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말기의 농민군은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을 병법서로 활용했다.

by 중은우시 2023. 3. 12.

글: 역사D학당(歷史D學堂)

 

명나라말기에 중국의 대지는 풍운변환(風雲變幻)하여 전쟁이 지속되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관료들과는 달리,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반란군을 지휘하여 싸울 때, 그들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참고한 병법서는 대체로 <수호전>, <삼국연의>등의 소설이었다. 

 

청나라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장헌충(張獻忠), 이자성(李自成)등의 무리는 "처음에는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기율이 없었다" 그라나 나중에 성을 점령하고 지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세력이 커진다. 그들이 '점점 지혜를 갖게 된' 원인은 바로 "듣기로 모두 <삼국연의>의 전투사례는 그들이 전투할 때 유일하게 참고하는 비본(秘本)이었다."

 

<손자병법>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서, <수호전>과 <삼국연의>는 실용성과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이 소설을 보배처럼 여긴 것이다. 멀리 동북의 변방에 있던 누르하치도 마찬가지로 이 소설들을 특별히 즐겨읽었다.

 

"본조(청왕조를 말함)가 입관(入關,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 북경을 점령한 것을 가리킴)하기 전에, <삼국연의>를 번역하여 병략(兵略)으로 삼았다." 청나라도 <삼국연의>를 번역하여 공부하는 외에, 배운 것을 실제로 써먹었다. 홍타이시(청태종)는 대명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이간계로 죽였는데, "그것은 공근(公瑾, 주유)이 장간(蔣幹)을 속인 지략"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었다.

원숭환

그리고 강희제때 이르러, 황제는 "조서를 내려 <삼국지연의>를 1천부 인쇄하여 만주, 몽골의 각로 총병, 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병서로 삼게 하라"고 한다.

 

<수호전>과 <삼국지>는 중국의 고전명작이며 휘황찬란한 두 개의 보석과도 같은 소설들이다. 더더욱 고귀한 점은 문학적인 속성을 제외하고, 군사모략적인 측면에서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송(宋)나라가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반 부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리다)했다면, 명말청초는 양부소설득천하(兩部小說得天下, 두 권의 소설로 천하를 얻다)했다고 할 수 있다. 

 

1. 전략

 

<수호전> <삼국연의> 두 소설은 모두 '농민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군사전략의 층면에서 본다면, 두 소설이 치중하는 측면은 기실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두 소설이 후세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쳤다는데서도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삼국연의>는 오랫동안 통속역사교과서 및 군사작품으로 인식되어왔다. 그 영향하에, 후세에 많은 역사연의류의 소설이 나타난다; <수호전>은 나중에 고전영웅이야기, 내지 무협소설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다. 개략 인물에 대한 묘사가 파란만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욱(荀彧)이 말한 "봉천자이종중망(奉天子以從衆望)"이라든지, 제갈량(諸葛亮)이 제시한 "융중대(隆中對)", 노숙(魯肅)이 앞장서서 주장한 "손류연합항조(孫劉聯合抗曹)", 사마소가 정한 "멸괵취우지계(滅虢取虞之計, 먼저 서촉을 취하고, 수륙병진하여, 동오를 집어삼킨다)". 이런 것들은 제출되었을 당시에는 국면을 뒤집는 효과가 없었고, 심지어 의심까지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그것들은 모두 "불세의 전략"이었다.

 

