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청말의 최고부자는 성선회(盛宣懷)이다. 그는 청나라말기의 관료이자 수재출신으로 양무파의 대표인물이다. 저명한 정치가, 기업가이며 자선가이다. 그리하여, "중국실업의 아버지" "중국상부(中國商父)", "중국고등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내용은 그가 호설암(胡雪巖)과 싸워서 이긴 것이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는 패가자를 하나 낳았다. 그것도 민국최대의 패가자를 그 패가망신한 아들의 이름은 성은이이다. 그는 당시 총리 손보기(孫寶琦)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도박에 탐닉하고, 호화사치하게 살아 하룻밤에 100채의 집을 날린 바 있다. 말년에는 더더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소주 유원(留園)은 성선회가 아들에게 준 개인주택이었다.
청나라말기, 공업이 신속히 발전하고, 중국에는 두 명의 거부가 탄생한다. 한 명은 '홍정상인(紅頂商人)'이라 불리는 호설암이고, 다른 한명은 '중국실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선회이다. 이 양대가족은 거의 모든 국가의 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쟁은 어느 곳에서나 계속되었고, 이홍장(李鴻章)의 지지를 받아 성선회는 결국 좌종당(左宗棠)의 지지를 받은 호설암을 무너뜨린다. 그후 성선회에게 청말에 이미 적수가 없었고, 사업은 순풍을 탔다. 거대한 가족의 부를 창조했을 뿐아니라, 더더욱 11개의 "중국제일"기록을 갖게 된다.
성선회는 사업이 컸지만, 자식은 많이 낳지 못한다. 성선회는 일생동안 3명의 부인을 취하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은 결국 아들 성은이 뿐이었다. 이 아들은 그리하여 총애를 한몸에 받고, 어려서부터 '돈'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집안에서는 모두 만족시켜 주었다. '중국사대명원'으로 불리는 소주의 유원은 바로 성선회가 아들에게 사준 개인주택이다. 이를 보면 당시 이 아들을 성선회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사업을 오랫동안 해온 성선회가 '부귀전가, 불과삼대(富貴傳家, 不過三代)'의 이치를 모를 리는 없다. 그리하여 나중에 성씨집안의 상업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에 대하여 그는 마음을 쏟아 배양한다.
민국초기, 성은이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하여, 성선회는 그를 영국 런던대학과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두 명문대학에 유학보낸다. 성선회가 보기에, 서방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사숙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한번 국외로 나가자, 어려서부터 사랑만 받아온 성은이가 어찌 머리싸매고 공부에 매진할 것인가.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여러가지 나쁜 습관을 익히게 된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도박을 배우게 된다. 완전히 패가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보기에 인생은 유한하고, 부는 영원히 다 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어찌 '시간'을 공부하는데 낭비하겠는가.
1916년, 성선회가 상해에서 병사한다. 그의 생전유언에 따라, 절반의 부는 자선기금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 나머지 절반은 가족에게 남긴다.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성씨집안의 재산은 부가적국(富可敵國)이라 할 만했다. 하물며 계속 돈을 버는 회사들이 모두 성씨집안의 손아귀에 있었다. 성씨집안의 재산은 모두 성은이의 손에 쥐어졌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버지이다. 병상에 누운 성선회가 자식은 이 가업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저 아들이 나중에 발분도강(發憤圖强)해주길 바랄 뿐이다.
임종전에, 성선회는 아들을 곁으로 불러서 재삼 가업을 잘 이어받아 빛내줄 것을 당부한다. 절대로 집안재산을 탕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일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아들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성선회가 후회하였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다만 만일 그가 성은이가 나중에 한 행동을 알았다면 분명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24살의 성은이가 한야평(漢冶萍)회사의 총경리가 된다.
성선회가 죽은 후, 나이 겨우 24살의 성은이가 한야평회사의 총경리를 맡게 된다. 이는 한양철창(漢陽鐵廠), 대야철광(大冶鐵鑛), 평향매광(萍鄕煤鑛)을 합친 사업체였다.
