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서한독(友書閑讀)
사마상여가 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자 첩(妾)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인 탁문군(卓文君)에게 편지를 보낸다: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百千萬". 총명한 탁문군은 이 편지를 보고, 즉시 남편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시를 한수 써서 남편에게 보낸다. 사마상여는 그 편지를 읽고 첩을 들이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우리는 이전에 역사상 첫번째 여성시인 허목부인(許穆夫人)은 비록 재능이 출중했지만, 남자들에 못지 않은 집안과 나라에 대한 감정을 가졌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도 정략결혼의 도구가 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역사의 기나긴 흐름 속에서 얼마나 많은 홍수형향(紅袖馨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매몰되었던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겨우 이름정도만 알 수 있는 경우도 항하사(恒河事) 수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은 재능도 있고, 용모도 있고, 그녀들에게는 후세에 전해지는 문장도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거의 대부분 '애정'이라는 두 글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여자들은 평생동안 아무리 경륜을 가지고 있고, 미모가 출중하더라도 결국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들의 배경판이 되는 운명이라는 것같다. 그러나 탁문군의 이런 결말에서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을 개척했다. 바로 왕개운(王闓雲)이 말한 것처럼, "사공욕위고금여자개일기국(史公爲古今女子開一奇局), 使皆能自拔耳)"이다(개략적인 뜻은 사마천이 사기에 탁문군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고금의 여자들이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려면 스스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탁문군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된 것은 사마천이 여자들이 결혼에 있어서 스스로 선택하는 선례를 만들었기 때문인 것이다.
탁문군과 사마상여라는 재자가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서람은 일대재녀 탁문군의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에 의문을 나타낸다. 즉 사마상여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가난헤서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벽 네개밖에 없었다. 조금 잘 생긴 것을 제외하면 당시에 괜찮게 볼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마상여는 초기의 "흘연반(訖軟飯, 여자에 의존해서 사는 남자를 가리킴)"이고 봉황남(鳳凰男)인데, 결국 탁문군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후에 다시 첩도 들이고 싶어진다. 이는 보통남자들이 걷는 길이다.
그렇다면, 이 한쌍의 재자가인의 결말은 어떠했고, 또 어떤 경력을 겪었을까?
탁문군은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였다.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눈썹은 먼산처럼 검고, 얼굴은 부용(연꽃)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녀의 가정도 아주 유복했고, 부유한 상인집안출신이다.
탁문군의 부친인 탁왕손(卓王孫)은 사천 임공(臨邛)의 거부이고, 그 조상은 일찌기 조(趙)라의 한단(邯鄲)에서 철광석광산을 열고, 철을 제련했다 유명한 철강대왕이다.
나중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하여, 먼저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조나라의 상업환경에 천지가 뒤집히는 변화가 일어났고, 그래서 탁씨집안은 사천 임공으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누적된 인맥과 풍부한 광산채굴경험은 탁왕손의 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주업종이었으며, 거부의 명단에 올라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총애받던 신하중에 등통(鄧通)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잘 생겼고, 말도 잘했다. 그래서 한문제는 당시 등통은 아주 총애했다. 마치 별을 달라고 하면 따줄 것처럼. 나중에 한 유명한 관상쟁이가 등통을 보고 나중에 굶어죽는다고 말한다.
한문제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따. 자기가 비호해주는데 어찌 굶어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한문제는 등통에게 광산에서 광물을 채굴하여 돈을 주조하도록 허가증을 내준다. 네가 돈을 쓰고싶은만큼 주조해서 쓰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인들이 자주 "등통지재(鄧通之財)"라는 말로 집안 재산이 엄청나다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다.
한명은 권리가 있고, 한명은 기술이 있다. 그래서 탁왕손은 등통과 손을 잡고, 관상결탁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게 된다.
비록 등통이 나중에 실각하고, 결국 새로 등극한 황제에 의해 굶어죽지만, 탁왕손은 그저 사업파트너였으므로 연루되지 않고 계속하여 광산사업을 수행했다.
