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단목사향(端木賜香)
호광용(胡光鏞), 자(字)는 설암(雪巖), 휘주(徽州) 적계현(績溪縣) 사람.
어려서는 집안이 가난해서 겨우 2년간 서당에서 공부를 했을 뿐이다. 8살때 남의 일을 도와주고 소를 봐주었다. 13살때 주운 돈을 자신이 갖지 않고 돌려주면서 돈의 주인이자 대부잡량행(大阜雜糧行)의 주인 눈에 들어서 그곳의 학도(學徒)가 된다. 15살때, 병이 든 금화(金華) 객상을 도와주어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 금화로 가서 화태행(火腿行)의 학도가 된다. 이곳에서 호설암은 처음으로 은표(銀票)를 보고 마음 속으로 부러워한다. 전장(錢莊)의 학도가 되려면 계산도 빨라야 하고, 주판도 잘 써야 하고, 글자로 잘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열심히 배운다. 19살때 원하는대로 항주의 부강전장(阜康錢莊)에 들어갈 수 있었다. 4년후, 그는 학도(學徒)에서 포가(跑街)로 승진하고, 반년후에는 다시 출점(出店)이 된다. 주인이 그를 장반(掌盤, 사장)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그는 거절한다. 원래의 장반이 아직도 일을 할 수 있고, 자신은 바깥을 다니면서 '출점'(업무)하는 것이 전장의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27살때, 주인이 임종하면서 친구들과 장반을 불러모은 다음 전체 전장을 호설암에게 넘겨준다.
25살때, 즉 그가 출점으로 있을 때, 호설암은 일생에서 귀인을 만난다. 즉 낙척서생 왕유령(王有齡)이다. 호설암은 개인적으로 자신이 회수한 불량대출금 은자 500냥을 왕유령에게 주어 북경에 가서 관직을 구해보게 한다. 왕유령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북경에 가서 자신의 어릴때 놀이친구로 강서학정(江西學政)이 된 하계청(何桂淸)을 만난다. 하계청은 같은과에 진사가 된 절강순무(浙江巡撫) 황종한(黃宗漢)에게 편지를 써주고, 왕유령에게 5천냥은자도 준다. 왕유령은 돌아온 후 황종한을 찾아가서 서신을 주고, 돈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왕유령은 호설암의 말을 듣고 다시 돈도 갖다 준다. 그러자 즉시 관직을 얻는다. 해운국(海運局) 좌판(坐辦). 그후 왕유령은 계속 승진한다. 해운국 좌판에서 호주지부(湖州知府) 다시 절강순무까지. 그리고 호설암에게는 삼품의 후보도(侯補道)의 관직을 준다.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웠고, 관상이 결탁하여 한 사람은 관직에서 발전하고, 한 사람은 돈을 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다. 1861년, 태평군이 항주를 포위공격한다. 왕유령은 2만냥 은표를 호설암에게 주며 두 가지 일을 요청한다. 첫째는 원병을 청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양식을 운송하라는 것이다. 호설암이 양식을 운송해왔을 때, 왕유령은 항주성을 잃고 자결한 상태였다. 호설암은 잠시 상해로 피신한다. 이때는 증국번의 추천으로 좌종당이 절강순무로 온다. 좌종당이 절강으로 진입할 때 양식이 부족했는데, 호설암이 마침 설중송탄(雪中送炭)하여 왕유령이 당초에 주었던 2만냥 은표뿐아니라, 2만석의 양식까지 운송해온 것이다. 좌종당은 즉시 그를 괄목상대한다. '공금인 은표를 돌려주는 것이면 되었다. 네가 운송해온 양식으로는 네 관직을 주는 것으로 하겠다. 호설암이 바로 대답한다. '저는 일을 할 줄 알지, 관리는 할 줄 모릅니다." 좌종당은 그 말을 닫고 활짝 웃는다. 원래 이 말은 호설암이 얻어들은 말로, 좌종당 본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생신조라고 한다. 이어서 좌종당은 호설암에게 남아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다. 두 사람은 얘기하면 할수록 뜻이 맞았다. 큰 나무의 아래에 있으면 그늘이 있어 시원하다는 말이 있다. 왕유령이라는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하늘이 호설암에게 다시 좌종당이라는 큰 나무를 내려준 것이다. 호설암의 담략, 능력과 호쾌한 사람됨은 좌종당이 한번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했다. 두 사람이 결탁하자 좌종당에게는 능력있는 군수물자조달책임자를 얻은 것이 된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좌종당은 민절총독으로 승진한다. 호설암에게는 드넓은 사업의 무대가 있었다. 사업은 갈수록 커진다. 만일 좌종당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다고 한다면, 호설암은 위로는 국가를 돕고 아래로는 서민을 도왔으며 중간에서는 장사할 때는 자신을 위해서 했다. 그는 좌종당을 도와서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상첩군(常捷軍)을 조직하고,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그는 항주가 수복된 후 의장(義葬)을 거행하고, 태평군의 잔존세력을 거두었으며,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다; 그는 홍정상인(紅頂商人, 좌종당은 섬감총독으로 가기 전에 호설암의 관직을 3품에서 2품의 포정사로 올려주었고, 홍정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으로 불리웠고, 부유하기는 왕이나 제후에 부럽지 않았으며. 재산이 천만을 헤아렸다. 명분있는 부인만 12명이었고, 아래의 분호,상호중에서 이름없는 여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966년, 좌종당이 섬감총독이 되고, 1년후 다시 명을 받아 흠차대신이 되어 독판섬감군무가 되어 서념군과 섬감회란을 토벌한다. 그후에 다시 명을 받아 흠차대신 독판신강군무가 되어 12년의 공을 들여 신강을 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상해에서 서정전운국 총판으로 있던 호설암의 공로가 뒷받침되었다. 군량을 공급해주었을 뿐아니라, 심지어 의약문제도 모두 호설암이 해결해주었다. 좌종당의 병사는 신강에 진입하자 기후가 맞지 않았다. 호설암은 설기약창(雪記藥廠)을 열어 무상으로 사병들에게 약을 공급해주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공급해준다(나중에 호경여당(胡慶餘堂)으로 바뀌는데, 남에는 경여당 북에는 동인당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청의 국정과 특색에서 호설암이 없었더라면, 좌종당의 일련의 성공과 신강수복은 없었을 것이다. 좌종당이 서부정벌에서 돌아오자 조정에서 2등각정후, 1등경기도위에 봉해지고 황마괘를 하사한다. 내각대학사의 신분으로 군기처에 들어간다. 그는 조정에 올린 글에서 여러번 호설암을 칭찬했다: "상인들 중에서 기남자이다. 사람이 비록 상인출신이지만 호협의 기개가 있다.", "급공호의(急公好義)", "심명대의(深明大義)", "실은 전선에서 싸우는 장수들과 다를 바 없다" 등등. 어쨌든 좌종당이 이끌어주어, 호설암은 서태후를 만난다. 서태후는 기뻐하며 강소, 강서, 절강, 복건 4개성의 세수대리권을 부강전장에 내린다. 그외에 좌종당은 홋ㄹ암에게 황마괘를 하사하도록 하고, 호설암의 모친에게는 1품고명부인에 봉해지도록 한다.
