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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사업을 하려면 호설암(胡雪巖)을 배우지 말고 장필사(張弼士)를 배워라

by 중은우시 2017. 10. 2.

글: 정만군(程萬軍)


근세에 살았던 고대의 거상을 얘기하게 되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그 대명자자한 만청의 "홍정상인(紅頂商人)" 호설암일 것이다.


호설암은 확실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19세기 상반기에 청왕조 도광연간의 안휘의 가난뱅이의 아들로 태어났고, 공부를 많이하지도 못했으며, 그저 자신의 맨손과 머리에 의지하여 반생을 노력하여 만청의 이품관리가 되고 전국최고부자가 되었으니 실로 보통은 아니다. 후세 중국상인들의 우상이 될 만하다.


후인들이 호설암을 선망하는 것은 그가 흑백을 모조리 다 먹었고, 권력과 돈을 한 손에 움켜쥐었으며, 처첩이 후원에 가득했음에도 잘 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최후를 선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82년, 60세의 호설암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사업은 파산했으며,청나라조정은 "삭탈관직이 재산몰수"를 선언했다. 돈도 없고, 관직도 날라갔다. 3년후, 호설암은 가난과 질병으로 죽고 만다 향년 63세이다.


호설암의 도산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회(湘淮, 호남과 안휘) 양파투쟁의 결과로 보인다. 호설암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홍장(李鴻章)의 "배좌선배호(排左先排胡), 도좌선도호(倒左先倒胡)"(좌종당을 밀어내려면 호설암을 먼저 밀어내야 하고, 좌종당을 무너뜨리려면 호설암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는 전략의 희생자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조정의 "호설암버리기"는 필연의 결과이다. 만일 서태후가 "호설암을 보호"하려 했다면, 그까짓 회파나 당당한 이홍장이라도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호설암의 비극적인 움녕은 시대적인 요소 외에 개인적인 요소도 있다. 더욱 심층적으로는 개인자질을 보아야 한다. 호설암은 단지 봉건의 표찰을 붙이고 있는 상인이다. 그는 돈은 벌었지만 어질지 못했으며, 노안미골(奴顔媚骨)로 독립적인 인격이 없었다. 더더구나 자유사상은 없었다. "근대상인"의 특질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대상인"의 특질인가. 이런 상인의 운명은 또 어떠했는가? 우리는 그런 인물을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장필사. 광동인으로 본명은 진훈(振勛)이고 호가 필사이다. 1841년생으로 호설암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어린 시절을 인생경력은 호설암과 유사하다. 가난한 아이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모두 자기 혼자의 힘으로 개척해 나갔다. 성공한 후에는 역시 '최고부자'의 실력으로, 관료로서의 직급은 호설암보다도 한 단계 높았다. 1품관리였다.


출신도 유사하고, 경력도 유사하다. 다만 장필사의 마지막은 호설암과 크게 달랐다.


우리는 알고 있다. 호설암의 인생 최후 3년은 아주 처참했다는 것을 기근과 추위로 죽을 때는 겨우 자손만 곁을 지켰다. 죽은 후에도 서둘러 염을 한 후 제대로된 관목도 구하지 못하고 항주 서쪽 교외의 돌무더기 속에 묻었다.


그러나 장필사는 1916년 서거할 때, 호설암과는 천지차이가 있는 무한한 영예를 누렸다.


영구가 도착하는 곳에는 각지의 행정장관들이 친히 조문했고, 정부는 그를 위하여 반기를 게양했다.


같은 홍정상인인데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호설암과 마찬가지로, 장필사의 성공에도 정치라는 두 글자는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서태후를 만났을 때조차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누렸던 이 전설적인 상인은 그의 평생동안의 사업생애에서, 계속 정치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한때 최고로 잘나가던 '홍정상인'이었다. 관료로서도 흠명1품정대, 광록대부에서 월한철로총판, 불산철로총판을 지낸다. 그의 관직은 하나 하나 추가되었고, 호설암보다도 훨씬 잘나갔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잘나가게 되면 조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왜 그는 버려지지 않고, "호설암식 최후"를 비켜갈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오묘한 점이 있다.


첫번째 오묘함은 근거지를 두는 위치이다. 호설암의 근거지는 내지였다. 그러나 장필사의 근거지는 해외였다. 


장필사의 사업의 '큰 부분'은 중국내지에서 온다. 그러나 그는 회사본부를 동남아에 두었다.


청나라정부의 앞에서 그는 "남양부호"의 면목으로 나타난다. 이 '외국'신분은 그로 하여금 '외국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외국에 아부하고 추종하던' 만청정부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그리고 자신감 넘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1890년, 청나라의 상해도대 공조원(龔照瑗)은 명을 받아 구미로 시찰을 떠난다. 도중에 말레이시아의 페낭을 들르는데 주동적으로 "남양부호" 장필사를 찾아가 "부국의 도리"에 대하여 묻는다. 장필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여 공조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귀국후 공조원은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장필사를 극력 추천한다. 이홍장은 그리하여 장필사를 접견하는데, 장필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드러낸다. 이홍장은 크게 기뻐한다. 장필사의 "재부와 도략"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며, 청나라조정에 주청을 드려, 장필사를 페낭의 제1대 영사 및 싱가포르 총영사로 임명한다. 이때부터 장필사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관직을 가지면서 해외에서 자유롭게 사업에 종사하는 홍정상인이 된다.


