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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48

적벽대전: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화공이 아니다?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역사상 적벽대전은 한말 삼분천하의 정치국면을 결정한 중대사건이다. 의 가공을 거쳐, 특히 설전군유(舌戰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타황개(周遊打黃蓋), 화소적벽(火燒赤壁)등의 이야기로손류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 민간기억을 채워놓았다. 그렇다면, 위, 촉, 오 삼국정립 국면을 확립시킨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승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정말 손류연합군이 동풍을 빌어, 조조의 전선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조의 군대가 패배하게 된 것일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이 삼국연의의 사고범위를 넘어, 역사로 되돌아가 더.. 2023. 8. 14.
명나라말기의 농민군은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을 병법서로 활용했다. 글: 역사D학당(歷史D學堂) 명나라말기에 중국의 대지는 풍운변환(風雲變幻)하여 전쟁이 지속되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관료들과는 달리,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반란군을 지휘하여 싸울 때, 그들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참고한 병법서는 대체로 , 등의 소설이었다. 청나라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장헌충(張獻忠), 이자성(李自成)등의 무리는 "처음에는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기율이 없었다" 그라나 나중에 성을 점령하고 지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세력이 커진다. 그들이 '점점 지혜를 갖게 된' 원인은 바로 "듣기로 모두 의 전투사례는 그들이 전투할 때 유일하게 참고하는 비본(秘本)이었다." 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서, 과 는 실용성과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이 소설을 보배처럼 여긴 것이다. 멀리 .. 2023. 3. 12.
손책(孫策)은 강동을 평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재를 거두었을까? 글: 역사대작회(歷史大炸燴) 손책(孫策)의 강동을 평정하기 위한 발걸음은 195년(이전인 194년에 원술은 일천여명을 손책에게 귀속시키고, 부친 손견도 이전에 부하들을 손책에게 넘겨준다) 장강을 건너 유요(劉繇)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200년까지, 전후로 오현(吳縣), 회계현(會稽縣), 단양현(丹陽縣), 예장현(豫章縣), 여릉현(廬陵縣, 예장현에서 분리됨), 여강현(廬江縣)등 강동육현(江東六縣)을 차지한다. 그 기간은 6년이 걸렸다.이것이 강동의 기반이고, 동오의 기반이다. 손책은 수천명으로 강동을 휩쓸면서 약한 집단에서 강한 집단으로 거듭난다. 그 동안 그가 거두어들인 사람의 수는 날로 늘어났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두명의 도독(都督), 네명의 명신(名臣), 일곱명의.. 2023. 2. 27.
삼국연의의 5대 궁술고수는...? 글: 초급칠품소지마관(超級七品小芝麻官) 사실상, 삼국연의의 적지 않은 무장들은 모두 활을 사용하는데 아주 능했다. 예를 들어 위연(魏延)은 일찌기 한중전투(漢中之戰)때 화살 하나로 조조(曹操)의 앞이빨을 맞춘 적이 있으며, 강유(姜維)는 위나라군대와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맨손으로 화살을 붙잡은 다음, 자신의 활로 쏘아서 적을 맞추어 죽인 바 있다. 태사자(太史慈)는 성밖에 서서 활을 쏘아 성을 지키는 병사의 손이 나무에 박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궁술이 아주 뛰어난 인물들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랭킹5위이내의 화살고수를 따진다면, 아래에서 소개하는 다섯 명을 얘기해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무장(武將)의 전투력을 비교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자연히 백병전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22. 11. 28.
동오(東吳) 역사상 3차례의 탁고(托孤): 1차례 성공, 2차례 실패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2022. 11. 17.
소교(小喬)는 주유(周瑜)의 정실부인이었을까? 글: 이치아(李治亞) 소교는 동한말기의 미녀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두목(杜牧)의 싯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郞便),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 이를 보면, 시인의 마음 속에 조조가 동오를 공격한 목적은 그저 강동이교를 포로로 잡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대교와 소교는 친자매로 모두 당시 첫째 둘째가는 미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교는 주유의 정실부인이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역사자료 의 기록을 보자: "당시 손책은 형주를 공격하여 취하고자 하여, 주유를 중호군으로 삼고 강하태수의 직위를 주어 환(皖)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당시 교공(橋公)의 두 딸을 얻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은 스스로 대교를 거두고, 주유는 소교를 거둔다(策自納大橋, 瑜納小橋)"(고대에 .. 2022.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