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한무제(漢武帝)와 서왕모(西王母)신앙

중은우시 2023. 6. 10. 23:19

글: 장서산(張緖山)

 

서한(西漢) 한무제때 가장 중대한 사건중 하나는 서역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장건(張騫)이 한무제의 명에 따라 서역으로 간 직접적인 목적은 대월지(大月氏)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흉노(匈奴)를 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흉노의 중원에 대한 위협을 철저히 소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월지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후, 안락한 환경에 만족하여 다시 흉노에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장건은 비록 외교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서역의 풍토인정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서역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 <서역.대완열전>에는 장건에 가지고 온 견문을 기록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특히 눈에 띈다:

 

"조지(條枝)는 안식(安息)의 서쪽 수천리에 있고, 서해(西海)에 접해 있다....안식의 장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조지에는 약수(弱水),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하는데,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안식국은 페르시아의 파르티아제국을 가리킨다. 서해는 지중해이다. 조지는 지중해에 접해 있는(현재의 터키동남부) 안티옥으로 당시 셀레우코스왕조의 도성이었다. 장건은 놀랍게도 역외세계에 대한 관련지식을 열심히 수집했다. 그중 가장 기이한 것은 서왕모전설이 장건이 획득한 소식중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조지에는 약수, 서왕모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전설상의 '서왕모의 땅"이 새로 얻은 바에 따르면 "조지국"경내에 있다는 것이었다.

 

서왕모전설은 원래 화하족(華夏族)에게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화로, 일찌기 화하경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대의 전적중 <산해경>에는 일찌감치 서왕모를 언급하고 있다. 그중 <서산경>에는 이렇게 적었다: "옥산(玉山), 서왕모가 거처하는 곳이다. 서왕모는 모습이 사람같고, 표범의 꼬리와 호랑이의 이빨을 가지고 있으며, 고음으로 소리칠 수 있고, 봉두난발에 네모난 모자를 쓰고 있다." <목천자전>에는 서왕모의 이미지를 반인반선의 우아한 귀부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왕모가 주목왕(周穆王)을 만난 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그렸다: 서왕모는 주목왕을 청하여 요지(瑤池)에서 연회를 베푼다. 두 사람은 서로 노래하고 답가를 불렀으며, 서로 깊은 정을 나눈다. 서왕모는 목천자에게 다시 오라고 청했고, 목천자는 "삼년안에 당신의 땅으로 다시 오겠다(比及三年, 將復而野)"고 대답한다. 한나라에 이르러, 서왕모는 '불사약'을 가진 신선으로 묘사된다. <회남자.남명훈>에는 항아(嫦娥)가 달로 도망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예(羿)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얻었는데, 항아가 훔쳐서 달로 달아났다" 개략 동한시기에 쓰여진 <한무고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칠월칠일밤, 한무제는 자운거(紫雲車)를 타고 온 서왕모를 맞이한다. 서왕모로부터 복숭아를 얻는다. 그러나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달라고 했지만, 얻지 못했다. 후세의 전설은 비록 견강부회이지만, 한무제가 장수를 꿈꾸며 서왕모신앙을 가졌던 것은 근거가 있다.

 