상인이 이 정도에 이르면 더 잘 나갈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상인에게는 보장이 없다. 상인이 관리와 결탁하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보장책일 뿐이다. 먼저 좌종당이 총애를 잃는다. 그는 호남사람의 고집센 기질이 있어 확실히 전쟁터에는 적합하지만, 행정중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양강총독으로 밀려난다. 나중에 좌종당도 어느 정도 알았다. 호설암이 자신을 위하여 외국에서 돈을 빌리고, 군수물자를 조달해주면서 중간에서 커미션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호설암에 대한 호감이 점차 줄어든다. 이와 동시에, 호설암의 사업도 최대한 확장된다. 그는 서양인과 싸워서 생사시장을 독점하는데 1천여만냥의 은자를 들인다. 담보인으로 회풍은행(HSBC)에서 400만냥 은자의 대출을 받는다. 제1차 상환기일이 도래했고, 각성에서는 자신이 분담한 금액을 상해로 송금했다. 그러나 좌종당의 정치적 적수인 이홍장은 자신의 수하인 회계(淮係) 관리를 시켜 그 돈을 동결시킨다. 호설암이 예전에 커미션을 받은 사실이 회계관리에 의하여 서태후에게 보고된다. 서태후는 대노하여 배로 배상받고 엄히 처벌하도록 명령한다. 중국프랑스전쟁이 발발하자, 금융시장은 돌변한다. 호설암이 각지에 설치한 부강전장은 인출사태가 벌어진다. 호설암의 상업제국은 돌연 붕괴하고 호설암은 일패도지한다. 비록 그러하긴 했지만, 그는 마무리를 비교적 깔끔하게 한다. 첫째, 직접 부도를 선언하지 않고, 자산을 청산한다. 예금자를 3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은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원금과 이자를 모두 상환한다.제2등은 돈이 있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로 역시 원금과 이자를 보낸다. 제3등은 중산층고객들에게는 갚아주지 못한다. 둘째, 첩들에게는 1인당 수백냥의 은자를 주어서 내보낸다. 호설암의 집을 떠나서라도 중등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엇다. 셋째, 형부상서, 흠차대신 문욱(文煜)이 와서 가산을 몰수한다. 호설암은 군수물자유용죄로 경성에 끌려간다. 비록 공친왕등이 그를 위하여 애를 써주었지만, 대국은 이미 결정되었다. 호설암은 겨우 몸만 풀려나서 3개월후 집으로 돌아온다. 호경여당도 남는데, 문욱이 넘겨받아 관리했다.
1885년, 좌종당이 죽고, 문욱도 죽는다. 서태후는 각로 상소문의 압력으로 호설암을 참형에 처할 준비를 한다. 관청도 인간적이었다. 고의로 공문절차를 늦추어 공문서가 항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호설암이 하루전에 사망했다. 그때는 1885년 11월로 향년 62세이다. 그를 마지막까지 따른 아홉째부인은 호설암의 장례식을 마친 후 목을 매어 자결한다. 그저 늙은 모친만 남는다. 예전에 호설암의 집앞을 지날 때면 관리들도 가마에서 내리고 말에서 내려야 했던 1품고명부인인 호설암의 모친.
백가강단에서 호설암을 얘기했던 증사강(曾仕强)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천도기만(天道忌滿), 인도기전(人道忌全)".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그저 사정의 일면이다. 사정이 또 다른 면이 아마도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도의 완비와 보장이다. 한 마리로 말해서, 중국상인은 제도의 안전이 없다. 그저 안전을 인사(人事)에 의탁한다. 그러나 인사라는 것은 자신의 원이능 제외하고도 통제불가능한 정치와 관료사회가 있다. 어느 정도 제도에 희생된다. 더더구나 좌종당,이홍장의 상,회 두 계파의 싸움에 희생된 측면이 있다. 그외에 금융과 시장 자체의 원인도 있다.
호설암의 모친은 호설암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들아. 맨날 돈버는데만 골몰하지 말아라.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뭐하려고 그러느냐."
이 말은 확실히 의미심장하다. 돈이라는 것은 일시의 부귀영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은 가져다 주지 못한다. 중국의 상인은 오늘날까지도, 관상결탁의 길을 걷는다. 역시 제도적인 보장이나 최소한의 안전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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