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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감녕(甘寧): 동오 제일맹장

by 중은우시 2016. 3. 16.

글: 일세소랑(逸世蕭郞)


동오 손권의 수하에는 장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무력을 논하자면 모두 삼국초일류무장의 반열에 들기는 어려운 것같다.

손견, 손책은 용맹함으로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특히 손책은 삼국시대 강호에서의 지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패왕(小覇王)"이라고 불리웠는데, 절대 허명이 아니었다. 무력을 논하자면 손책은 삼국시대 초일류급의 맹장이다. 그라나, 손책이 죽자, 동오의 초일류맹장은 마치 졸지에 끊어져 버린 것같다. 용맹했던 태사자(太史慈)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손책, 태사자가 죽은 후에 동오에는 맹장이 없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동오에 한 명이 맹장이 있는데, 우리가 절대 무시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바로 감녕, 감흥패(甘興覇)이다.


감녕은 원래 강적(江賊)의 우두머리이다. 그와 그의 수하는 호랑이가죽으로 배를 감싸고 몸에는 방울을 달았다. 사람들은 그를 "금범적(錦帆賊)"이라고 부른다.감녕과 부하들은 수전에 능했고, 강에서 바람처럼 오갔다. 현지의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감녕도 정도를 걷고 싶어했으나 괜찮은 주군을 만나지 못했다. 당시 손견이 금방 죽었고, 손책은 스스로를 지키기도 힘들어서,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도 원술의 수하로 있으며 우울한 상태였다. 그래서 감녕은 손책에게 의탁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감녕은 황조(黃祖)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강적 출신이므로, 시종 황조에게 중용되지 못한다.


황조와 동오가 교전할 때, 감녕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을 선보인다. 감녕이 나서자마자 화살 하나로 능통(凌統)의 부친 능조(凌操)를 죽여, 명성을 크게 떨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능조의 아들인 능통과 원한을 맺는다. 부친을 죽인 원수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나중에, 손권이 대단한 인물이 되어 강동6군81주를 통치한다. 감녕은 손권이 영웅이라 여기고 황조를 버리고 손권에 투신한다. 손권은 감녕의 무공이 뛰어나고, 수전에 능하며, 병법에 통달한 것을 보고 그에게 중임을 맡긴다.

208년, 감녕은 계책을 올려 이릉(夷陵)을 기습하여 얻는다. 그러나 천명도 안되는 감녕은 조인의 4,5배나 되는 인원에게 포위당하고, 매일 화살이 비오듯 쏟아진다. 모든 사람들이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때, 오로지 감녕만 태연자약했다. 주유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낸다. 감녕은 전투에 용맹할 뿐아니라 모략에도 뛰어나서 대장의 풍모를 갖춘 것같다.

  

나중에, 감녕은 노숙(魯肅)을 따라 익양(호남경내)을 지키고 관우를 막아낸다. 관우는 삼만병마라고 칭하며 친히 전예졍사 5천을 골라서, 물건을 집어던져 상류 십여리의 얕은 곳을 막는다. 밤에 강을 건널 것이라고 말한다. 노숙은 여러 장수들과 계책을 논의했다. 감녕은 당시에 3백명이 병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5백명만 더 줄 수 있겠는가. 내가 나서서 그를 막겠다. 관우가 나 감녕의 이름을 들으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담량이 있어 강을 건너온다면 나에게 생포될 것이다." 노숙은 그 자리에서 1천을 뽑아서 그에게 준다. 감녕은 밤을 새워 상류로 가서 방어진을 친다. 관우는 감녕이 왔다는 말을 듣고, 상대방에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도하계획을 포기한다. 그리고 강변에 장작을 묶어서 군영을 만든다. 후인들은 관우가 군영을 차렸던 곳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삼국시대에 이처럼 관우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감녕일 뿐일 것이다. 이를 보면 감녕의 담량은 화하에 명성을 떨친 관우에 전혀 못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제2차합비대전때 감녕은 사병들에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 오르고 직접 성을 함락시킨다. 다만, 손권은 장료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여러 장수들은 손권을 호위하여 포위망을 뚫는다. 주태는 창에 십여번 찔리고, 감녕은 사기를 떨치면서도 전혀 상처입지 않는다. 이 전투에서도 감녕의 뛰어난 점을 드러낸다.

그후 조조는 40만대군을 이끌고 수유구로 온다. 감녕은 그러나 3천명을 이끌고 조조를 상대한다. 저녁에 감녕은 백명의 정예병사를 모아서 조조의 군영을 기습하고 좌충우돌하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다니는 것같았다. 조위가 반격해올 때는 이미 감녕이 군영으로 돌아온 뒤였다. 이는 동오의 병사들 사기를 크게 끌어올려준 일이다. 장요에게 소요진에서 패배했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삼국연의>에서 언급하는 그 장면이다: 감녕이 백명의 기병으로 조조의 군영을 기습했다. 손권이 찬탄하여 말한다: "맹덕에게 장료가 있지만, 고에게는 흥패(감녕)가 있으니 족히 상대할 만하다." 장료는 위나라의 최고급 장수이다. 손권은 감녕을 장료와 대등하게 언급한 것이다. 이를 보면 감녕이 손권의 마음 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감녕이 이렇게 용감한데, 왜 항상 우리 후세인들은 그를 잘 언급하지 않을까? 이는 그의 주공 손권 때문이다. 그는 수성의 주공이다. 강동을 수십년간 통치하면서, 자위반격외에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적은 드물다. 그래서 감녕이 전쟁터에서 자신의 용맹을 뽐낼 기회가 적었다. 그외에 삼국에서 감녕과 싸운 사람은 대부분 일류의 맹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녕의 진정한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평생의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오에서 누군가를 삼국일류맹장이라고 칭한다면 감녕을 빼고 누구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감녕 말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