서한초기의 서왕모숭배분위기는 이미 황실에까지 퍼졌다. 한무제가 특히 심했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대인부(大人賦)>를 썼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음산(陰山)으로 낮게 되돌아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날아오르다가, 나는 서왕모를 보았다.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머리장식을 쓰고 있었으며, 굴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삼족오(三足烏)는 부리고 있었다. 오래 살더라도 이렇게 죽지 않으면, 만년을 살더라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사마상여가 <대인부>를 쓴 의도는 분명 한무제에게 너무 신선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지 말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신선세계에 대한 내용은 한무제로 하여금 서왕모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한서.사마상여전>에는 "사마상여가 <대인부>를 올리자, 천자는 크게 기뻐했다. 구름을 타고 하늘과 땅 사이를 노니는 것같다고 했다." <한서.양웅전>에는 "예전에 한무제가 신선을 좋아하여, 사마상여가 대인부를 올려서, 풍자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제는 오히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서진의 장화는 <박물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무제는 선도(仙道)를 좋아하여, 명산대택(名山大澤)에 제사지냈고, 신선의 도를 구하고자 했다." 한무제가 신선의 도에 심취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따르는 법이다. 한무제가 농후한 신선사상을 가지고 있다보니, 한나라의 조정에서는 상하관리와 전체 통치계급이 영향을 받게 된다. 장건이 서역을 갔을 때 이전의 화하족들이 가보지 못한 서방의 땅까지 간다. 그는 금방 그가 직접 가본 '서역'에는 화하족이 말했던 소위 '서왕모의 땅'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더욱 먼 '서극(西極)'에 서왕모의 땅이 있는지 여부는 추가로 검토해야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아시아보다 멀리 사는 안식국의 사람에게 물어본다. 안식국의 사람은 자신의 나라에 있지도 않은 서왕모의 땅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먼 나라인 '조지에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애매하게 답변함으로써 장건의 질문을 넘어갔다. 그러므로, 안식장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운운은 안식국의 사람이 스스로 말해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왕모가 '조지'에 있다는 소식은 장건과 부사들이 한무제의 '의도'를 파악해서 스스로 질문하여 얻어낸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 사회는 궁중에서 민간까지 서왕모숭배의 분위기가 넘쳐났다. 특히 황제가 신선도에 빠져있는 상황하에서, 서역을 다녀온 중원사절이라면 마땅히 '서왕모의 땅'이 진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도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가져와서 조정에 보고해야 한다. 엄숙하고 박학했던 태사공 사마천도 부득이 이 내용을 <사기>에 기록해야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실을 그대로 적는다는 원칙과 다른 한편으로 궁정내외의 농후한 서왕모신앙 분위기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사마천은 어쨌든 사실을 추구하는 정신을 지닌 역사가이다. 이에 대하여 쉽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안식장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이라는 표현을 적음으로써, 신선이 되는 꿈을 꾸면서 서왕모신앙이 강했던 한무제는 난감하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안식장로의 입을 빌어 한무제가 신선을 신봉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암중으로 드러냈다.

 

고대 서왕모신화는 신앙과 지리(地理)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아.석지>에는 "고죽(觚竹), 북호(北戶), 서왕모(西王母), 일하(日下)를 사황(四荒)이라 한다." 소위 '사황'은 '사극(四極)' 즉, 천지의 끝이다. <산해경>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죽은 북에 있고, 북호는 남에 있으며, 서왕모는 서에 있고, 일하는 동에 있다. 모두 사방혼황지국(四方昏荒之國)이고, 차사극이다(次四極者)" 서왕모신앙과 함께 엮여있는 화하족의 역외에 대한 지식은 본질적으로 화하의 세계지리관념을 보여준다. '서왕모'는 '천하사극'중 '서극' 즉 최서단(最西端)을 의미한다.

 

고대 화하족의 천하관념에는 남만, 북적, 동이, 서융으로 방위가 정해져 있었다. 서쪽방위에서 '화하'의 서쪽의 '극', '황'은 '융'의 지리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처음에 천하관념에 포함된 '서융'은 지리적인 범위가 그다지 멀지 않다. 오함(吳唅)은 기원전3000년부터 기원전500년까지, 중원관념의 '융(戎)'은 지러범위에서 섬서서쪽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일대는 '서황', '서왕모'라고도 불렀다. 그 범위는 섬서,감숙,하남,산서이다.(서왕모와 서융. <오함전집>제1권 288-293페이지). 진목공이 유여(由余)를 얻어, 서융팔국을 진에 복속시킨다. 이를 보면 '서융'은 진과 이웃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극, 융은 서왕모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화하족이 인식하고 있던 '서극' '융'에 대한 지리범위의 변화는 반드시 '서왕모의 나라'에 대한 지리상의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중원 화하족의 활동범위가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서방의 새로운 지역에 대한 이해도 늘어난다. '서극'은 서쪽으로 더욱 멀리 이동하게 된다. 신선의 나라인 '서왕모의 나라'도 점차 더욱 먼 미지의 땅으로 옮겨가게 된다. 화하족의 '서극' '서황' 관념이 계속 확장되는 것과 더불어, '서왕모의 나라'의 지리방위도 계속 서쪽으로 멀어져갔다.

