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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양내무소백채(楊乃武小白菜)사건: 청나라말기 정치판의 희생양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재양다길(才讓多吉) 

 

 

 

"지금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조정에 민원을 제기하여, 조정에서 그 연유를 따져서 원래의 지방관아로 하여금 다시 심리하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민원인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원래 재판했던 관리들에게 박해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회적으로 상급기관에 민원을 제기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1874년(청나라 동치13년) 12월 2일자 상해 <신보(申報)>에 실린 <논여항현안(論餘杭縣案)>에 나오는 말이다. <신보>에서 언급된 '여항안'이라는 것은 바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양내무소백채사건'이다. 이 글에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것은 양내무의 누나인 양국정(楊菊貞)과 처인 첨채봉(詹彩鳳)을 말한다.

 

양내무의 집안은 대대로 절강성 여항현 성내의 징정항구(澄靜巷口)에 살았고, 20여세에 수재(秀才)가 되었으며, 사건이 발생한 그 해 8월에 거인(擧人)이 되었다. 이제 관료사회에 발을 절반쯤 들여놓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직위로 따지면 정협위원이 된 셈이다. 청나라말기 난세에 태어난 양내무는 기개가 있는 문인이었다. 평소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보면 그는 줄곧 나섰고, 관상결탁이나 평민을 괴롭히는 일에 대하여는 가요를 만들어 조롱하기도 했다. "비방하는 시를 자주 짓고 관청을 비방한다"는 것이 여항지현 유석동(劉錫彤)의 그에 대한 평가였다.

 

양내무의 집안은 양잠을 가업으로 했고, 3층짜리 작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이 거주하는 외에 1칸은 "도시로 일하러 들어온" 갈품련(葛品蓮)과 처 필수고(畢秀姑)에게 임대해주었다. 필수고는 나이 18살로 하얀 윗옷에 녹색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백채(小白蔡, 배추)"라고 불렀다. 소백채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양내무 부부가 그녀를 모두 좋아했다. 식사를 준비하면 자주 그녀를 불러서 같이 먹곤 했다. 이렇게 오가다보니, 시간이 날 때 양내무는 '소백채'에게 글을 가르쳐서 불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인생의 이야기는 그렇다. 누구도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를 모른다. 오가면서 누구의 신경을 건드릴지도 알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범한 이 가정의 교분이 나중에 두 사람의 운명 그리고 청나라말기의 정치국면을 뒤흔들게 된다.

 

1873년 10월, 소백채의 남편인 갈품련이 유화풍증(流火瘋症)으로 초구일에 급사한다. 소백채의 시어머니는 현관아로 가서 '아들이 비명에 죽었다'고 호소한다. 지현인 유석동은 엉터리 검시절차를 거친 후, 갈품련이 비상중독으로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독을 넣은 사람은 자연히 소백채이다. 이 어린 부인이 아무 이유없이 남편을 독살했다고 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외간남자와 간통'을 해야지만 시정의 소문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에 관청을 비방하던 양내무가 지현 유석동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멀쩡한 거인이 하루종일 어린 부인에게 글을 가르치고 불경을 읽게 하다니, 그것은 분명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것이고 사사로운 정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천년이래로 내려오던 주심지법(誅心之法, 나쁜 마음을 먹는 것을 벌한다는 것)과 자백을 중시하고, 증거를 경시하던 사법제도는 여기에서 완벽하게 결합한다. 청말의 재판제도는 지현 유석동에게 증거를 내놓고, 증거를 확정하고, 기소를 하고, 재판을 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부여했다. 이때 그가 마음만 먹으면 가볍게 조정을 조롱하던 양내무에게 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초심때, 양내무는 자백하지 않는다. 지현 유석동은 그러나 사실이 분명하다고 여겨, 항주지부(杭州知府) 진로(陳魯)에게 결정하도록 요청한다. 진로는 군인출신의 지방관이어서 독서인들을 무시하여왔다. 그리고 양내무가 시를 써서 조정을 비방 조롱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엄히 처벌하여 일벌백계로 삼고자 하였다. 조정을 비판하고 조롱하던 양내무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여항의 진흙탕을 나오자, 항주의 혹형을 당하게 될 줄이야. 그로서는 전혀 항거할 힘이 없었다.