<중국전략원리해석>이라는 책에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전략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 착안하여, 역량을 운용하여 대항하여 승리를 추구하는 과학이자 예술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기적인 속성때문에 '시원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수호전>의 인물들에게 거의 "장기적인 전략성"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양산박(梁山泊)은 유토피아적인 존재이다. 그들의 병마는 수만에 이른다(서로 다른 계산방식에 따르면 심지어 전성기때 십만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거점은 양산박 한 곳이다. <손자병법>의 "내외지비(內外之費), 빈긱지용(賓客之用), 교칠지재(膠漆之材), 거갑지봉(車甲之奉), 일비천금(日費千金), 연후십만지사거의(然後十萬之師擧矣)"(국내외로 쓰는 비용, 책사와 모사를 쓰는 비용, 무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아교, 칠등 재료에 드는 비용, 전차와 갑옷에 드는 비용이 하루에 천금이 든다. 이런 돈을 마련한 후에 비로소 십만의 병사를 출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산채에 사는 자들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그들의 전략은 바로 마을들을 공략함으로써 양초(사람이 먹는 양식과 말이 먹을 풀)를 구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송강에 내놓은 '초안지계(招安之計, 송나라조정에 투항하는 것)'도 전략이라고 억지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붙인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전략이 기대는 것은 오직 송강의 명망이기 때문이다. 그의 심복인 무송, 이규등도 받아드들이지 못했고, 양산박의 지낭인 지다성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전략은 '역량을 운용하여 대항하여 승리를 추구하는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의 '삼분천하'를 제외하고 다른 모사들의 전략목표는 거의 모두 달성된다. 그러나, <수호전>에서 제기된 전략은 기본적으로 모두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초안"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양산박 영웅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만일 "초안"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마을들을 계속 털어봤자, 결국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십만병력이라고 해바야 많아면 많지도 않고, 적다면 적지도 않아서, 겨우겨우 자신을 지키기야 하겠지만, 결국은 방대한 관병들과 오래 버티지는 못했ㅇ르 것이다. 영원히 '즐겁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명해진다. 왜 명청의 많은 농민군들이 모두 "<삼국연의>의 전투사례는 그들이 전투할 때 유일하게 참고하는 비본(秘本)"이 되었는지.

 

2. 전술

 

<수호전>도 당연히 참고할만한 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병법서로 활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호전>의 기이하고 궤이한 전술과 모략은 절묘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삼국연의>와 비교하더라도 절대로 손색이 없다.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상병벌모(上兵伐謀, 가장 뛰어난 병법은 적의 계책을 깨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양산박의 지낭들은 이미 '상병벌모'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내놓은 계책은 <삼십육계>등 병서들과 암중으로 부합하는 점이 아주 많다.

 

조개(晁蓋)등의 지취생신강(智取生辰綱)은 바로 생생하게 '철수개화(鐵樹開花)"의 계모를 보여준다. 철수(쇠로 만든 나무)는 원래 꽃이 피지 않는다. 그러나, "국면을 빌어 세력을 포진하여, 적은 힘으로 세력이 큰 것처럼 보이게 하면, 기러기의 날개가 점점 자라서 위엄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위세를 발휘하게 된다" 여러 양산박의 호한들이 장삿꾼으로 변장하여 속이니 관병들은 뭐가뭔지 알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결국 "소판개화황니강(小販開花黃泥崗), 양지통실생신강(楊志痛失生辰綱)"하게 되는 것이다.

 

송강이 고당주를 칠 때, 지부 고렴에게 연이어 두번이나 패배한다. 오용(吳用)은 저녁에 고렴이 반드시 자신들의 군영을 칠 것이라고 예상하여, '공성계'를 펼치고, 결국 고렴은 헛탕을 치고 만다.

 

오용의 수법과 비교하면, '공성계'의 조사는 당연히 <삼국연의>의 제갈량이다. 실제로 '공성계'를 제외하고도 ,군사전술방면에서, 두 소설은 서로 부딛치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의 유명한 '화소적벽(火燒赤壁)'을 <수호전>에서도 본받아 사용한다. 고구(高俅)가 양산을 2차로 공격할 때, 수전의 방식으로 출격한다. 안전성을 고려하여, 고구는 병사들에게 "매 3척을 한 줄로 서로 엮고, 그 위에 판을 깔고, 배꼬리부분은 철환으로 고정시키도록" 명한다. 오용은 역시 화공의 계책으로 대응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삼국연의>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간계'는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주유가 정보공작을 통하여 장간을 이간시킨 이야기는 청나라에서도 활용한다. <수호전>에도 당연히 형형색색의 이간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마도 <삼국연의>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실현난이도로 보면 더욱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구문룡' 사진과 '화화상' 노지심이 화주에 갇혀 있을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양산은 일거에 오백명을 동원하여 변장한 후 정찰을 하도록 보낸다.

