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삼국연의

손권(孫權): <삼국연의>에서 가장 왜소화된 영웅

중은우시 2016. 7. 16. 23:04

글: 정정(丁丁)


삼국시대가 근 이천년동안 가장 주목받는 역사가 된 근본원인은 두 부의 유명한 저작때문이다: 하나는 바로 나관중이 쓴 중국고대사대명저중 하나인 <삼국연의>이고, 다른 하나는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이다. 비록 한 부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역사를 쓰고, 다른 한부는 정통사서라는 이름으로 삼국역사를 쓰지만 자세히 이 두 부의 위대한 저작을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설도 좋고 사서도 좋고, 그들은 최소한 세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첫째는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완성했고, 둘째는 인물을 잘 표현하는 것을 최대의 특징으로 삼았다. 셋째는 많은 장면을 아주 멋지게 썼고 문학성도 비교적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국인물에 대한 관심은 이 두 부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들이 묘사한 이야기를 천년이상 즐겨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부의 위대한 저작을 읽으면서 그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삼국의 여러 영웅인물중에서 특히 조조, 유비, 손권의 3대 핵심영웅중에서 손권은 동시에 두 부의 작자로부터 가장 심각하게 왜소화시켜진 영웅이라는 것을. 우리는 조조와 그의 부하인 여러 영웅에 대하여 그리고 유비와 그의 여러 위대한 영웅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모두 그들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다. 다만 비교하자면 손권은 상대적으로 낯설고, 특히 그의 수하인 위대한 영웅중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심지어 낯설다. 그리고 심각하게 왜소화되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바보같이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노숙. 우리가 삼국에 대하여 얘기할 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노숙이 어떻게 손권부하중 핵심 모신이 되었는지 의심하고, 그를 백치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손권이 십만대군을 이끌고 조조의 수하인 장료의 오백명에게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 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그가 영웅이라는게 이상하다고 여긴다. 기실, 우리는 손권과 그의 수하영웅들에 대하여 이러한 오해를 갖게 된 것은 모두 이 두 부의 작자의 편견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의 손권 및 그의 수하영웅들에 대한 인식을 오도했고, 심각하게 저평가하고 왜소화시켰다.


두 부의 위대한 저작의 작자는 왜 약속이나 한 듯이 손권과 그의 수하영웅을 왜소화시켰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는 진(晋)왕조의 대신이고, 그는 10년의 시간을 들여 이 위대한 저작 <삼국지>를 썼다. 당연히 진나라의 전신인 위나라를 주선(主線)으로 삼았다. 그래서 <삼국지>에서 <위국지>를 가장 앞에 두었다. 조조와 부하영웅의 장거를 반드시 크게 써야 했다. 그래서 조조의 가장 자랑할만한 관도지전을 <삼국지>에 크게 그 내용을 적었다. 조조의 휘황한 이미지는 여기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그리고 조조의 오점, 패점에 대하여는 쓰지 않거나 간략히 쓰고 지나갔다. 그래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적벽대전은 삼국정립의 전쟁이다. 그것은 규모가 아주 큰 전쟁이다. 그 광경은 관도지전보다 적지 않다. 다만 조조가 대패하였고, 엉망진창으로 패배하였기 때문에, 조조는 이후 남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국지>에는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간다. 설사 <오국지>에서도 그다지 많이 써주지 않았다. 그외에 순욱의 죽음에 관하여 <삼국지>에는 엉터리로 적어놓았다. 왜냐하면 이는 조조의 이미지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추측하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삼국지>를 읽으면, 조위정권에 대하여 쓴 것이 가장 많다. 그의 수하영웅까지 합쳐서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우리는 조조의 수하에 몇몇 모사의 모략이나 무장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는 모두 아주 평범하다. 조조 수하의 제일명장인 하후연은 황충의 칼아래 죽었고, 대장 장합도 별 게 아니었다.