이렇게 거대한 사업체를 경영하려면 성은이는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막 취임한 그는 노는데만 신경쓰고 회사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모친인 장부인(莊夫人)이 엄하게 혼내면서 성은이는 회사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착실하게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아편을 피우면서 문서를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문건을 보는 것은 그저 모친이 독촉하기 때문이고, 그저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그가 원하는 생활이었다. 성은이의 호화사치 정도는 당시 상해에서도 유명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은이는 상해에서 당시 최초로 벤츠를 구매한다. 나중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자동차를 순은으로 도금해 버린다. 그는 집안에서 넷째였기 때문에 성은이는 특별히 차번호를"4444"로 하였다. 이 번호를 단 차를 보면 사람들은 모두 성씨집안의 넷째어른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도박에 빠지다.
그외에, 성씨집안의 독자로서 부친이 생전에 성은이의 혼처는 정해두었다. 그리고 북양정부 총리 손보기의 딸을 부인으로 취한다. 그러나 그는 바깥에 여러 첩을 두었다. 그리고 그는 첩들에게 돈을 많이 썼다. 모두에게 서양식의 정원이 딸린 집과 승용차를 사주는 외에, 운전기사, 요리사, 일꾼들까지 배치해주었다.
성은이는 매일 밤마다 등홍주록(燈紅酒綠), 지취금미(紙醉金迷)의 생활을 보냈다. 낮에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잔다. 당시 막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송자문(宋子文)이 소개를 받아 성은이의 영문비서가 된다. 어떤 때는 성은이에게 결재서류의 서명을 받기 위해 부득이 성은이의 집에서 반나절을 기다리곤 했다.
확실히 이런 것은 단순히 "금조유주금조취(今朝有酒今朝醉)"의 가치관이 아니다. 그냥 하나의 인생태도이다. 내 재산을 내가 쓰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고, 내가 즐거우면 된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생활태도가 옳은지는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일을 절대로 옳고 절대로 그른 일로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이 습관화된 성은이에게 생각하는 것처럼 즐거움이 오지 않은 것같다. 그래서 그는 더욱 자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쾌락을 즐긴다. 그것은 도박이었다. 알아야할 것은 도박은 일종의 간단한 '오락'방식이 아니라, 끝이 없는 '감각자극'이라는 것이다.
성은이가 보기에 자신이 성씨집안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복이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할 것이었다. 그리고 도박은 완전히 '운'에 의존하는 것이니, 자신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당연히 다 딸 수 있는 것이다.
도박장에서의 씀씀이와 비교하면, 성은이가 물질생활에서의 호화사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맹목적인 자신감은 매일매일 그에게 손해를 남겼다.
만일 물질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성씨집안에 있어서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은 성씨집안의 정식몰락을 가져오는 시작이 된다. 도박장에서의 친구는 이렇게 회고한다: "성은이는 낮에 자고, 매일 오후 4,5시가 되면 일어난다. 일어난 후에 하는 첫번째 일은 그날의 도박자금을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도박꾼에 있어서, 만일 현실의 타격이 없으면,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갈수록 크게 도박을 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성은이에 있어서 더더욱 그러했다. 돈을 잃는 것은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따는 것은 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많이 따면 딸수록 쾌락은 커지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타파하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도박장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성은이에 있어서 누군가 받아주기만 한다면 그로서는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상해탄 역사상 최대의 도박판이 벌어지게 된다.
설사 집안재산이 만관에 이르더라도 써버리는 것은 일순간의 일이다.
자고이래, 중국은 부호가 많았고, 부호집안에는 '패가자'가 빠지지 않았다. 성은이가 상대한 적수는 절강총독 노영상(盧永祥)의 아들 노소가(盧小嘉)이다.
한번은 친구들 모임에서 성은이는 노소가를 만난다.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부잣집 아들이었고, 손님접대에 쓰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상해에서 성은이는 그 누구도 자신보다 돈을 많이쓰는 사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이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노소가가 양주 1병을 따면, 성은이는 10병을 땄다. 노소가가 무녀 1명에게 1천위안의 팁을 주면, 성은이는 1만위안을 주었다.