 

청나라말기 관리의 자신은 대부분 허장성세, 음험 및 폭력에서 나왔다. 진로가 제1차로 심리하면서 궤정판(跪釘板), 궤화전(跪火磚), 상협곤(上夾棍)등 각종 혹형을 써서 양내무는 마침내 자백하게 된다. 뜻을 이룬 진로는 기분이 좋아져서 사건기록에 이렇게 쓴다. 법률에 따라, "갈필씨(葛畢氏)는 능지처참하고, " "양내무는 참입결(斬立決)하라". 새로 거인이 된 사람이 민녀와 간통을 하고, 그녀의 남편을 독살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판결이 나자 전체 성이 들썩였다. 일부 관부에 출입하는 막료들은 엄정한 투로 입을 모아 양내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얘기하며 하루빨리 날을 잡아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막 창립한 <신보>는 1874년 1월 6일 <기여향모생인간살모명사세정>이라는 제목으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한 풍류 '간살'사건을 다루었다.

 

그때는, 영국상인 미사(美査)가 <신보>를 창업한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때였다. 청나라라는 이 오래되고 쇠약한 관료체제는 아직 새로운 매체의 역량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보>는 완전히 자유로운 발전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외에 미사가 고용한 중국인은 모두 서방사조의 영향을 받은 지식분자들이었다. 그들은 신문의 주요한 효능은 정부를 감독하고 백성을 깨우치는데 있다고 보았다. <신보>는 양내무사건의 '풍류'에 개입하였으나, 나중에는 여론감독으로 끝맺는다.

 

백성들의 지식이 아직 깨우쳐있지 않았으므로 양내무는 비록 협의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관료부패와 정치암흑을 통찰할 능력은 없는 서생이었다. 천년이래 수많은 충열과 원혼이 모두 아무런 인간성이 없는 사법제도에 희생되어 왔다. 그는 여전히 북경으로 민원을 제기하는데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옥중에서, 그는 만자에 이르는 자변소장을 작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누나와 처로 하여금 등에 황방(黃榜, 寃單)을 매고, 두 달에 걸쳐 경성으로 가서, 도찰원아문에 공소하게 하였다.

 

법률에 따라, 도찰원아문도 사건내용을 묻지 않고, 직접 사람을 보내어 '상방자(上訪者)'를 원적으로 압송해 돌려보내고, 지방에서 다시 심리하도록 넘겼다. 간통한 사건당사자가 감히 상방까지 하다니, 지방관리들은 양내무, 소백채에 대하여 더욱 혹형을 가하고, 원판결을 유지한다. 이처럼 황당한 사법체계에 대하여, <신보>는 이 글 처음에 나오는 그런 글을 싣게 된 것이다. 사회여론이 바뀌어, 두 사람이 양내무사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 사람은 정우(丁憂, 부모친상)을 마치고 북경으로 복직한 하동선(夏同善)이고, 또 한사람은 홍정상인(紅頂商人) 호설암(胡雪巖)이다. 호설암은 양씨집안이 두 버에 걸쳐 '상방'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하동선은 북경에서 같은 당의 관리글과 연락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 작은 지방의 한 보통사람의 억울한 사건이 중앙과 지방의 권력투쟁으로 변질하여, 조정의 당료들간에 긴말하게 연락하기 시작한다.

 

광서제의 스승인 옹동화(翁同龢)는 증국번 및 이홍장과 원래부터 사사로운 원한이 있었다. '양내무와 소백채'사건을 최종결정한 절강순무 양창준(楊昌濬)은 마침 증국번의 심복이며, 좌종당의 적계였다. 하동선은 양내무의 누나를 데리고 절강출신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보군통령아문, 형부, 도찰원에 원장(寃狀)을 제출한 후 다시 옹동화에게 부탁하여, 양내무사건을 양궁태후에게 보고하고, 서태후에게 유지를 내려 재심하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

 

서태후의 유지와 절강출신관리들의 유세로 양내무의 누나는 아역(衙役)에게 압송되어 절강으로 돌려보내어지지 않게 된다. 절강순무 양창준도 이 사건을 감히 여항을 돌려보내어 재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호주지부 허요광(許瑤光)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한다. 서태후가 유서를 내려 이 사건을 재심하도록 하였으므로 허요광은 감히 혹형을 쓰지 못한다. 양내무와 소백채는 기존의 자백을 모조리 뒤집는다. 민구활어리(民苟活於吏), 리구활어관(吏苟活於官), 관구활어제(官苟活於帝)의 청나라말기사회의 암흑과 적폐로 직접상사인 양창준이 판결한 사건에 대하여 허요광은 심리는 바쳤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시간만 끌게 된다.