유비는 한(漢)왕조의 여맥(餘脈)으로 역사를 쓰는 진수에게 있어서 자연히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국지>에 실력이 가장 약소했던 촉국을 두번째로 쓰는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높이 평가했다. 비록 촉국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전설, 기억 심지어 상상을 동원하여 써내려갔다. 그래서, 제갈량의 위대한 이미지는 진수의 글에서 거의 무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융중대>에도 결함이 있고, 오출기산도 기본적으로 승리한 적이 없다. 유비는 기실 그다지 영광스럽지 않다. 모든 사적은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소인이 할 짓들이다. 친구, 형제, 친척의 명의로 먼저 띄워주고나서 나중에 등뒤에서 칼을 꽂는다. 그리고 다 빼앗는다. 이렇게 하여 유비가 깡패에서 삼분천하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유비의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은 한중전투이다. 조조를 물리치고, 한중왕이 되었다.


동오는 그저 군벌로 한 지방에 할거한 것이다. 조위의 적이고, 또한 한왕조와 그다지 큰 관계도 없다. 유일하게 관계있는 것은 유비와 연합하여 유비의 맹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권은 <삼국지>에서 비록 중요한 한 축이지만, 가장 뒤에 놓아고, 그다지 중요하게 써주지 않았다.


<삼국연의>는 유비를 주선으로 했다. 유비는 한왕조의 여맥을 대표하므로 정통으로 보았다. 그래서, <삼국연의>에서는 유비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삼국연의>는 완전히 문학작품이다. 아예 역사적 사실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히 유비에 대하여는 대거 쓰고 과장하여 쓰다보니, 이화접목식으로 유비와 그의 부하영웅들의 영명함과 위대함을 나타냈다. 촉한정권을 지탱하는 핵심인물인 제갈량도 자연스럽게 <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된다. 적벽대전은 거의 제갈량이 쥐휘한 것으로 적었는데, 실제로는 제갈량의 초선차전, 공성계는 아예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이화접목하여 다른 사람이 한 것을 그가 한 것으로 쓴 것일 뿐이다. 조조는 반면인물로, 자연히 크게 쓰고 과장되게 썼다. 그렇게 하여 그의 간웅으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냈다. 그래서, 조조는 비록 <삼국연의>에서 반면인물이지만, 주요하게 쓴 대상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손권측은 역사이야기에서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일반적으로 생략해버렸다. 육손이 일으킨 석정전투에서 조조를 대패시킨 역사적 사실도 작자는 완전히 무시해버린다.


그래서,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손권과 그의 수하영웅은 모두 삼국시대에 가장 심각하게 왜소화된 영웅이다. 기실, 삼국 3대핵심영웅인물의 하나인 손권측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아래의 열 가지 방면에서의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손권은 유일하게 패배한 전적이 아주 적은 영웅이다. 역사상 진실한 조조는 그저 북방에서 칭웅했고, 관도지전이후 조조는 거의 승리한 적이 없다. 유비는 안팎으로 호응하여 유장을 격패한 것을 제외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전은 한중전투뿐이다. 거기에서 조조를 철저하게 이기고, 조조수하중 가장 중요한 대장인 하후연을 죽인다. 손권측은 거의 패전이 없었다. 비록 합비전투에서 손권이 패했지만, 손실은 없었다. 다만 <삼국연의>에서 말하는 장료가 오백인마를 이끌고 손권의 십만대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냉병기시대에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손권은 전쟁터에서 성장한 영웅인데, 어떤 광경을 못봤겠는가. 손권측의 주요한 전략은 이길 수 있으면 싸우고, 이길 수 없으면 도망치는 것이다. 비록 패전하더라도 손실은 없다. 그리고 손오정권은 조위와의 싸움에서 절대다수는 모두 승리한 것이 많다. 삼국말기까지 모두 조위정권을 이겼다.


둘째, 삼대전투에서 손권측만 혼자서 두번 이겼다. 그리고 조조와 유비에게 모두 이겼다. 삼국시대의 3대전투는 관도지전, 적벽대전, 이릉지전이다. 조조측은 관도지전에서만 이기고(이것은 동오나 촉한과 싸운 것이 아니다), 그외에는 모두 손권측이 이긴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3만대군을 이끌고 조조의 23만가량의 대군을 이겼다(조조는 스스로 80만대군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삼국정립의 기초를 닦는다; 이릉지전때 육손은 3만대군으로 유비의 10만대군을 물리친다. 칠백리연영을 불태워버리고, 10만대군은 몰살한다. 유비는 겨우 몸을 빼서 백제성으로 도망친다. 손권측은 조조측과 유방측과의 핵심전투에서 한번도 패전한 적이 없다.


