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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죽음

by 중은우시 2023. 3. 3.

글: 서민(徐敏)

 

1959년 12월 특사를 받은 마지막 황제 부의는 보통사람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다섯째 여동생의 집에 반달간 머물다가 숭문문(崇文門) 안의 정부가 안배해준 한 여관(旅館)에서 지냈다. 다음 해 봄에 민정국은 그에게 소개장을 한장 써주고 그를 식물원(植物園)에서 근무하게 해준다. 식물원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다시 전국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회에서 근무한다. 월급여는 100위안이었다.

 

생활이 안정된 후, 부의는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의 소개를 받아 간호사인 이숙현(李淑賢)과 부부가 되어 몇년간 편안하게 지낸다. 나중에 소변에 피가 묻어나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요독증(尿毒症)이 된다.

 

1967년 10월 4일 오전, 이숙현은 부의와 함께 협화의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간다. 이때 부의는 이미 허약해져 있었다. 두 다리의 부종이 심했고,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빴다. 그래도 몇걸음 걸을 수는 있었다. 이날 오후 집안에 손님들이 몇몇 찾아온다. 부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끄러운 것이 좋았다. 비록 병세가 위중했지만, 손님들이 남아서 같이 식사하기를 원했고, 그도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집안에 고용한 보모는 요리실력이 괜찮았다. 부의는 이미 며칠간 식욕이 없었지만, 이날은 밥 두 그릇을 먹고 요리도 적지 않이 먹었으며, 술도 몇모금 마셨다. 저녁 9시가 넘어 손님들이 떠난다. 부으는 직접 손님들은 문밖까지 배웅한다. 그러나 손님들이 떠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부의의 요독증이 재발한다. 당시 그의 곁에는 오직 이숙현 한명뿐이었다. 부의의 배뇨를 위하여, 그녀는 여러가지 방법을 썼지만, 어떻게 해도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이숙현은 10월 5일 새벽 5시부터 정협에 전화를 걸처 차를 보내달라고 하나,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았다. 택시회사에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를 않았다. 이숙현은 할 수 없이 길거리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겨우 호국사에서 택시 한대를 불러올 수 있었고, 부의를 태워 인민의원 응급실로 간다. 이때는 시간이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12시간동안 어느 의사도 그에게 아무런 응급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원인은 누군가 '봉건황제'를 입원시켜 치료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이숙현은 뜨거운 솥의 개미처럼 이러저리 뛰어다녔다. 정협의 지도자들은 한명도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부의의 동생 부걸(溥傑)에게 부탁하여 심덕순(沈德純) 부주임에게 알렸고, 그가 의원에 전화를 걸어 치료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부의를 받아주어야할 비뇨기과는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부의를 내과병실로 보낸다.

 

부의는 병실에 입원한 후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천식도 심했을 뿐아니라, 조금 통했던 요로도 다시 막힌다. 그리하여 급히 오줌을 배출시켜야 했지만, 아무도 그를 위해 오줌을 배출시켜주려 하지 않았다. 이숙현은 하루종일 뛰어다니다가 저녁 9시가 되어서 겨우 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약간 먹고, 다시 급하게 병원으로 가서 병석을 지켰다.

 

