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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by 중은우시 2023. 2. 25.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국민당통치를 비판한다.

 

1945년, 오함은 민주청년동맹을 도와 비밀인쇄소를 설립하고, 중국공산당의 문건과 모택동저작을 인쇄한다.

 

1946년 8월, 오함은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으로 돌아와 청화대학 역사학과의 교수가 된다. 이때 호적은 이미 미국에서 귀국하여 북경대학 교장에 취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제 두 사람은 근 10년간 헤어져 있었는데, 호적은 굳건한 반공인사가 되어 있었고, 오함은 국민당과 불공대천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호적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함은 아쉽게도 길을 잘못 들었다."

 

1949년 1월 3일, 오함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중공에 가입하겠다고 요구한다. 14일, 모택동은 오함에게 보내는 회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요구에 동의한다. 다만 시기는 좀더 검토해봐야겠다. 상세한 사정은 주은래 동지를 만나서 얘기하라." 며칠 후, 주은래가 오함을 찾아와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에게 상세하게 모주석이 그를 잠시 당외에 남아있도록 하는 원인을 설명한다. 주은래는 이렇게 말한다. 당중앙에서는 현재 그가 당외인사의 신분으로 남아있는 것이 공산당이 다른 당파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보아, 잠시 그의 입당을 보류한다는 것이다.

 

1949년 중공이 북평을 점령한다. 오함은 북경대학, 청화대학을 접수하는 업무에 참가하고, 개국대전에 참가한다. 나중에 1,2,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정협위원, 민맹북경시주임위원, 민맹중앙부주석등의 직위를 지낸다. 11월부터 오함은 북경시 부시장을 맡는다.

 

1952년 7월 21일, 오함은 다시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 한번 입당을 요구한다. 다음 날 모택동이 비시(批示)를 내린다: "내 뜻은 잠시 입당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 뜻은 오함이 당외인사의 신분으로 남아있는 것이 중공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1953년, 북경시는 패루(牌樓)철거작업을 준비한다. 양사성(梁思成)은 북경고성을 보호할 것을 주장했으나, 오함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신중국의 수도를 봉건주의의 기념관으로 만들 생각인가?" 양사성은 회의에서 여러번 화가 치밀어 눈물까지 흘린다. 최종적으로 모택동의 한 마디로 정리된다: "베이징에서 패루를 철거하고, 성문에 구멍을 내는데도 우는 사람이 있다니. 이건 정치문제이다."

 

그리하여, 1954년 1월부터, 북경의 패루는 대규모로 철거된다. 1969년까지, 내성의 성벽은 모조리 철거된다. 모택동은 천안문성루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후 이곳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모두 연통일 것이다." 이에 따라, 팽진(彭眞)은 이런 건의까지 했었다: "천안문을 철거하고 국무원건물을 짓자. 그리하여 봉건적이고 낙후된 것에 강력한 타격을 가하자."

 

1955년, 오함은 곽말약(郭沫若), 심안빙(沈雁氷), 등탁(鄧拓)등 문인들에게 <명장릉(明長陵)발굴에 관한 청시보고>를 써서 보낸다. 당시 반대의견이 아주 많았다. 고고학전문가 하내(夏鼐)는 명릉발굴을 극력 반대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능묘를 발굴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파내는 것은 쉬우나, 보호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집권후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고고학도 그 중의 하나였다. 주은래는 보고서에 서명하여 발굴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오함이 명십삼릉의 정릉(定陵)발굴을 주도하게 된다. 지궁(地宮)을 열고난 후 그 안에 있던 무수한 진귀한 문화재들이 신속히 탄화되어 대부분 엄중하게 파괴된다. 정릉발굴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나중에 액운을 맞이하고 선종하지 못한다. 발굴지휘를 맡았던 정진탁(鄭振鐸)은 비행기사고로 죽고, 관을 열때 촬영을 맡았던 사진기사 류덕안(劉德安)은 목매어 죽고, 고고전문가 백만옥(白萬玉)은 말련에 정신이상이 되고 뇌일혈로 죽는다....현지 농민은 버려진 관짝을 주워서 썼는데, 7명이 원인불명으로 죽어버린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홍위병은 만력제의 유골을 광장으로 끌고나와 "비투(批鬪)"하고, 마지막에는 유골을 불질러 없애버린다.

