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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소교(小喬)는 주유(周瑜)의 정실부인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1. 10.

글: 이치아(李治亞)

 

소교는 동한말기의 미녀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두목(杜牧)의 싯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郞便),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 이를 보면, 시인의 마음 속에 조조가 동오를 공격한 목적은 그저 강동이교를 포로로 잡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대교와 소교는 친자매로 모두 당시 첫째 둘째가는 미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교는 주유의 정실부인이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역사자료 <주유전>의 기록을 보자: "당시 손책은 형주를 공격하여 취하고자 하여, 주유를 중호군으로 삼고 강하태수의 직위를 주어 환(皖)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당시 교공(橋公)의 두 딸을 얻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은 스스로 대교를 거두고, 주유는 소교를 거둔다(策自納大橋, 瑜納小橋)"(고대에 橋와 喬의 성씨는 서로 바꾸어 쓰기도 했다)

 

소위 처는 반드시 여자가 예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위는 있어야 한다. 소위 정치혼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대교와 소교는 아마도 원술(袁術)의 대장 교유(喬蕤)의 딸들일 것이다. 교국로(喬國老)는 <삼국연의>에서 허구로 만든 이야기이니 사실로 볼 필요가 없다. 그 교국로는 교현(喬玄)인데, 한나라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지위도 높고 권세도 있었다. 그러나 생활범위는 하남성 상구로 한정된다. 한번도 강남으로 내려온 적이 없다. 그러나 주유의 지위도 아주 높았다. 그의 증조부는 상서령이고 조부는 사공, 큰아버지는 태위였다. 전형적인 관료집안이다. 

 

그외에 주유전의 문자를 보자. 중국고대에 남자가 여자를 부인으로 맞는데 사용하는 동사는 주로 3가지이다: "상(尙)", "취(娶)", "납(納)". 신하가 황실의 공주를 부인으로 맞을 때는 "상"이라는 단어를 쓴다; 황실자제가 황후, 왕비를 들일 때는 정실이더라도 "납"을 쓴다; 나머지 집안에서는 정실부인의 경우에는 반드시 "취"를 쓰고, "납"을 쓰는 것은 첩인 경우이다. 소위 "취처납첩(娶妻納妾)"인 것이다.

 

그리고 주랑이 소교를 부인으로 맞을 때의 나이를 보면, 개략 197년으로, 당시 주유는 이미 스물넷이다. 스물네살의 남자라면 조혼이 성행하던 당시에 분명히 이미 결혼했을 것이다. 이교의 부친인 교유는 당시 원술의 수하 명장이었다. 손책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술의 대장 교유, 장훈은 모두 손책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사정을 보면 손책이 그를 '교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교유는 197년에 사망한다. <원술전>의 기록에 따르면, 197년 육월 원술이 죽은 후, 그의 가족과 '부곡남녀(部曲男女)(즉 원술 부하의 가족)'는 환성(皖城)으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육개월후 손책은 환성을 함락시키고 이교를 얻는다. 그리고 그녀들이 이전에 "유리(流離)"했다고 말했다. 부친이 전사하고 환성으로 도망온 등의 참상이 일어난 시간과 처지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외에 환성을 함락시킨 후 이교외에 지위가 보다 고상한 원술의 딸 원부인도 나중에 손권의 비빈이 된다. 그렇게 보면, 손책과 주유가 교유의 두 딸을 첩으로 거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에 부합한다. 손책, 주유가 이교를 거둔 것은 어떻게 보면 교유에 대한 보답이라고도 할 수 있고, 원술의 잔여세력을 회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처이건 첩이건 주유와 소교의 관계는 아주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했다. 주유는 원래 풍류를 알고 우아한 인물이다. 그리고 문무를 겸비했다. "곡을 잘못 연주하면, 주랑이 돌아보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누가 주유의 정실부인인지에 대하여 자료는 없다. 당시에 주랑은 분명 정실부인을 취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