 

양산은 먼저 '조정에서 파견하는 전사태위가 서악묘로 가서 향을 올리고, 황하에서 위하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후 오용은 과감하게 출격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500명의 세작을 보내어, 태위 일행을 막고, 그 500명이 태위의 부하인 것처럼 위장한다. 마지막에 태위의 이름으로 화산태수를 성에서 나오게 만들어 사묘안에서 참살해버린다. 그후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하여 화주를 차지한다.

 

고대 정찰역사를 보면, 변장하여 급습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일거에 오백명을 조직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3. 구호

 

전략층면에서는 <삼국연의>의 고첨원촉(高瞻遠矚)이 <수호전>을 압살한다. 전술방면에서는 백중지간이다. 그러나 '사상동원'분야에서는 <수호전>이 오히려 <삼국연의>를 넘어선다.

 

확실히 군사동원업무에서 명청농민군의 지도자들은 <수호전>을 더 많이 참고한다.

 

명나라 만력14년, 산동에서 종교조직의 반란이 발생한다. 기밀이 누설되어 이 반란은 준비단계에서 진압되어 버린다. 그런데 격문에는 "군영취회(群英聚會), 대천행도(代天行道)"라는 말이 나온다. 2년후, 안휘 안경시의 유여국(劉汝國)이 남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구호는 바로 "대서잔부제반(大書剗富濟貧), 체천원수(替天元帥)"였다. 천계연간, 서홍유(徐鴻儒)는 "백련교를 내세워, 양가루를 본거지로 삼고, 양산박의 고사를 재연하고자 했다."

 

명말청초의 사계좌(査繼佐)가 편찬한 <명서>에는 이것이 <수호전>이 조성한 3번의 큰 화라고 적었다. 이 세번의 화를 겪으면서 대명왕조는 '원기가 모두 상하게' 된다.

 

이 세번의 반란은 그저 '자그마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말기에 반란군의 수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명말농민군은 특징이 있었다. 즉, "여러 도적들이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별호를 써서 민중을 동원했다." <수호전>에 나오는 인명을 별호로 쓰는 반란군 수령만 근 40여명에 이른다. "송강" "흑선풍" "혼강룡"등의 별명을 그들이 가장 즐겨 썼다.

 

<삼국연의>의 인물도 마찬가지로 별명으로 사용된다. <삼국연의>에서 농민군의 우두머리들이 가장 즐겨쓰던 별호는 하나가 조조이고 다른 하나가 장비이다. 이 두 사람뿐이다. 

 

농민군중의 발군은 장헌충과 이자성이다. 이들도 역시 <수호전>의 영향을 받았다. 이자성은 스스로를 "봉천창의대원수(奉天倡義大元帥)"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수호전>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가 초기에 만든 "삼십육영(三十六營)"도 <수호전>의 삽십육천강, 칠십이지살이라는 조직구조에서 따온 것이다.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설 때, 장헌충은 "항상 사람들에게 <수호전> <삼국연의>등 책을 이야기하면서, 무릇 매복이나 기습때는 소설의 방식을 따라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호전>에서의 주장과 사상은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장헌충은 심지어 자신이 사람들을 살륙할 것에 대하여 이런 핑계를 댄다: "짐이 그동안 주살한 자들은 모두 하늘을 대신하여 하늘의 도리를 행한 것이다(代天行道), 억울하게 죽인 것이 아니다."

 

정말 상상하기도 어렵다. 남으로는 중경, 사천에서 북으로는 동북까지 비정부군의 우두머리들은 병법서를 보지 않고, 소설을 보앗다는 것이. 더욱 기괴한 점은 이 두 권의 소설에 의존한 그들이 결국 대명제국을 뒤흔들고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