셋째, 노숙의 탑중대(榻中對)는 제갈량의 융중대(隆中對)보다 6,7년이나 앞선다. 제갈량의 유비에 대한 융중대 전설은 근 2천년이나 전해지며 우리는 즐겨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제갈량의 위대한 모략에 탄복한다. 그러나 동오의 노숙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아주 우매하고 멍청하고 주관도 없으며, 제갈량이 갖고 노는데로 끌려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은 노숙도 제갈량의 융중대에 유사한 우리가 탑중대라고 부를 수 있는 계택을 내놓았다. 노숙이 손권에 투신할 때 방안에서 얘기한 천하모략이다. 제갈량의 융중대와 실제로 대동소이하다. 다만 제갈량의 융중대보다도 6,7년이 앞선다. 이를 보면 전설상의 융중대는 노숙의 탑중대를 베낀 것이라고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현재 이런 견해도 있다. 제갈량의 융중대는 실제로 일찌기 친구들 예를 들어 사마휘, 서서, 방통등과 얘기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즉 집단지혜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숙의 모(謀)와 용(勇)에 대하여는 우리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관우와 노숙의 '단도회(單刀會)'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 관우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노숙의 휘황한 이미지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 명은 문신모사인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서 관우에게로 간다. 설사 관우의 큰 칼아래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말로서 관우를 입다물게 만들었다. 혼자의 힘으로 관우가 병력을 철수하게 만든 것이다. 삼국때 어느 모사가 이런 일을 해냈던가?


넷째, 주유는 적벽대전을 지휘했다. 유비측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했다. 적벽대전은 손권과 유비가 연하하여 조조에 승리한 것이라고. 사실은 어떠한가? 심지어 <삼국지>에도 제갈량이 동오에 사신으로 가서 손권을 설득한 장면이 나온다. 다만 그후에는 유비측의 여하한 흔적도 없다. 적벽대전에서 우리는 주유가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모략을 세우고 전투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는 외에, 유비측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촉지>에서도 어떤 인물도 적벽대전과 관련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적벽대전은 기실 주유 한 사람이 총사령관으로 지휘한 전쟁이다. 완전히 손권측의 업적이고, 유비측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전설속의 조조는 문무를 겸비했는데, 위대한 오대모사외에 사마의, 종요등의 모략이 뛰어나다. 무장도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주유의 앞에서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그냥 오줌을 지렸다. 제갈량의 소위 "삼기주유(三氣周瑜)"는 완전히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유를 폄훼한 것이다.


다섯째, 유비측은 계속 손권측에 붙어서 발전하고 존재했다. 유비가 형주까지 흘러들어가고, 조조가가 형주를 점령하자, 유비는 손권에게 형주를 빌려서 비로소 근거지를 갖게 된다. 그 후에 서쪽으로 촉을 도모할 기반을 갖게 되었다. 유장의 자리를 차지한 후, 관우는 강릉전투에서 희생된다. 유비는 이릉대전을 일으킨 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축소된다. 그 후에 제갈량은 또 은 동오와 우호관계를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오와의 연맹에 의존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는 상호의존이다. 다만 의존도는 유비측은 손오측을 떠나면 존재할 수가 없는 정도이다. 삼국말기에 이르러, 촉한정권이 소멸된 후에도 동오정권은 10여년을 더 존재했다.


여섯째, 조조측이든 유비측이든 중요장수는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다. 유독 손권측만 이런 현상이 없다. 무슨 관우가 혼자서 만명을 상대하지만 최종적으로 여몽에게 피살된다. 그리고 무슨 방통의 모략이 대단하다고 하고, 제갈량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생명도 지켜내지 못했다. 자잘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장비도 자신의 수하에게 죽는다. 유비조차도 홧병으로 죽는다. 그릭 조조측의 하후연, 장합, 전위등의 대장도 모두 전쟁터에서 죽는다. 조휴도 홧병으로 죽는다. 유독 손권측은 중요장수중 누구도 전쟁터에서 전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인물중에서도 홧병으로 죽지 않았다.


