이라는 초기에 품성이 좋지 않고, 후기에는 심리적으로 변태적일정도로 의심이 많아 박해를 하다보니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이때 왕동흥은 중남해에서 경위를 책임지는 간무들에게 체포임무를 하달한다. 회의참석자들은 아주 흥분했다. 그들은 즉시 방안을 연구한다. 그리고 '사인방'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행동방안을 토론할 때, 몇 사람은 몇 가지 중요요소를 고려했다.

 

첫째는 '사인방'의 심리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당시, 장춘교는 고심을 거듭하여 '모택동선집'의 출판권을 손에 넣었다. 그는 일찌기 이흠으로 하여금 그에게 모택동선집5권의 출판상황을 보고하게 한 바 있다. 그리고 이흠에게 몇 몇 원고를 달라고 하여 살펴보았다. 장춘교는 모택동선집의 출판업무에 관심이 크므로, 만일 상무위원회의 회의내용을 '모택동선집5궈'의 출판문제로 한다면, 장춘교가 크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는 관례에 따라 일처리한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모택동선집의 출판문제를 논의하고, 특히 원고문제를 논의할 때 역대이래로 회인당(懷仁堂)의 정청(正廳)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중앙에 이런 규정이 있었다. 모택동선집의 원고관련되는 것은 중남해 이외의 곳으로 가져가서 연구할 수 없다. 이들 규정을 장춘교, 왕홍문도 잘 알고 있었다.

 

셋째는 모주석에 관련되는 중요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모주석기념당의 부지선정문제라고 하면, 상임위원은 반드시 참가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장춘교, 왕홍문이 핑계를 대고 참가하지 않거나 어떤 이유로 휴가를 신청하지도 못할 것이다.

 

넷째는 회인당에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리하다.

 

이 방안의 확정에서 '사인방'을 해결하는 순서를 이렇게 잡았다: 회인당에서 왕홍문과 장춘교 두 사람을 해결한 후, 차례대로 강청과 요문원을 처리한다. 모원신은 '사인방'과 구분하여 취급한다. 그에 대한 처리방법은 감호심사이다. 이 행동방안에서, 행동시간, 역량의 조직, 격리지점, 기밀보호조치, 예비방안 및 북경위수구와의 업무분담과 협조문제도 모두 구체적인 실시세칙을 만들었다.

 

이 행동방안의 연구와 제정은 10월 3일 새벽4시경이 되어서야 끝난다. 이날 저녁 9시, 정해진 시간에 왕동흥은 화국봉의 사무실로 가서 상세하게 구체적인 행동배치와 실시방안을 보고한다.

 

화국봉은 보고를 들은 후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제정한 행동방안을 들으니, 내 생각에 방법은 가능하겠다. 내 생각에 시간을 좀 더 앞당기면 좋겠다. 하루빨리 해결하는게 좋겠다" 그는 당부해서 말한다: "너는 다시 섭검영 원수와 얘기를 해봐라. 그에게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지 물어봐라. 만일 섭검영 원수가 이 곳으로 오면 내가 그와 얘기하겠다. 만일 섭원수가 너에게 가면, 네가 그와 얘기해라."

 

10월 4일 오후, 섭검영은 중남해 남루의 왕동흥 사무실로 간다. 소파에 앉아서 한편으로 차를 마시며, 한편으로 왕동흥의 보고를 들었다. 섭검영은 아주 자세히 들었다. 다 듣고나서 잠시 생각을 해본다음에 말했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계책이 다 완성되면 거사할 때 반드시 성공한다' '모의를 할 때는 기밀유지가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이 계책은 충분히 완성되었고, 안배도 주도면밀하다. 이 실시방안으로 집행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섭검영은 곧이어 당부했다: "당연히 기밀유지에 특별히 신경써야 한다.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한 역사적 사례는 너무나 많다. 동시에 경계도 엄밀히 해야 한다. 관련없는 인물은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반드시 이 관문을 잘 막아야 한다."

 

이날 저녁, 화국봉, 이선념(李先念), 오덕(吳德), 진석련(陳錫聯)은 국무원 소예당에서 영화를 본 후에 계속하여 회의를 진행했다. 화국봉은 '사인방'문제를 해결하는데 격리심사의 방식과 10월 6일에 손을 쓴다는 시기를 통보했다. 그리고 주요배치를 얘기했으며 참석자들은 일치하여 찬성한다. 그후, 그들은 다시 '사인방'의 북경내 두 심복인 지군, 사정의(謝靜誼)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연구한다.

 

당시 특별히 기밀유지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상해쪽의 문제도 있었다. 사인방은 단순히 닭잡을 힘조차 없는 문인에 불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상해와 기타 일부지역에 일부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북경에도 소수의 추종자가 있었다. 만일 조치가 주도면밀하지 않으면 유혈전투가 일어날 수 있었다. 당연히, 인민해방군의 강대한 역량이면 그들을 분쇄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국내에 전투가 발생하면 거대한 경제손실이 발생하고, 정치적으로도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긴다. 그러므로, 피를 흘리지 않고, 총을 쏘지 않는 방식으로 이 반혁명집단을 해결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정교하게 준비해야 했고, 돌연한 생동방식으로 '사인방'을 일망타진해야 했다.

 

이번 행동은 이미 당내투쟁의 범주를 벗어났다. 강청 일당이 고위직에 오른 자체가 당의 조직과 절차를 어긴 비정상적인 결과였다. 자연히 정상적인 당의 조직절차로 그것을 해결할 수는 업었다. 하물며 이들은 상해에서 '제2무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사인방'을 체포하는 것이다.

 

'사인방'을 분쇄하는 장거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때로부터, 결심을 내리고, 행동방안을 기획하는 모든 과정을 고도의 경계와 절대적인 기밀유지, 철의 기율로 진행되었다. 최고의사결정권자인 화국봉, 섭검영, 왕동흥도 기율에 따라 일처리를 했고, 모두 단독으로 움직여 직접 대면했고, 개별적으로 얘기했다. 이 기간동안 그들 세 명은 동시에 같이 만나서 얘기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