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호설암)

호설암 파산의 진정한 원인

중은우시 2013. 10. 13. 17:23

글: 장학근(張學勤)

 

 

 

호설암은 1883년 12월초에 파산했다. 원인에 대하여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즉, 호설암은 서양인과 잠사무역전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말기 진대경(陳代卿)이 쓴 <신절재문존(愼節齋文存)>에 따르면, "호설암은 매년 생사를 켜기전이 미리 사두었고, 서양인들은 호설암으로부터 생사를 하나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설암을 아주 미워했다. 그래서 1년간 생사를 사지 않기로 약속한다. 호설암은 생사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팔 곳이 없었다. 육백여만금을 손해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최근 상해에 살던 서양인 백이랄(白爾辣)이라는 사람이 쓴 장문의 서신을 구했다. 이 사람은 여러번 강소, 절강등 양잠지역을 시찰했고, 중국잠사산업이 매년 쇠퇴하는 근본원인을 발견한다. 그것은 서양인이 사지 않아서도 아니고, 중국인들이 기르지 않아서도 아니다. 양잠지구에 만연된 누에전염병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신절재문존>에 서양인이 "1년간 생사를 사지 않기로 약속한다"는 등의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은 매년 상해에서 생사를 샀을 뿐아니라, 살 수 있는 생사가 갈수록 적어진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인이 이홍장에게 보낸 장문의 서신에서 중국이 양잠사업을 정돈하고 양잠업을 발전시켜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그렇다면, 호설암은 상해에서 대량으로 생사를 매점매석하고, 서양인들과 서로 싸워서, 각 양행의 서양인들이 그를 "아주 미워하였던가?" 필자가 청나라말기 신문잡지등 자료를 조사해보니, 이 분야의 직접적인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일부 간접적인 자료는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의 <신보>보도에 따르면, 1883년 11월, 상해부강설기전장(上海阜康雪記錢莊)은 자금부족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호설암은 자신이 매점매석해놓고 있던 15000포의 생사를 각각 이화양행(怡和洋行. 2000포)과 천상양행(天祥洋行, 13000포)에 매각한다.

 

만일 호설암이 절말 양행과 사이가 나빴다면,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이들 양행의 양인들이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을까? 확실히 불가능할 것이다.

 

호설암이 매각한 15000포의 생사는 도대체 얼마어치일까?

 

서양인 백이랄이 이홍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당시의 생사가격을 털어놓았다. "매포의 생사의 평균가(通扯價)는 320냥백은이다" 그렇다면 15000포 생사의 총가치는 480만냥백은이 된다. 총가치가 겨우 480만냥백은이라면, 어찌하여 600만냥, 800만냥백은의 손실을 본단 말일가? 그러므로, 필자는 호설암이 생사를 매점매석하여 받은 손실은 150만냥이라는 설이 비교적 믿을만 하다고 본다.

 

그러나,일대거상 호설암이 겨우 150만냥백은의 손실을 입고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실로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1883년 10월 19일 <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작년(1882년) 겨울, 본부(本埠, 상해를 가리킴)의 각 대점포들이 속속 도산했다. 그 손실금액을 따지면 수백만이나 된다. 시장의 형세가 대거 악화되었다." 1883년에 들어서면서 시장은 더욱 불경기였고, 도산하는 상점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전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수선무(長袖善舞)의 호설암도 검려기궁(黔驢技窮)의 곤경에 처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돈줄이 마르고, 상점이 도산하게 된 것일까?

 

원래, 당시의 중국에는 철로를 만들고, 탄광을 개발하고, 선박을 만드는 붐이 불었다. 관련된 주식회사도 속속 건립되었다. 대량의 자금이 전장, 상점에서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더욱 심각한 점은 많은 사람들이 주식매매를 돈을 버는 정당한 장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장에서 돈을 빌려 주식투기를 하는 현상이 아주 보편적이었다.

 

악영향이 나타났다. <신보>에 따르면, 1882년부터, "주식매매가 성행하여, 거의 거국적으로 미친듯이 움직였다. 1년도 되지 않아서, 그 폐해는 드러났다. 주식은 만,천원에서 급전직하되어 휴지가 되었다.(1884년 1월 23일 <신보>). 전장, 상점에서 흘러나간 대량의 자금이 이렇게 주식시장에서 증발되어버린다. 부실대출, 불량대출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경제형세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이런 배경하에서, 호설암이 상당한 자금을 물자(생사)를 매점매석하는데 쓴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만하다. 어찌되었던 자금이 곤란할 때, 생사는 적시에 현금화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호설암의 전장자금은 생사를 매점매석하는데 쓴 480만냥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자금은 당시에 대출로 나가 있었다. 맹렬한 폭풍이 밀려오자, 이들 대출된 대량의 자금은 회수할 수 없는 불량대출이 되어 버렸다. 일단 인출사태가 벌어지자, 자연히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호설암이 파산한 진정한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