 

초기의 역사사건에서 주목왕이 견융(犬戎)을 정벌한 것은 중요한 사건중 하나이다. 이는 화하족의 서방에 대한 상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서왕모와 주목왕을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결은 장기간의 양성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전국시대 혹은 더 늦은 시기에 완성된다. 서왕모전설을 일단 역사상 진실한 주목왕과 결합시키게 되자, '서극'방위는 더욱 두드러지고 명확해진다. 그리고 일종의 역사감을 갖게 된다. <사기.조세가>에는 조나라의 조상인 조보(造父)가 주목왕의 수레를 몰고 주유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주목왕은 "조보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하여, 서쪽을 순수했고, 서왕모를 만나서, 즐거워 돌아가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조나라는 자신의 조상을 모종의 전설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런 일은 고대사서에서 드문 일도 아니다.

 

장건이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면서, 중원왕조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개척하고 통제한다. 이 지역을 화하족들도 잘 알게 되면서, 더 이상 화하족들의 생각 속에서 몽롱한 상태였던 서황(미지의 땅)이 아니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이미 신비감이 없어졌으므로, 더 이상 '서왕모의 땅'과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그저 '서왕모유적'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서.지리지하>에는 금성군(金城郡) 임강(臨羌)(지금의 청해성 황중현)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임강. 서북으로 새외에 이르면, 서왕모의 석실(石室), 선해(仙海), 성지(盛池)가 있다. 북측에서 황수(湟水)가 발원해서, 동으로 윤오(允吾)에 이르러 황하로 들어간다. 서로는 수저지(須抵池)가 있고, 약수(弱水), 곤륜산사(崑崙山祠)가 있다." <진서.장준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주천남산(酒泉南山)은 바로 곤륜지체(崑崙之體)이다. 주목왕이 서왕모를 만나서, 즐거워하며 돌아가는 것도 잊은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이 산에는 석실, 옥당(玉堂), 주기루식(珠璣鏤飾), 환약신궁(煥若神宮)이 있어, 서왕모사(西王母祠)를 건립하기 적당하다." 이것들은 모두 옛기억이다. 이전의 중원인들이 이들 지역을 '서왕모의 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건이 개척하기 전에 서역은 중원인들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하서주랑이 한나라의 통치관할에 들어온 후, 중원인들은 서왕모신앙과 관련하여 서역의 이 '서극'의 땅에서 전설상의 서왕모의 나라를 찾기 시작한다. 양자간에는 당연히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한무제 본인과 궁중상하의 서왕모신앙의 영향을 받아, 장건은 서역에 도착한 후 자연히 '서왕모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에는 소위 '서왕모의 땅'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렇게 추론한다. '서왕모의 땅'은 분명 더욱 멀리 있는 '조지'라는 곳에 있을 것이다. '조지'는 장건이 안식국 장로에게 들은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인들이 서부지역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서극'(혹은 서황)인 '서왕모의 땅'은 계속 서쪽으로 더 옮겨가게 된다. 동한시기, 로마제국이 중국과 교류하게 되면서 중국인이 알게 되는 서방세계의 범위가 더욱 확대된다. 그리하여 '서왕모의 땅'은 다시 중원족이 새로 이해하게 된 '조지'보다 더욱 먼 대진(로마제국)의 먼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후한서.서역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대진국(大秦國), 일명 리건(犁鞬), 해서(海西)에 있어, 해서국(海西國)이라고도 한다.....혹은 그 나라의 서쪽에 약수, 유사(流沙)가 있다고 한다. 서왕모가 사는 곳과 가깝고, 해가 떨어지는 곳이다." 대진의 서쪽의 '미지의 땅'이 다시 '서극'이 된 후, 자연히 다시 '서왕모의 땅'과 결합되게 된다.

 

소식의 출처에 대하여 <후한서.서역전>에서 강조하는 "혹운(或云, 혹은 말하기를)"은 중국인이 접촉한 로마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장건이 강조한 '안식장로'와 마찬가지로 모두 중원인들의 '천하관' 사고방식에 견강부회한 것이다. 안식인이건 로마인이건 모두 서왕모전설은 없다. '서극'이라는 부호를 지닌 '서왕모의 땅'은 계속 서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이루어진 것은 중원화하족이 활동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이로 인해 지리적 지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원화하족의 활동범위로 인해 '역외'세계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전설상의 '서왕모의 땅'의 지리위치도 계속 서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