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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114

진나라가 멸망할 때, 남방에 수수방관한 50만대군이 남아있었는가? 글: 곽엽민(郭曄旻)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로서 대진제국(大秦帝國)의 속흥취망(速興驟亡, 빠르게 흥성하고 급격히 망하다)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의 “독부지심(獨夫之心), 일익교고(日益驕固)”하여, “수졸규(守卒叫), 함곡거(函谷擧)”까지 겨우 몇 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10여년전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역사다큐멘터리 에는 이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존망위기에 남부변방을 지키고 있던 50만 진군이 침묵을 선택했다”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만든 대제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널리 알려졌고,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확실히, 가의(賈誼)가 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진나라는 산동6국을 평정한 후, 군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 2022. 6. 6.
곤륜산(崑崙山): 신화와 현실 글: 진련산(陳連山) 북경대학 중문학과 교수 현실의 곤륜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한 줄기의 웅대한 산맥이다. 서쪽으로는 신장의 파미르고원에서 출발하여 동으로 티벳을 거쳐 칭하이(靑海)로 들어가며, 총길이는 2,500킬로미터에 달한다. 당대의 지리학자들은 곤륜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곤륜산, 중곤륜산과 동곤륜산으로 구분한다. 동곤륜산은 황하의 발원지(源頭)인 바얀카라산(巴顔喀拉山)을 포함한다. 다만, 곤륜산맥은 현대지리학개념이고, 그 명명은 현대과학자들이 고대신화의 곤륜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고대인들의 마음 속의 곤륜산은 어디에 있었고,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 곤륜산 명칭의 유래 "곤륜"은 에 나오는 서방소국의 이름이다. "곤륜"이라고 명명된 산은 에 가장 먼저 나온다. 그리고 이 명명은.. 2021. 10. 27.
한무제때 "무고지화(巫蠱之禍)"의 막후인물은 누구일까? 작자: 미상 무고(巫蠱)의 통상적인 해석은 한 무리의 독충(毒蟲)을 하나의 그릇에 넣고[고(蠱)라는 글자 자체가 벌레를 놓아두는 그릇(皿)이라는 뜻이다], 독충이 서로를 잡아먹게 한 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한 마리의 독충을 '고'라고 부르는데, 그 독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무고술의 구체적인 방법은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의 위에 저주할 사람의 이름, 생진팔자등을 쓰고 마법과 저주를 한 다음 고를 저주받을 사람이 거처한 곳 혹은 근처에 풀어주고, 이를 통해 저주받는 사람의 영혼을 통제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그럼 2천여년전에 발생했던 무고지화가 어떻게 서막을 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92년, 한무제 유철(劉徹)은 건장궁(建章宮)에서 한 남자가 검을 차고 용화문(龍華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2021. 1. 14.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왜 동생 유항(劉恒)에게 황위가 넘어갔을까? 글: 조문사(朝文社) 한혜제 유영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비록 명목상으로 황제였지만, 사실상 권력자는 모친인 여후(呂后)였다. 유영이 사망한 후, 전소제(前少帝) 유공(劉恭), 후소제(後少帝) 유홍(劉弘)이 전후로 즉위한다. 비록 이들 둘은 허수아비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황제에 오르긴 한다. 사료에 따르면, "밤에, 각각 사람을 나누어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상산왕(常山王)과 소제(少帝)를 자택에서 주살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영의 6명 아들 중에서, 2명은 황제에 올랐다. 전소제 유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반여집단(反呂集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는 반여집단의 진평(陳平), 주발(周勃)등의 옹립하에,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왜 유영의 남은 .. 2020. 11. 25.
중국역사의 비극: 깡패가 영웅을 이기다 글: 두우관주(斗牛關注) 나는 진한(秦漢)의 역사를 마음 속으로 자세히 생각해 보아왔다. 관련서적도 많이 읽으면서, 느낌 점이 많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중화민족 역사의 길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범아강한자수원필주(犯我强漢者雖遠必誅, 강한 우리 한나라를 침범하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해 버리겠다)"이런 호연지기를 펼치는 말에 심취하고있을 때, 왕왕 소위 '강한(强漢)'의 배후에 천년간 이어지는 민족의 재난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항우의 죽음은 중국인들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다)"를 기억시켰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존엄이라고는 없는 생활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유방의 성공은 후세에 가장.. 2020. 11. 21.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 2020.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