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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漢武帝)는 왜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을 황위후계자로 삼았을까?

by 중은우시 2023. 6. 28.

글: 팔점종사기(八點鐘史記)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 기원전156년 7월 14일 - 기원전87년 3월 29일)은 서한(西漢)의 제7대 황제이다. 한무제는 16세때 등극하여, 중앙에는 중조(中朝)를 설치하여 황권을 공고히 했으며, 지방에는 13주의 자사(刺史)를 두어 제후왕과 지방고위관료에 대한 감찰을 강화했다; 찰거제(察擧制)를 채택하여 인재를 설발하고; 문화적으로 동중서(董重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확립하여, 유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삼는다. 군사적으로는 외적을 물리쳐 영토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했다. 동으로 조선을 병합하고, 남으로 백월을 점령했으며, 서로는 대완을 정벌하고, 북으로 흉노를 격파했다. 이렇게 한나라의 기본적인 영토를 확립하고, 한무성세의 국면을 연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비단길을 열고, 윤대(輪臺), 거리(渠犁)에서 둔전하는 등을 조치를 행한다. 그리고 사자교위(使者校尉)를 설치하고, 연호를 두며, 태초력(太初曆)을 반포하고, 태학(太學)을 열어 후세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한무제는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는데, 집권후기에 들어서는 궁병독무(窮兵黷武)하고, 무고지화(巫蠱之禍)를 일으켜, 부정적인 그림자를 남긴다. 바로 이 무고지화로 인하여, 한나라는 차기 황위후계자인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피살된다. 정화4년(기원전89년), 한무제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린다. 후원2년(기원전87년), 한무제는 오작궁(五柞宮)에서 붕어한다. 향년 70세이다.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이고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무릉(茂陵)에 안장된다. 

 

서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무제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長子) 여태자 유거, 차자(次子) 제회왕(齊懷王) 유굉(劉閎), 삼자(三子) 연자왕(燕刺王) 유단(劉旦), 사자(四子) 광릉여왕(廣陵厲王) 유서(劉胥), 오자(五子)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 육자(六子) 한소제(漢昭帝) 유불릉(劉弗陵). 태자 유거가 무고지화로 인하여 피살된 것을 제외하고도 한무제에게는 아직 5명의 아들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막내아들 유불릉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한무제가 임종할 때 유불릉은 겨우 8살짜리 어린아이였다. 대한강산을 이렇게 어란 아이에게 넘겨주면 그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래에서 한무제의 장자 여태자 유거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아들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회왕 유굉.

 

유굉은 한무제의 둘째아들이고, 생모는 왕부인(王夫人)이다. 원수6년(기원전117년) 사월, 한무제는 그를 제왕(齊王)에 앉힌다. 유굉의 모친 황부인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유굉을 아주 좋아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제왕은 수명이 너무 짧았다. 겨우 8년간 제왕으로 있다가 원봉원년(기원전110년) 여태자 유거보다도 먼저 죽는다. 그렇게 하여 후계자의 대열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연자왕 유단

 

유단은 한무제의 셋째아들이다. 원수6년(기원전117년), 한무제는 그를 연왕(燕王)에 봉한다. 유단은 박학다식하며, 널리 천하의 현사(賢士)를 모았다. 여러 황자들 중에서 비교적 능력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무제의 말년에 유단은 장년으로 봉국에서 여러해동안 집정한 경험도 있다. 정치적인 경험이 풍부하여 황제후계자로서 적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한무제는 여태자 유거가 죽은 후, 계속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아마도 한무제 개인의 권력욕망이 너무 커서 권한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고,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새로 태자를 세우면 다시 그에게 위협이 될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태자를 계속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왕 유단은 마음이 조급했다. 후원원년(기원전88년), 한무제가 나이들고 중병으로 병석에 눕는다. 유단은 사자를 장안으로 보내 한무제에게 글을 올려 장안(長安)을 숙위(宿衛)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싶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한무제로 하여금 유단의 야심이 너무 크다고 여기게 만들어, 그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게 된다. 유단은 이렇게 하여 한무제에게 버림받고, 황위와는 인연이 없어지게 된다.

 

광릉여왕 유서

 

유서는 한무제의 넷째아들이다. 원수6년(기원전117년) 한무제는 그를 광릉왕(廣陵王)에 봉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유서는 사치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행동거지에 법도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그를 시종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이로 인하여 일찌감치 후계자의 반열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유서는 수명이 아주 길었다. 광릉왕의 자리에 64년간이나 있었으니, 아마도 최소한 70살이상은 살았을 것이다. 장수의 유전자는 한무제에게 물려받은 것같다.

 

창릉애왕 유박

 

유박은 한무제의 다섯째 아들이고, 이부인(李夫人) 소생이다. 천한4년(기원전97년) 창읍왕이 된다. 유박이 태자로 세워지지 못한 이유중 큰 부분은 그의 외숙인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떄문이다. 이광리는 한무제 후기에 중용된 장군이다. 기실 이광리 본인은 그다지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한무제의 총비 이부인의 오빠이기 때문에 파격적으로 장군이 되었다. 한무제 후기에도 흉노와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이전에 흉노와 싸운 명장들 이광(李廣), 곽거병(霍去病), 위청(衛靑)등은 모두 세상을 떠나, 장수가 끊기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한무제는 흉노와 싸우는 임무를 이광리에게 맡긴다. 그가 위청처럼 기적을 창조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위청은 한무제의 황후인 위자부(衛子夫)의 동생이었다. 비록 위청, 이광리는 모두 여형제와의 관계로 인하여 한무제에게 중임을 받지만, 이광리의 자질은 너무 떨어져 위청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전이 승전보다 많았다. 정화3년(기원전90년), 한무제의 조카이자 승상인 유굴리(劉屈氂)는 이광리와 공모하여 창읍왕 유박을 태자로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일이 틀통나서 유굴리는 한무제에게 처형당한다. 이때, 이광리는 흉토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조정으로 돌아오면 처벌받을까봐 겁먹고 흉노에 투항한다. 그렇게 되자 한무제의 분노는 가중된다. 그리하여 유박에게까지 한무제의 분노가 미쳐 그가 후계자로 될 기회도 사라지게 되었다.

 

한소제 유불릉

 

한무제의 막내아들이고 서한의 제8대황제이다. 조첩여(趙婕妤, 즉 구익부인(鉤弋夫人))의 소생이다. 유불릉은 한무제가 노년에 얻은 아들로 특히 총애받는다. 정화3년,4년(기원전90년, 89년), 한무제는 나이 5,6세의 유불릉이 체격이 건장하고, 총명하고 영리하여 자신이 어렸을 때와 닮았다고 여겨 더욱 유불릉을 총애하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건다. 한무제는 유불릉에게 황위를 넘겨줄 생각을 굳히고, 내정(內廷)의 화공(畵工)에게 "주공보성왕(周公輔成王)"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그림을 봉거도위(奉車都尉) 곽광(霍光)에게 하사한다. 신하들에게 자신이 어린아들 유불릉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자신의 사후에 주소모장(主少母壯, 황제는 어린데, 황태후는 한창 나이인 것)으로 여후(呂后)의 일이 재연될 것을 우려하여, 한무제는 유불릉의 생모를 사사한다. 이를 보면, 한무제가 막내아들 유불릉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한편으로 유불릉을 총애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