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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258

강청(江靑)은 왜 자살했는가? 글: 양은록(楊銀祿) '문혁' 역사를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강청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을 것이다. 국내외에 어떤 신문잡지는 그녀에 대하여 계속 보도를 하고 있다. '문혁'기간동안 강청은 모택동의 권위와 자신의 지위를 가지고 호풍환우하며 권력이 아주 강했고, 영향이 아주 깊었다. 이.. 2012. 9. 19.
제갈량: 미묘한 군신관계로 본 인격분열 글: 호각조(胡覺照) 필자는 <출사표에서 한 것은 황제꿈이다>라는 글에서 이미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근거를 나열한 바 있다: (1) 남정에서 성도로 돌아올 때, 이미 '오석'을 받았다. 즉, 금부월 1병, 곡개 1구, 전후우보거 각 1부, 취고수 각 1대, 호분용사 육십명. 이것은 대신.. 2012. 8. 18.
관도지전(官渡之戰)의 수수께끼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관도지전은 유명한 전투중 하나이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기념비적인 전투이다. 이것이 유명한 이유는 소수로 다수를 이겼고, 약한 군대를 이끌고 강한 군대를 이겼기때문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검토해볼 점이.. 2012. 8. 15.
사마의(司馬懿) 자손3대는 어떻게 조조집안의 강산을 빼앗았는가? 작자: 미상 동한말기에서 위진때까지 정권은 분할되고, 번왕들이 난립하여 전체 정치국면이 아주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정권의 교체과정은 하나의 강물이 산길을 따라 여러번 굽어서 흘러가는 것같았다. 이때 자주 바다의 파도보다 더 미친 듯한 파도와 바람이 불기도 .. 2012. 8. 15.
기원223년: 공명향좌(孔明向左), 위연향우(魏延向右) 글: 조염(趙炎) 제갈량과 위연이 불화했다는 증거는 주로 <삼국연의>의 '반골설(反骨說)'과 정사에 나오는 '자오곡기모(子午谷奇謀)'를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의 말에 의존할 수는 없다. 유한한 사료도 제갈량이 도량좁.. 2012. 7. 14.
조운(趙雲)은 무장이 아니라 문신이다. 글: 이회순(易懷順) 만일 조운이 문신(文臣)이라고 한다면 논란을 한바탕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조운이 무장(武將)이라는 것은 확실이 의문이 든다. 조운의 오호상장(五虎上將)이라는 신분은 주로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그런 기.. 2012. 6. 29.
조식(曹植)은 왜 황제에 오르지 못했을까? 글: 이치아(李治亞) 조식은 재주가 뛰어났고, 문학적 수준이 아주 높았다. 일찌기 조조(曹操)는 조식을 아주 높이 평가했고, 그를 후계자로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조는 점점 조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후계자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대체로 다.. 2012. 6. 28.
장양(張讓): 황제가 '아버지'라고 부른 환관 글: 이치아(李治亞) 태감은 몸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역사상 적지 않은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황제를 끼고 명령을 내렸으며, 어떤 사람은 여러 신하들을 압도했다. 어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지만, 일단 득세하면 왕왕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횡한다. 처자식이 없기.. 2012. 6. 3.
조조(曹操) 삼부자의 이름풀이 글: 왕굉화(王宏華) 많은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삼조(三曹)'는 '삼사마(三司馬)'만큼 능력이 있거나 힘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의 각도가 아니라, 시간의 각도에서 보자면, 조조 삼부자가 더욱 성공적이다. 문학적으로 건안풍골을 공동으.. 2012. 5. 15.
"소흥사야(紹興師爺)"에 관하여 글: 담여위(譚汝爲) "사야(師爺)"는 하나의 직업군이고, 오랜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명,청이전에는 사람들이 "막료(幕僚)"라고 불렀다. 문학작품 <삼국연의>에 나오는 조조의 막료 장간(蔣干), <수호전>에서 산에 오르기 전의 압사(押司) 송강(宋江), <홍루몽>에 나오는 가정(.. 2012.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