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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114

김일제(金日磾): 한무제는 임종때 왜 흉노왕자인 그를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삼았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왕자로서 한나라에서 아주 잘 지냈다. 심지어 보정대신까지 지냈는데, 그 근본원인은 한무제(漢武帝)의 신임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비록 흉노왕자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무제의 곁에서 함께 자랐다. 흉노인이라는 신분외에 한무제에 있어서는 총신(寵臣)으로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게다다 한무제의 임종전에 한나라에는 복잡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래서 결국, 김일제가 보정대신이 되어, 한무제가 죽은 후, 한소제(漢昭帝)시대의 '사대천왕(四大天王)'중 한명이 된다. 당연히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한무제시대와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원인이 있다. 이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하게 김일제가 어떻게 하여.. 2023. 7. 4.
한무제(漢武帝)는 왜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을 황위후계자로 삼았을까? 글: 팔점종사기(八點鐘史記)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 기원전156년 7월 14일 - 기원전87년 3월 29일)은 서한(西漢)의 제7대 황제이다. 한무제는 16세때 등극하여, 중앙에는 중조(中朝)를 설치하여 황권을 공고히 했으며, 지방에는 13주의 자사(刺史)를 두어 제후왕과 지방고위관료에 대한 감찰을 강화했다; 찰거제(察擧制)를 채택하여 인재를 설발하고; 문화적으로 동중서(董重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확립하여, 유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삼는다. 군사적으로는 외적을 물리쳐 영토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했다. 동으로 조선을 병합하고, 남으로 백월을 점령했으며, 서로는 대완을 정벌하고, 북으로 흉노를 격파했다. 이렇게 한나라의 기본적인 영토를 확립하고, 한무.. 2023. 6. 28.
한무제(漢武帝)와 서왕모(西王母)신앙 글: 장서산(張緖山) 서한(西漢) 한무제때 가장 중대한 사건중 하나는 서역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장건(張騫)이 한무제의 명에 따라 서역으로 간 직접적인 목적은 대월지(大月氏)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흉노(匈奴)를 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흉노의 중원에 대한 위협을 철저히 소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월지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후, 안락한 환경에 만족하여 다시 흉노에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장건은 비록 외교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서역의 풍토인정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서역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 에는 장건에 가지고 온 견문을 기록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특히 눈에 띈다: "조지(條枝)는 안식(安息)의 서쪽 수천리에 있고, 서해(西海)에 접해 있다....안식의 장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조지에는.. 2023. 6. 10.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 이야기 글: 우서한독(友書閑讀) 사마상여가 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자 첩(妾)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인 탁문군(卓文君)에게 편지를 보낸다: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百千萬". 총명한 탁문군은 이 편지를 보고, 즉시 남편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시를 한수 써서 남편에게 보낸다. 사마상여는 그 편지를 읽고 첩을 들이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우리는 이전에 역사상 첫번째 여성시인 허목부인(許穆夫人)은 비록 재능이 출중했지만, 남자들에 못지 않은 집안과 나라에 대한 감정을 가졌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도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역사의 기나긴 흐름 속에서 얼마나 많은 홍수형향(紅袖馨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매몰되었던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겨우 이름정.. 2023. 4. 17.
중국고대의 "주(州)"와 "부(府)"의 구별 글: 역사유비유희(歷史有悲有喜) 중국고대의 "주"와 "부"의 관계는 복잡다단하다. 매 시기마다 매 시기의 특색이 있어 반드시 각 시기의 역사에서 이를 구분해야 한다. "주(州)"의 개념은 일찌감치 나타났다. 고대 중국을 습관적으로 "구주(九州)"라고 불렀는데, '우공구주(禹貢九州)'의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떄는 아직 구체적인 칭호는 아니었다. "주"의 설치는 한무제시기에 시작되고, 한무제는 자사(刺史)제도를 도입하며, 천하를 13주로 나눈다. 그리고 주마다 자사 1명을 파견하여 지방을 감찰하도록 했다. 이떄의 "주"는 단지 중앙이 임시로 구분한 감찰구역이었고, 지방행정구획은 아니었다. 동한말기,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이 할거하고, 군벌이 혼전을 벌였다. 주는 점차 실질적인 지방행정구역으로 변해간다. .. 2023. 1. 30.