 

당파지쟁과 전쟁으로 양내무사건은 계속하여 끌기만 하고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북경의 '번안(飜案)'파는 그 비밀을 잘 알았다. 대치하는 과정에서 어떤 관리를 상소를 올려 다른 대신을 절강으로 보내어 이 사건을 심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절강학정'의 직위를 겸직하고 있던 예부시랑 호서란(胡瑞瀾)이 이 사건을 심리하도록 파견하도록 결정된다. 관료사회규칙을 잘 아는 호서란은 순무가 결정한 사건은 억울하든 아니든 쉽게 되집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다른 고관을 보내달라고 주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러설 길이 없는 호서란은 양내무의 심리에 1번만 참석하고는 후속의 일을 영파지부 변보성(邊葆誠)에게 넘겨서 완성하게 한다. 변보성은 유석동의 인척이다. 또한 양창준과는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래서 양내무와 소백채를 다시 한번 불러서 고문을 하고 밤낮으로 심문한다. 양내무는 마지막 심리때 두 다리가 부러진다. 소백채는 구리철사로 유두를 지지는 고문을 당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시 자백한다. 호서란은 원래의 죄명대로 사건을 마무리짓는다.

 

호서란이 이렇게 사건을 마무리지은 것은 양창준이 지방에서 세력이 있고, 많은 뇌물을 주었을 뿐아니라, 그가 생각하기로 서태후가 지방관리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도 그저 과정만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천년이래로 어느 왕후장상이 한 말 중에 거짓말이 아니고, 헛소리가 아닌 것이 있었는가?

 

과거와 조정활동을 책임지는 호서란은 잘 몰랐다. 태평천국이후, 봉강대리인 증국번, 좌종당, 정보정의 권력이 커지고, 조정의 권력이 약해져서 서태후가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중앙에서는 '위신을 세우고 싶어했다.' 관료사회의 '안정유지'와 개인의 '선악'은 모두 중앙의 통일적인 지휘를 받기를 원했다. 양내무와 소백채가 '간통'했는지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중앙에서 필요하면 있어야 하고, 필요없으면 없어야 했다. 서태후의 곁에서 있던 옹동화는 자연히 호서란보다 중앙의 의도를 잘 이해했다.

 

이에 기하여, 옹동화는 한림원 편수 장가양, 하동선, 변보천, 왕흔등 강소,절강파 관리들과 연합하여 이 사건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북경으로 가져와서 재심하자고 요구한 것이다. 조정은 연이어 13번의 유지를 내려, 재판이 끝난 양내무와 소백채 사건에 간여하고, 두 사람은 경성으로 압송된다. 1876년(광서2년) 12월 9일, 형부상서 상춘영(桑春榮)은 친히 심리를 한 후 조양문 해회사에서 관을 열어 검시한다. 그리고는 원판결을 철저히 뒤집는다. 형사판결이 끝나자 이제 정치적인 심판이 시작된다. 절강순무 양창성을 위시한 300여명의 관리중 30여명이 삭탈관직되거나 군대로 보내어지거나 몰수당한다. 150여명의 6품이상관리는 정대화령을 삭탈당하고 영원히 다시 기용되지 않는 처벌을 내린다.

 

이 사건을 다시 한번 조용히 되집어보면, 마음 속으로 전율이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매체 <신보>의 여론감독역량에 감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보>가 정치대결의 도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곧 멸망할 청나라말기의 난세에, 개인의 운명은 바둑돌 하나와 같다. 권력자가 마음대로 놓을 수 있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은 무상하지만, 정치대결은 영원하다. '영원히 기용되지 않는' 처벌을 받은 양창준은 1년후에 다시 기용된다. 그리고 관직이 조운총독, 민절총독에 이른다. 양창준, 호서린, 유석동이 양내무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건이 뒤집혀지고 양내무는 거인신분을 회복하지 못한다. 청나라가 무너진 1914년 여항에서 사망한다. 소백채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도록 판결받았고, 법명은 혜정(慧定)이라 한다. 1930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