 

1957년 '반우(反右)'때, 오함의 주재하에 민맹 <광명일보>지부는 앞장서서 저안평(儲安平)을 비판한다. 오함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 국민당은 확실히 '당천하'였다. 저안핑은 현재 공산당이 '당천하'라고 말한다. 이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일 뿐아니라, 의도도 악독하다." 그는 저안평의 뒤에는 누군가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광명일보>의 민맹원들은 저안평과 관계에서 확실히 선을 그으라고 요구한다.

 

"장라연맹(章羅聯盟)"을 비판하는 대회에서 오함은 당조직에 그가 비밀리에 남겨둔 편지 한통을 바친다. 그것은 1948년 나융기(羅隆基)가 그에게 홍콩민맹지도자에게 전달해달라고 건네준 것이다. 서신에는 나융기가 홍콩민맹에게 민맹자주를 견지하고 중공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요구했다. 그후 오함은 <나는 분노한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장편의 발언을 한다: "장백균(章伯均), 나융기의 반당, 반사회주의활동은 일관되었고, 조직적이고, 배치적이며, 계획적이고, 전략적이며, 최종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각방면의 반동분자들과 혀력하며 이공동공(異曲同工)으로 상호 호응했다...그들 일당은 인민의 흉악한 적이다!" 오함의 분노섞인 '고발'로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다. 나융기는 1965년에 죽고, 장백균은 1969년에 죽는다. 저안평은 생사불명이 된다.

 

1957년 3월,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아, 8년간의 신청을 거쳐 결국 오함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러나, "오함을 당외인사의 신분으로 남아 공산당을 도와 다른 당파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원인으로 인하여, 오함이 죽을 때까지, 북경시위의 소수지도자들만이 오함이 입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의 당원신분은 여전히 기밀로 유지했다.

 

일찌기 1940년대에, 오함의 학술연구는 순수학술연구를 벗어나, 정치를 역사학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오함은 유물주의사학을 한다. 공개장소에서 오함은 모택동이 그의 <주원장전>에 대해 제기한 수정의견이 얼마나 영명한지 언급하면서, 주원장 문자옥의 잔혹한 사례들을 삭제한다.

 

1959년 4월, 모택동은 상해회의에서 해서정신(海瑞精神)을 학습할 것을 제창하며, 당내의 고위간부들이 당의 사업을 위해 용감하게 발언해야 하고, 이것을 무서워하고 저것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모택동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해서가 용감하게 의견을 내놓고, 황제까지 욕을 했는데, 우리들 공산당원들은 어찌 한 역사상의 이런 인물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을 시켜 해서에 대해 글을 쓰게 한다. 호교목(胡喬木)의 건의하에 오함이 <해서매황제(海瑞罵皇帝)>를 쓴다. 이어서 오함은 다시 <논해서(論海瑞)>를 써서 해서가 직언간언한 특성을 얘기한다. 당시 여산회의때 국방부장 팽덕회(彭德懷)는 만언서를 써서 '인민공사' '대약진'등 소위 '삼면홍기'가 전국인민에 조성한 재난을 지적했다. 모택동은 대노하여 팽덕회를 가짜해서이고 '우파'해서라고 말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함은 <논해서>를 발표하면서, 정치에 봉사하고, 현실에 연계하기 위하여, 문장의 첫부분에 이런 내용을 추가한다. 자신의 글에서 찬양하는 것은 '진실을 감히 얘기하는' 진짜해서이지, 팽덕회같은 가짜해서는 아니라고.

 

경극(京劇) 배우인 마련량(馬連良)은 오함의 <논해서>를 본 후에 오함에게 해서의 극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1961년 11월 마련량은 <해서파관(海瑞罷官)>을 공연하고, 큰 인기를 끈다. 당시 모택동도 마련량을 집으로 불러 같이 식사하면서 극이 좋다고 칭찬했다.