군벌의 아들로서 노소가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이렇게 주고 받으면서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 했다. 노소가는 성은이가 학식도 없고 재주도 없으면서 그저 돈만 쓸 줄아는 멍청이라고 조롱한다. 이 말은 듣기좋은 말이 아니긴 하지면 그래도 모두 사실이었다. 성은이는 바로 그런 '멍청이'가 아닌가. 그러나 그가 어찌 이 모욕을 참고 넘기겠는가? 쌍방의 다툼은 갈수록 커진다.
결국 노소가가 제안한다. 배짱이 있으면 크게 도박을 한판 하자고. 만일 못하겠다면 진 거라고 알겠다. 이런 도발에 성선회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기백을 보여주기 위해 두 사람은 집안의 재산을 모조리 도박판에 올린다. 보통의 도박과는 다르게, 그들은 도박장주인에게 지도 2개를 꺼내게 해서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걸었다. 그 장면은 실로 보는 사람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노소가는 강소절강일대의 논밭과 부동산을 하나로 묶었고, 성선이는 상해 북경로, 황하로 일대의 100여채의 주택을 도박으로 걸었다. 이런 도박판은 일반인에게 있어서 그럴 담량은 물론이고,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도박을 하면 가산을 탕진한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런 이치이다. 도박꾼들이 도박판에 무엇을 거는지를 영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집안재산이 엄청나게 많다고 하더라도, 날려버리는 것은 일순간이다. 열명의 도박꾼중에서 아홉명이 잃는다는 것이 헛소리는 아니다. 성은이는 일거에 이 100여채의 번화한 지역의 부동산을 날려버린다. 아무리 황당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 부동산의 가치는 알았을 것이다. 다음 날 정신이 돌아온 성선이는 비록 후회막심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도박을 했고 진 것이니. 만일 이들 부동산을 상대방에게 명의이전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상해탄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성선이는 꾹 참고 재산을 넘겨준다. 그러나 더 많이 잃을수록 더 많이 따고 싶어진다. 이때의 그는 회사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어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성선이가 이런 식으로 재산을 탕진한다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곧 다 날려버릴 것이라고. 항전발발후, 공장은 묻은 닫고, 물가는 올랐다. 성은이는 단지 도박판의 승패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항전이 끝나기전에, 성씨집안의 재산은 이미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 그의 곁에 몰려들던 친구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박자금이 떨어지니, 그는 집안의 골동품을 팔아서 겨우 생활한다. 옛날의 전국최고부자, 상해최고자본가가 지금은 이런 지경으로 전락한 것이니 실로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사유재산에는 높은 지세를 매긴다. 수중에 몇 남아 있던 부동산도 성선이는 세금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중공정부에 넘기고 만다.
만일 소쥬유원에 성씨집안의 사당을 설치해두어서 중공정부에서 잠시 거두어가지 않은게 아니었다면, 성선이는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을 것이다. 나중에 성선이는 더 이상 도박장을 드나들지 못하게 되는게, 그것은 그가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도박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자식은 이미 떠났고, 친구들도 그를 전염병 보듯이 피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와 계속 교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홍장의 손자인 이후보(李厚甫)뿐이었다. 이런 말이 있다. 물이류취(物以類聚), 인이군분(人以群分). 즉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다. 이후보도 유명한 몰락한 패가자였다. 하루는 성은이와 이후보가 길거리를 걷다가 공원입구에 도착한다. 들어가서 쉬고 싶었는데,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보아도 입장표 하나를 살 수 없었다.
누가 생각했겠는가? 예전의 정계거물과 전국최고부자의 후손이 이런 지경에 처할 줄을. 이런 천양지차의 배후에는 겨우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1958년, 일도 할 줄 모르고, 돈도 없었던 성은이는 유원의 문간방에서 굶어죽는다. 비참히게 66년의 황당한 인생을 끝마친 것이다. 아마도 죽기 전에, 성은이는 자신의 일생을 반성했을지도 모른다. 안했을 수도 있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비량말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 부호자제가 어찌 이렇게 빠르게 패망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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