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무제114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2020. 10. 26.
비단길 중의 청해로(靑海路): 왜 힘들게 고원길을 만들었을까? 글: 고산둔정위(靠山屯政委) 비단길은 유라시아대륙을 연결시키는 주간도(主幹道)이다. 또한 중서방 경제와 문화교류의 대통도(大通道)이다. 다만 비단길은 하나가 아니었고, 3개가 있었다. 각각 주간도, 초원도(草原道)와 청해도이다. 서로 비교하자면, 청해도는 고원을 지나 가장 힘들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단길을 열어야 했을까? 1. 청해도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도로중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개의 길이다. 하나는 장안에서 서북으로 출발하여, 육반산 북부를 지나, 고원, 정변을 거쳐, 하서주랑으로 신강에 들어간 후, 다시 타림분지의 가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으로 가는 것이다. 이 길이 주간도이다. 또 다른 길은 중원지구에서 직접 북상하여, 음산산맥을 지나 거연해(居延海)로 가고 그후에 천산남.. 2020. 10. 11.
미중쟁패: 한흉(漢匈)쟁패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글: 공손책(公孫策) 미국이 중국에 정식으로 무역전을 전개한 후, 중국의 태도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관찰가들은 대부분 현단계에서 장악하고 있는 자원과 가용한 무기/수단을 가지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장기간으로 종심을 늘이는 방법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강쟁패의 가능한 결과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흉쟁패100년 여기에서 비교대상으로 삼을 시기는 기원전200년부터 기원전100년까지의 100년간이다. 배경은 흉노칸국과 진,한제국의 쟁패이다. 그 이전에 중국은 전국시대였고, 북방초원민족은 '호(胡)'로 통칭되었다. 진(秦), 조(趙), 연(燕)은 모두 장성을 건설하여 호인을 막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 2020. 10. 9.
한무제는 왜 유불릉(劉弗陵)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유불릉의 생모는 조첩여(趙婕妤)이다. 구익부인(鉤弋夫人)이라고도 불리고, 권부인(拳夫人)이라고도 불린다. 한번은 한무제가 사냥을 갔는데, 하간국(河澗國)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한무제의 곁에 있던 방사가 현지에 기녀자(奇女子)가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미신을 믿어, 사람을 보내어 찾게 했더니, 금방 한 여자를 찾아낸다. 그 여자가 바로 구익부인이다. 여자는 아주 기괴했다. 두 손을 꽉 쥐고 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펴고자 해도 펴지지 않았다. 한무제는 호기심이 발작하여, 직접 말에서 내려, 그 여자의 주먹을 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의 자하선자가 자청보검을 뽑는 사람은 하늘이 골라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마침 지존보가 자청보검을 뽑아서, 그 후에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 2020. 10. 8.
평민 유수(劉秀)는 황제에 오르면서 왜 "한(漢)"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을까? 글: 심야요재(深夜聊齋) 한(漢)나라는 전후로 400년간 지속되는데, 둘로 나뉜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나중의 북송(北宋), 남송(南宋)과는 달리, 서한과 동한의 사이는 끊어져 있다. 중간에 왕망(王莽)의 신(新)왕조가 있었다. 다만, 한동안 '신'왕조는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왕망은 황위를 찬탈한 인물로 덕이 없다고 여겨져서, 왕조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왕조의 중후기 당시의 사회 각계층에도 한왕조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비교적 두드러진 것은 유씨종실(劉氏) 종실의 인물들 중에서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대부분은 가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무제의 증손자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였.. 2020. 6. 11.
곽광 vs 상홍양: 한무제의 두 탁고대신은 왜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그때는 염철회의 대변론 후의 다음 해였다. 즉 한소제 원봉원년(기원전80년) 구월, 잘나가던 상홍양(桑弘羊)은 시종 자신의 경력과 공로가 모두 곽광(霍光)보다 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치적인 지위는 곽광보다 낮은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 2019.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