 

1962년, 오함은 <북경일보> 기자와의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다: "호적은 나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을 준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지식은 주로 스스로 배운 것이다." 비록 오함이 학술적으로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옛날에 호적과 부사년(傅斯年)이 가르쳐준 덕분이다. 그러나 정치적입장으로 인하여, 그는 이미 호적을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姚文元)이 <문회보(文匯報)>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논한다>라는 글을 발표한다. 거기에서 "<해서파관>은 향기를 내는 꽃이 아니라, 한 그루의 독초이다."라고 말한다.

 

"5.16통지"이후 오함은 '반동학술권위', '반당반사회주의자산계급의 대표인물'이라는 레테르가 붙는다. 오함의 7살된 아들 오창(吳彰)은 경산학교(景山學校)에서 같은반친구들에게 '아주 나쁜 놈'의 아들이라고 놀림받는다. 선생은 오함의 아들, 딸에게 오함을 비판하도록 요구한다. 오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오함 부부에게 비판원고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한다.

 

1966년하반기부터 1968년 3월까지, 근 2년동안 오함은 거의 매일 끌려나가 비판받는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베란다에 등받이없는 의자위에 서서 손에 홍보서(紅寶書)를 들고 건물아래의 혁명군중에게 죄를 인정해야 했다.

 

아들 오창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영원히 그들이 부친을 무릎꿇려서 땡볕아래 고목나무에 묶어두고, 그의 목에 뜨거운 모래를 부운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가죽허리띠로 그를 때렸고, 그의 머리카락을 뽑았으며, 그의 귀를 비틀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를 모욕했다. 부친은 삼일이면 두번 끌려나가 유투(遊鬪)당했다. 학교에서도 당하고, 구에서도 당하고, 현에서도 당했고, 여기서도 당하고, 저기서도 당했다." 오씨집안의 대문앞과 마당에는 "교사(絞死, 목졸라죽이다)", "잡란(砸爛, 부수어 엉망으로 만들다)"등의 표어가 가득 붙어 있었다. 수장하고 있던 진귀한 고서적도 모조리 빼앗기고, 오함의 모든 원고와 메모카드도 '반당반사회주의의 흑재료'로 취급되어 몰수당한다. 

 

비투 초기에는 오함의 일가족이 북장가(北長街)의 원래 주소에 머물렀으나, 나중에는 집에서 쫓겨난다. 홍위병은 그와 처 원진으로 하여금 매일 북장가 거리를 청소하게 시켰고, 수시로 모욕하고 때렸다. 매번 얻어맞은 후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절룩거리면서 거처로 돌아와 몸의 핏자국을 닦아내곤, 몰수당한 후 겨우 남아있던 책들 중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저작을 찾아내 읽곤 했다.

 

1966년 3월, 모택동은 명확히 표시한다: "오함와 전백찬(翦伯贊)등은 공산당원이지만, 반공인사이고, 실제로는 국민당원이다." 동시에 모택동은 상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함이 그렇게 많은 반동적인 글을 발표했는데, 중앙선전부가 전혀 막지 못했다. 그 달에 오함은 바로 체포된다. 다음 달, 처인 원진은 '노동개조대'로 보내어져 '군중전정'을 당한다. 얼마 후 두 다리가 마비되고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난다.

 

1969년 10월 11일, 오함은 옥중에서 자살한다. 죽기전에 머리카락은 다 뽑혀 있었다. 오함의 자녀는 그후 통지를 받는다: "드러내지도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말라. 반드시 오함과 선을 그어야 한다." 오누이는 그저 내의에 검은 천을 달아서 부친을 애도해야 했다. 

 

딸 오소언(吳小彦)은 1973년에 신경착란을 일으킨다. 1975년 가을 '반격우경번안풍'운동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1976년 9월 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중공의 정치운동 속에서 오함의 일가족 4명중 3명이 죽는다.

 

1979년 7월, 중공은 오함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