내과병동은 원래 요독증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다. 당시 부의가 누워있던 병상을 담당하는 의사인 왕모(王某)는 아주 귀찮아 했다. 부의는 오줌을 누지 못해 배가 임신9개월짜리 임산부처럼 불렀고, 심하게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숙현은 상황이 긴급하자 급히 왕의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왕모는 싸늘하게 말한다: "환자는 많다. 너 혼자만이 아니다. 그걸 모르느냐!" 이숙현은 할 수 없이 비뇨기과의 주임의사 맹모를 찾아간다. 부의의 병세로 보아 마땅히 그가 치료해야 했다. 이숙현이 맹의사에게 거의 무릎만 꿇지 않았지 애걸복걸하면서 부의가 곧 죽게 생겼으니 한번만 가서 봐달라고 호소한다. 맹의사는 마침내 부의의 병상까지 갔지만, 배뇨를 하지 못해 부풀어오른 배를 보고는 그저 몇분간 서 있으면서 웃음을 짓고는 그냥 가버린다. 그후에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10월 6일 부의는 이숙현을 불러 광안문(廣安門) 중의연구원으로 가서 포보주(蒲輔周) 노선생을 모셔오라고 말한다. 포보주는 경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중의였다. 포선생은 병원으로 와서 부의를 진맥하고 처방을 내려준다. 그리고 위로하는 말도 몇마디 해준다.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천자'는 남은 목숨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오후, 이숙현을 집으로 물건을 가지러 갔다. 부의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소매(小妹): 나는 기가 허한 것같다. 올 때 반드시 '자하거(紫河車, 태반가루)'를 가져와라. 오늘 저녁에 먹을 수 있도록."

 

그날 이숙현은 하루종일 밤낮으로 병세가 위중한 부의의 곁을 지켰다. 귀에는 부의가 계속하여 "오줌을 누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것같았다.

 

10월 8일, 송희렴(宋希濂)과 양백도(楊伯濤)가 병원으로 부의를 위문하러 왔을 때, 옛날의 황상은 이미 산소와 포도당주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의가 죽기 전의 마지막 시간에 비록 환경이 험악했지만, 적지 않은 친구들이 한명 한명 그를 보러 와주었고, 그의 병세가 침중한 것을 보고 슬퍼하며, 그가 '문혁'때 박해를 받은 것에 불평을 쏟아냈다.

 

부의의 당시 치명적인 문제는 배뇨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요중독이 되어, 수시로 관을 통해 오줌을 배출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 간호사는 부의를 너무 돌보다가는 '봉건황제를 동정한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우려하여 관을 통해 오줌을 배출해주는 것을 꺼렸다.

 

1967년 10월 12일, 부의는 일생중 마지막 일기를 적는다.

 

그는 원래 포보주 선생이 처방해준 처방전을 일기에 옮겨적으려 했다. 그러나 꾸불꾸불하게 7,8개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쓰고는 더 이상 붓을 쥘 힘이 없었다. 그날은 이숙현이 중의연구원의 포보주 선생에게 약방문을 받아서, 약을 지을 때 인삼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동성약점에 갔는데 거기서도 구하지 못하고, 서성약점에 가서 비로소 인삼을 구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약을 달인 후에 다시 병원으로 가서 한모금 한모금 부의에게 먹였다. 부의는 중의를 믿었고, 임종때까지 포보주가 처방해준 약을 먹었다. 그러나 중약을 다 먹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부의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작은 병실로 바꾸어준다. 이 병실은 너무 좁아서, 나무의자를 놓을 수도 없었다. 이숙현은 할 수 없이 작은 등받이없는 의자 두 개를 병실문앞에 놓고, 밤이면 거기서 잠을 잤다. 십여일동안 이렇게 지내다보니 사람이 형편없이 말랐고, 체중이 10여근 빠진다.

 

부의가 위중할 때, 이숙현은 직접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고,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일부 사람들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인심이 얼마나 험악한지 깊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의료보험체제에 따르면, 부의의 공비(公費)의료관계는 인민의원이다. 그가 1962년 5월 요혈을 발견했을 때, 바로 이 병원의 비뇨기과주임 맹의사가 검사하고 치료했다. 맹의사는 철저히 검사를 하지 않고, 그저 '전립선염'으로 치료해서, 3년간이나 잘못 진단하고 잘못 치료했던 것이다. 1965년, 주은래의 비시를 받아 비뇨기과 전문의사인 오계평(吳階平)과 외과와 암분야의 전문의가 진료를 했고, 비로소 진정한 병명을 찾아내게 된다. 맹의사도 회진에 참가했었다. 사후, 정협의 지도자들이 회진한 의사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할 때, 맹의사의 이름을 거명하며 비난한 바 있다.