탁문군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었다. 재능으로 보든 안목으로 보든 그녀는 같은 나이대의 여자들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아무리 뛰어난 여자라고 하더라도, 고대에는 기본적으로 부속품이었다. 특히 상인집안에서, 혹은 고관대작의 집안에서는 더더욱 여자에게 가족의 희망을 걸고 고위관료집안에 시집을 보내거나, 상업계에서 부호인 집안과 정략결혼을 통해 강강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왜 탁문군이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탁왕손은 반드시 집안이 비슷한 곳을 찾았지만, 신랑의 건강상황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문군이 시집을 간 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남편은 곧 죽어버리게 된다.
시집에서는 굳이 그녀에게 수절하라고 남겨놓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친정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때 사마상여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마상여는 용모와 재능을 모두 갖춘 대재자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환경에서, 한 남자가 재능과 학문만 있다고 하여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아무리 멋진 시와 문장을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적을 물리칠 수도 없고, 상사들에게 잘 보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사마상여는 가난뱅이로 지내야 했다.
그가 사천 임공으로 왔을 때 마침 현지의 현령과 아주 가까웠다. 현령은 명성이 있는 사마상여에 대하여 매우 존중하는 태도였다. 사마상여도 문인학자의 재주를 과시하고, 더더욱 그를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로 여겨서 태도가 더욱 겸손해졌다.
이날, 탁왕손의 집안에서 연회를 열었다. 당연히 탁왕손은 현령을 귀빈으로 모셨다. 이런 대기업가의 연회에는 대문호가 필요했다. 그래야 체면이 서기 때문에. 그래서 현령의 추천으로 사마상여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된다.
다만 사마상여는 거물행세를 하며, 세번 네번 청하고나서야 비로소 갔다. 그리고는 연회때 자신의 문장을 자랑한다. 술이 세잔씩 돌고난 후에 현령은 사마상여에게 금(琴)을 타고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사마상여도 사양하지 않고, <봉구황(鳳求凰)>을 연주한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탁왕손의 집에는 재녀가 있다는 것을. 사마상여가 이번에 간 것도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였다. 그가 금으로 탄 곡은 "유염숙녀재규망(有艶才女在閨房), 실이인하독아장(室邇人遐毒我腸)"(아주 예쁜 재녀가 규방에 있는데, 방은 가깝고 사람은 멀어서 애간장을 녹인다).
탁문군은 몰래 병풍 뒤에서 관찰했고, 사마상여가 당당한 인재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사마상여는 그가 원래 부유하지 않지만 탁문군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두 사람은 시녀를 통하여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에 탁문군은 사마상여를 따르겠다고 결정하게 된다.
이 애정은 하루도 걸리지 않았고, 탁문군은 바로 사마상여에게 가게 된다.
탁왕손은 딸이 가난뱅이와 함께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분노를 금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탁문군과의 관계를 끊고 한푼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탁문군은 벽 네개밖에 없는 사마상여의 집을 보고, 아마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하다고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마상여와 함께 고생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탁문군이 권하는 바대로, 사마상여는 그녀와 함꼐 작은 주관(酒館)을 차린다. 부부는 바쁘게 살면서도 즐겁게 지낸다. 탁왕손은 딸이 술집을 여는 것이 체면상하는 일이라고 여겨서 할 수없이 두 사람에게 재산을 조금 나누어주고, 두 사람이 먹고 사는 것에는 걱정이 없도록 해준다.
나중에 사마상여는 한무제 유철을 만난다. 그는 일찌기 <자허부(子虛賦)>라는 글을 지어 황제를 감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황제와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사마상여는 다시 <상림부(上林賦)>를 짓는다. 태평성세의 화려하고 장대함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가지고 평보청운(平步靑雲)하게 된다.
탁왕손은 사위가 금의환향하는 것을 보자, 먼저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 부부에게 적지 않은 재산을 내준다. 탁문군에게 그녀의 남자형제들과 같은 비율로 분배를 해준 것이다.
다만, 이때 탁문군도 그런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금방 그는 남편과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마상여가 첩을 들이려는 생각이 들면서, 처인 탁문군에 대하여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탁문군은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천고에 전해져 내려오는 <백두음(白頭吟)>을 짓는다.