상관씨(上官氏): 6살에 황후, 15살에 태후, 40살에 태황태후가 된 여인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상관씨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상관걸(上官桀)이고, 외할아버지는 대장군 겸 대사마 곽광(霍光)이다. 곽광은 곽거병(霍去病)의 동생으로 조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와 상관걸은 모두 한무제때의 중신으로, 한무제의 탁고를 받아 나이어린 한소제(漢昭帝)를 보좌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두었으니 상관씨의 일생은 당연히 평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을 궁으로 보내기 위해, 상관씨의 부친인 상관안(上官安)은 한소제를 어릴 때부터 길러준 한소제의 유일한 누나인 악읍장공주(鄂邑長公主)를 찾아가서, 과부로 지내는 장공주의 애인 "정외인(丁外人)"의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악읍장공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상관씨를 한소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성공한다. .. 2023. 1. 10.
진나라가 멸망할 때, 남방에 수수방관한 50만대군이 남아있었는가? 글: 곽엽민(郭曄旻)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로서 대진제국(大秦帝國)의 속흥취망(速興驟亡, 빠르게 흥성하고 급격히 망하다)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의 “독부지심(獨夫之心), 일익교고(日益驕固)”하여, “수졸규(守卒叫), 함곡거(函谷擧)”까지 겨우 몇 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10여년전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역사다큐멘터리 에는 이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존망위기에 남부변방을 지키고 있던 50만 진군이 침묵을 선택했다”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만든 대제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널리 알려졌고,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확실히, 가의(賈誼)가 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진나라는 산동6국을 평정한 후, 군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 2022. 6. 6.
곤륜산(崑崙山): 신화와 현실 글: 진련산(陳連山) 북경대학 중문학과 교수 현실의 곤륜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한 줄기의 웅대한 산맥이다. 서쪽으로는 신장의 파미르고원에서 출발하여 동으로 티벳을 거쳐 칭하이(靑海)로 들어가며, 총길이는 2,500킬로미터에 달한다. 당대의 지리학자들은 곤륜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곤륜산, 중곤륜산과 동곤륜산으로 구분한다. 동곤륜산은 황하의 발원지(源頭)인 바얀카라산(巴顔喀拉山)을 포함한다. 다만, 곤륜산맥은 현대지리학개념이고, 그 명명은 현대과학자들이 고대신화의 곤륜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고대인들의 마음 속의 곤륜산은 어디에 있었고,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 곤륜산 명칭의 유래 "곤륜"은 에 나오는 서방소국의 이름이다. "곤륜"이라고 명명된 산은 에 가장 먼저 나온다. 그리고 이 명명은.. 2021. 10. 27.
한무제때 "무고지화(巫蠱之禍)"의 막후인물은 누구일까? 작자: 미상 무고(巫蠱)의 통상적인 해석은 한 무리의 독충(毒蟲)을 하나의 그릇에 넣고[고(蠱)라는 글자 자체가 벌레를 놓아두는 그릇(皿)이라는 뜻이다], 독충이 서로를 잡아먹게 한 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한 마리의 독충을 '고'라고 부르는데, 그 독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무고술의 구체적인 방법은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의 위에 저주할 사람의 이름, 생진팔자등을 쓰고 마법과 저주를 한 다음 고를 저주받을 사람이 거처한 곳 혹은 근처에 풀어주고, 이를 통해 저주받는 사람의 영혼을 통제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그럼 2천여년전에 발생했던 무고지화가 어떻게 서막을 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92년, 한무제 유철(劉徹)은 건장궁(建章宮)에서 한 남자가 검을 차고 용화문(龍華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2021. 1. 14.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왜 동생 유항(劉恒)에게 황위가 넘어갔을까? 글: 조문사(朝文社) 한혜제 유영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비록 명목상으로 황제였지만, 사실상 권력자는 모친인 여후(呂后)였다. 유영이 사망한 후, 전소제(前少帝) 유공(劉恭), 후소제(後少帝) 유홍(劉弘)이 전후로 즉위한다. 비록 이들 둘은 허수아비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황제에 오르긴 한다. 사료에 따르면, "밤에, 각각 사람을 나누어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상산왕(常山王)과 소제(少帝)를 자택에서 주살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영의 6명 아들 중에서, 2명은 황제에 올랐다. 전소제 유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반여집단(反呂集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는 반여집단의 진평(陳平), 주발(周勃)등의 옹립하에,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왜 유영의 남은 .. 2020.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