 

이번에 부의의 병세가 위급하여 입원했지만, 비뇨기과에서 받아주지 않은 것은 맹의사가 중간에서 장난을 친 것이라고밖에 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 16일 밤10시, 병세가 위중한 부의는 그를 보러 온 범한걸(范漢傑)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국가에 할 일이 남아 있다."

 

다음 날 저녁, 부의의 병세는 악화되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아주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맑았다. 당직의사는 부의에게 연속으로 주사를 3번이나 놓는다. 그중 한번은 테오필린이다. 이숙현은 그 틈을 타서 화장실을 간다. 병실로 돌아왔을 때 부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에게 테오필린을 놓아달라. 정말 죽겠다!" 이 말이 마지막 말이었다. 이숙현은 간호사 출신이다. 자세히 부의의 눈을 들여다봤는데, 이미 동공이 풀려 있었다. 이웃의 왕채운(王彩雲)이 급히 부의에게 인공호흡을 시켰고, 이숙현은 간호사를 불러 혈압을 쟀는데, 혈압이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부의는 이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뜨고 이숙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목에서는 그렁그렁하는 소리가 났다. 이숙현은 그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부걸에게 전화를 건다. 부걸은 빠르게 병실로 왔고, 부의는 둘째동생을 보자 비로소 마지막 숨을 거둔다. 시간은 1967년 10월 17일 2시 30분이었다. 곁에는 이숙현과 부걸을 제외하고 셋째여동생의 아들인 종광(宗光)과 왕채운이 있었다.

 

이숙현은 부의의 몸에 엎드려 통곡한다. 왕채운이 곁에서 그녀에게 말한다. 울기만 하지 말고, 후사도 처리해야 한다고. 

 

그제서야 후사를 아무 것도 준비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부의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 싫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갈아입을 옷조차 준비해놓지 않았다.

 

부의가 병실에서 입고 있던 옷은 회색겉옷이었다. 아래에는 내복과 양말이었으며 바깥에는 입원환자에게 입혀주는 환자복이었다. 부의가 숨을 거두자, 환자복은 벗기고 간호사가 와서 하얀 천을 덮어 주었다. 그후 밀것에 태워서 태평간(太平間, 영안실)로 보낸다. 이숙현등 몇사람은 모두 통곡을 하면서, 부의를 호송하여 병실을 떠난다.

 

그날 오전, 왕채운과 또 다른 이웃인 장걸영(張傑英)이 이숙현과 함께 병원의 '태평간'으로 가서 부의에게 옷을 입힌다. 부의는 한쪽 눈을 뜨고 있었고,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숙현은 그에게 말한다: "부의. 안심하세요. 나를 걱정하지 말고..." 한편으로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손을 덮어 부의의 눈을 감겨주고, 입을 다물어주었다. 부의는 평소에 의표(儀表)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항상 머리는 깨끗하게 빗었고,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았다. 이숙현은 남편의 그런 습관을 잘 알고 있어서 특별히 머리카락을 잘 빗어준다.

 

얼마 후, 애신각라 가족들이 차례로 병원에 도착한다. 여러 사람들이 권하여 이숙현을 태평간에서 데리고 나온다. 

 

다음 날, 주은래가 사람을 보내어 문상한다. 그리고 이숙현에게 총리의 조의를 전한다. 부의의 사후처리에 대하여, 주은래는 명확히 지시를 내렸다: "부의의 유체는 화장할 수도 있고, 매장할 수도 있다. 가족의 의견에 따라서 혁명공묘, 만안공묘 및 기타 묘지를 선택하거나 유골함을 안치할 수 있다." 당시의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여, 가족은 매장을 포기한다. 부걸이 절차를 마친 후, 영구차로 유해를 화장장으로 데려간다. 당시에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은 이숙현과 부걸등 몇 사람에 불과했다. 유체고별의식도 없었다. 화장후, 이숙현은 큰 유골함을 사려고 했는데, 없다고 해서 5위안짜리 작은 유골함을 구해서, 부의의 유골을 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