해외신분으로 장필사가 받은 조정내에서의 존중과 대우는 국내의 상인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1894년, 장필사는 장유(張裕)양조회사를 만든다. 이홍장은 친히 내지에 설립하도록 허가한다. "양주"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장유회사는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신비로웠다. 이홍장은 장유회사의 설립등을 적극 지원했고, '북양신정'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된다. 사료에 따르면, 이홍장은 장필사의 가족을 특별히 보살핀다. 장필사의 조카인 장성경(張成卿)은 장유의 제1대 총경리인데, 매번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을 만날 때 문앞에서 기다릴 필요없이 바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집안사람처럼 담소를 나누어,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리고 청나라의 실제 최고통치자였던 서태후도 '양상(洋商)" 장필사를 달리 대우해주었다. 사료에 따르면, 서태후의 앞에서, 장필사는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를 생략하게 해주주었다. 이런 대우는 호설암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외의 신분으로 내지에서는 높이 대우받다보니 장필사의 사업도 흥성했다. 청나라정부에서 오는 관청의 주문도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관직과 작위가 덧붙여지는 것도 계속되었다.


이는 바로 그의 첫번째 호설암보다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번째이다. 바로 정견(政見)이다.


승관발재(昇官發財), 일반상인이 장필사와 같은 정도가 되면, 이미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장필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큰 사업의 이익을 추구할 뿐아니라, 정치의 뜻도 가지고 있었다.


이 정치의 뜻은 용속적으로 이해하는 고관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큰 방향과 맞추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장필사는 비록 호설암과 같은 관직을 받은 상인이지만, 그의 정치적 안목은 호설암보다 훨씬 시대를 앞서갔다. 호설암은 관료로서 그저 큰 인물을 꽉 붙잡을 줄 아는 속된 견해를 지닌 상인이고, 근본적으로 국가정치방향을 읽는 안목은 없었다. 그러나 장필사는 국내에서 여러 해동안 모색하면서 일찌감치 혜안을 가졌다. 그리하여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갖는다. 그리하여 조정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이런 꿈은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부패한 정부는 오랫동안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주동적으로 변화를 구했다. 


1911년 5월, 청나라정부는 "철로국유"정책을 발표한다. 철로를 경영하던 상인은 하룻밤만에 강제로 철로를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된다. 비록 장필사의 사업은 철로와 관계가 없었지만, 그는 국가의 전도를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보로행동에 나선다. 그는 조정에 계속 상소를 올렸을 뿐아니라, 철로국유는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장필사는 청나라조정의 본색을 깨닫게 되고, 봉건왕조의 부패와 탐욕이 어떠한지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동적으로 나서서 청나라조정과 결별하고, 손중산의 동맹회를 지지한다. 


장필사는 암중으로 아들 장철군(張鐵君)을 동맹회에 가입시킨다. 그리고 손중산에게 30만냥백은을 활동경비로 지원한다. 그리고 남양에 소속된 각 기업은 해외활동하는 혁명당인들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장필사는 스스로 나서서 혁명의 '재정관'이 된다. 혁명이 중요한 순간에 처했을 때, 장필사는 남양중화상회의 명의로 군중의 모금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명의로 거액을 기부한다. 신해혁명후, 계속하여 남방군민은 7만원을 출연한다.


정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장필사는 더욱 긴 정치생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장필사는 전후로 총통부고문, 입법회의원, 참정원참정, 전국상회연합회회장, 남양선무사등의 직위를 가진다. 이는 조대교체시기에 있기 힘든 기적이다.


1885년 호설암이 조정으로부터 삭탈관직과 재산몰수를 당하여 자신의 일생을 처참하게 끝낼 때, 장필사는 인생과 사업의 최고봉에 오른다. 장필사가 1916년 서거할 때 관민의 융중한 애도를 받는다. 중화민국의 건국아버지인 손중산도 장필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손중산은 특히 대표를 보내어 만련(挽聯)을 보내는데, "괴걸(怪傑)" "천고(千古)"라는 말을 쓴다.


"괴걸영득인심(怪傑赢得人心), 유방천고(流芳千古)"


같은 홍정상인이면서 장필사와 호설암 두 사람의 결말은 전혀 달랐다. 그렇다면 장칠사는 호설암보다 어떤 방면에서 더 고명했을까?


반드시 봐야할 것은, 이는 개인의 성장경력과 소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장필사는 비록 광동에서 태어났지만, 청소년기에 남양(동남아)로 가서 활동한다. 그는 오랫동안 국외에서 다원사상문화의 훈도를 받는다. 그리하여 실업을 진흥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세운다. 그는 청나라조정과 협력했다. 청왕조의 봉건통치에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독립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호설암이 한 모든 것은, 그저 전통 사대부와 부호상인의 꿈일 뿐이다. 조정에 빌붙어서 영화부귀를 누리려 했다. 그래서, 같은 시대의 장필사와 비교하자면, 호설암은 당연히 부족하다. 자주성이 없었을 뿐아니라 세계대세를 몰랐다.


사업을 하려면 호설암을 배우지 말고, 장필사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