탁문군은 한발 물러섬으로써 앞으로 나가는 방식을 택한다. "문군유양의(聞君有兩意), 고래상결절(故來相决絶)"이라고 썼지만, 실제로 중점은 "원득일심인(願得一心人), 백수불상리(白首不相離)"(원컨대 한 마음인 사람을 얻어, 백발이 될 때까지 서로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이 내용은 민간에 전설이 되어 전해지게 된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百千萬"라고 써보냈다. 여기에 숨은 뜻은 이미 그녀에 대해 애정(뜻)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겨우 13자의 서신에서 빠진 숫자가 있다. 바로 만(萬)다음의 "억(億)"이다. 즉, "억이 없다(無億)". '억(億)'은 '의(意)'와 중국어 발음이 "YI(이)"로 같다. 결국 이는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더 이상 애정이 없다(無意)"라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는 것이다.
탁문군은 슬프기 그지 없었고, 그녀는 사마상여에게 숫자시 <원랑시(怨郞詩)>를 써서 보낸다.
일별지후(一別之후), 이지상현(二地相懸)
지설시삼사월(只說是三四月), 우수지오륙년(又誰知五六年)
칠현금무심탄(七弦琴無心彈), 팔행서무가전(八行書無可傳)
구연환종중절단(九連環從中折斷), 십리장정만안욕천(十里長停望眼欲穿)
백사상(百思想), 천계념(千繫念), 만반무내파랑원(萬般無奈把郞怨)
만어천언설불완(萬語千言說不完), 백무료뢰(百無聊賴), 십의난간(十依欄杆)
중구등고간고안(重九登高看孤雁), 팔월중추월원인불원(八月中秋月圓人不圓)
칠월반(七月半), 소향병촉문창천(燒香秉燭問蒼天),
육월복천(六月伏天), 인인요선아심한(人人搖扇我心寒)
오월석류홍사화(五月石榴紅似花), 편우진진냉우요화단(偏遇陣陣冷雨澆花端)
사월비파미황(四月枇杷未黃), 아욕대경심의란(我欲對鏡心意亂)
홀총총(忽匆匆), 삼월도화수수전(三月桃花隨水轉)
표령령(飄零零), 이월풍쟁선아단(二月風箏線兒斷)
희(噫), 랑아랑(郞呀郞),
파부득하일세(巴不得下一世), 니위녀래아주남(伱爲女來我做男)
한번 헤어지고 난 후에, 두 곳에서 서로 살아가고 있다.
그저 3,4개월이면 돌아온다고 하더니, 누가 5,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으랴.
칠현금도 타고 싶은 마음이 없고, 팔행의 서신도 전할 수가 없구나.
구연환이 중간에 잘렸는데, 십리 정자에서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백번 생각하고, 천번 생각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남자를 원망할 수밖에.
천마디 말, 만마디 말을 다 하지 못했는데, 얘기할 사람도 없고, 그저 난간에 기대어 있을 뿐.
중양절(9월9일)이 되어 높은 곳에 올라서 보아도 외로운 기러기뿐,
팔월 중추(8월 15일 한가위)에 달은 둥근데 가족은 만나지 못하는구나.
칠월에 향을 사르고 촛불을 들어 하늘에 물어보고,
유월 복날에 사람들마다 부채를 흔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쓸쓸하다.
오월의 석류는 불처럼 붉은데, 굳이 내리는 차가운 비가 꽃을 적신다.
사월의 비파는 아직 노랗게 익지 않았는데, 나는 거울을 마주하고 싶지만, 마음이 너무 어지럽다.
돌연, 삼월의 복숭아꽃은 물을 따라 흘러가고,
외롭게 이월의 연은 줄이 끊어졌구나.
아아. 남편이여 남편이여.
다음 세상에는 네가 여자로 태어나고, 내가 남자로 태어나기를.
이 원랑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탁문군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
다만 <백두음>만으로도 사마상여의 마음을 돌리는데는 충부했다. 그후 부부는 서로 환난을 함께 하면서 후반생을 같이 보냈다.
나중에 사마상여는 소갈증(지금의 당뇨)을 앓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과 탁문군이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미인부(美人賦)>를 써서 스스로를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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