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설암14

성은이(盛恩頤): 민국제일패가자(民國第一敗家子)는 어떻게 패가망신하였는가? 작자: 미상 청말의 최고부자는 성선회(盛宣懷)이다. 그는 청나라말기의 관료이자 수재출신으로 양무파의 대표인물이다. 저명한 정치가, 기업가이며 자선가이다. 그리하여, "중국실업의 아버지" "중국상부(中國商父)", "중국고등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내용은 그가 호설암(胡雪巖)과 싸워서 이긴 것이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는 패가자를 하나 낳았다. 그것도 민국최대의 패가자를 그 패가망신한 아들의 이름은 성은이이다. 그는 당시 총리 손보기(孫寶琦)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도박에 탐닉하고, 호화사치하게 살아 하룻밤에 100채의 집을 날린 바 있다. 말년에는 더더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소주 유원(留園)은 성선회가 아들에게 준 개인주택이었다. 청나라말기,.. 2021. 12. 25.
사업을 하려면 호설암(胡雪巖)을 배우지 말고 장필사(張弼士)를 배워라 글: 정만군(程萬軍) 근세에 살았던 고대의 거상을 얘기하게 되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그 대명자자한 만청의 "홍정상인(紅頂商人)" 호설암일 것이다. 호설암은 확실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19세기 상반기에 청왕조 도광연간의 안휘의 가난뱅이의 아들로 태어났고, 공부를 많.. 2017. 10. 2.
호설암(胡雪巖): 어떻게 갑부가 되고 어떻게 망했는가? 글: 단목사향(端木賜香) 호광용(胡光鏞), 자(字)는 설암(雪巖), 휘주(徽州) 적계현(績溪縣) 사람. 어려서는 집안이 가난해서 겨우 2년간 서당에서 공부를 했을 뿐이다. 8살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소를 봐주었다. 13살때 주운 돈을 자신이 갖지 않고 돌려주면서 돈의 주인이자 대부잡량행(大阜.. 2014. 10. 2.
양내무소백채(楊乃武小白菜)사건: 청나라말기 정치판의 희생양 글: 재양다길(才讓多吉) "지금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조정에 민원을 제기하여, 조정에서 그 연유를 따져서 원래의 지방관아로 하여금 다시 심리하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민원인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원래 재판했던 관리들에게 박해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회적으.. 2014. 3. 2.
호설암 파산의 진정한 원인 글: 장학근(張學勤) 호설암은 1883년 12월초에 파산했다. 원인에 대하여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즉, 호설암은 서양인과 잠사무역전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말기 진대경(陳代卿)이 쓴 <신절재문존(愼節齋文存)>에 따르면, "호설암은 매년 생사를 켜기전이 미리 사두.. 2013. 10. 13.
호설암(胡雪巖): 황음하고 간사한 홍정상인(紅頂商人) 글: 왕묘지(王淼之) 호설암은 청말의 유명한 휘상(徽商, 휘주상인)이다. 많은 패스트푸트식 책에서 그는 경상능력이 있으며 처세철학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가려면 증국번을 배우고, 장사를 하려면 호설암을 배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호설.. 2013. 9. 14.
만청상인(晩淸商人)의 세 가지 경지 글: 오구(吳鉤) 만일 지명도가 높은 만청상인(만청은 청나라말기를 가리킴)을 꼽는다면 필자는 호설암(胡雪巖), 성선회(盛宣懷) 및 장건(張謇)의 세 사람을 꼽을 것이다. 호설암(1823-1885)은 사료기록은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과 TV드라마 <홍정상인>의 영향으로, 호설암의 이름.. 2012. 12. 22.
호설암(胡雪巖): 그저 황음한 졸부였다 글: 왕위(王偉) 호설암(1823-1885)의 이름은 광용(光鏞)이고 자가 설암이다. 안휘 적계(績溪)사람이며 호경여당(胡慶餘堂)의 창시자이다. 그는 빈한한 출신으로 장사에 재능이 있었고, 처세술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일대의 거상으로 불리웠다. 서태후는 그에게 황마괘(黃馬褂)를 내리고 “포정사.. 2010. 12. 24.
백규(白圭): 중국상인의 비조 글: 유계흥(劉繼興) 상(商)나라때부터 청나라말기까지, 중국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나타났다. 그중 학계에서 상성(商聖)으로 공인된 사람은 오직 3명 뿐이다: 도주공(陶朱公), 백규(白圭) 그리고 호광용(胡光鏞) 도주공은 바로 범려이다. 호광용은 호설암이다. 이 두 사람의 사적은 모두 낯.. 2010. 3. 20.
호설암(胡雪巖)의 자손들 글: 장영구(張永久) 호설암은 생전에 처첩을 아주 많이 두었고, 구체적으로 몇명인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13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남5녀의 자식을 두었다. 장남 호초삼(胡楚三)은 16세때 늠생(廩生)이 되었는데, 19세때 병으로 요절하고, 자손을 두지 못했다. 차남 호함.. 2009.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