일곱째, 제갈량은 5차에 걸쳐 북벌하지만 그저 자잘한 작은 전쟁에서 한번 승리한다. 육손은 4차에 걸쳐 북벌하면서 한번도 패전이 없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은 신기하게 6차북벌을 했다고 하지만, <삼국지>에는 실제로 아무리 계산을 다 해주어도 5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북벌은 아예 북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북벌에서 승리한 적은 없다. 한번 승리했다고 하는 것도 그저 작은 조우전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우리는 동오의 북벌에 대하여는 아는게 별로 없다. 그러나 동오는 실ㅈ[로 자주 북벌했다. 육손이 이끄는 북벌만 4번이다. 3승 1무. 한번도 패전은 없다. 그리고 석정전투에서 하마터면 조위는 근거지까지 쳐들어갈 수 있었다. 육손이 조심성이 많지 않았고 주항의 모략을 채택했더라면 일거에 조위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여덟째, 초선차전, 공성계는 제갈량의 걸작이 아니다. 모두 손권측의 걸작이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의 위대한 군사재능은 주로 초선차전과 공성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작자의 이화접목의 공로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아무 관계도 없다. 초선차전은 손권의 작품이다. 공성계는 육손의 제2차북벌때 작품이다. 당시는 손권측이 양양을 공격할 때인데, 손권은 형세가 불리하다는 전제하에 철군한다. 육손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남겨서 엄호하게 한다. 또 다른 모신인 제갈근도 놀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육손은 허장성세로 우선윤건(羽扇綸巾)으로 공성계를 펼친다. 그리고 심복 한편(韓扁)을 보내어 손권에게 거짓으로 서신을 보내는데 조조군에 붙잡힌다. 여기서 육손의 군사배치를 알게 된다. 그리고 육손은 제갈근과의 상의도 무시하고, 심복이 잡히는 것도 무시하고 사람을 보내어 농작물을 심는다. 그리고 부하와 평화시처럼 바둑을 두고 논다. 제갈근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에게 와서 상의한다. 이때, 육손은 제갈근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여전히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한다. 제갈근에게는 수군을 이끌게 하고(손오의 수군은 가장 강대하다. 그래서 가장 안전하다), 자신은 육군을 이끌고 양양으로 진군한다. 육손이 대단하다는 것을 아는 위군은 육손이 원래의 계획대로(한편에게서 들었다) 양양을 치러 온다는 것을 보고는 그저 둘러싸기만 하고 진공하지 않는다. 육손은 포위망으로 들어간 후, 사냥을 한다고 하면서, 암중으로 주준, 장량등을 보내어 강하, 신시, 안륙, 석양등지를 공격한다. 오군이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 위군은 놀라서 급히 성을 막는다. 그러나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위군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 최종적으로 성문을 닫는다. 1만군대의 육손이 천여명을 참살하고 안전하게 철수한다.


아홉째, <삼국연의>에는 왜 이릉지전후의 동오의 휘황함을 쓰지 않았을까? 그것은 작자가 거짓으로 쓴 것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써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릉전투후, 동오는 강릉과 석정의 전투에서 휘황한 전과를 거둔다. 다만 <삼국연의>에는 쓰지 않았다. 왜 쓰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삼국연의>에는 이릉지전때 유비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육손에게 엉망으로 패해서 다시 원래대로 쪼그라든 전투를 미화하기 위하여 육손이 이기기는 했지만, 참열했다고 적었다. 대장 정보, 황개, 주연등 손권측의 중요장수를 모두 전쟁에서 죽는 것으로 처리한다. 사실상 이릉전투에서 손권측은 중요장수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 정보, 황개는 그 이릉지전이전에 이미 병사했다. 주연은 이후의 강릉전투에서 혼자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조위측의 조진, 하후상, 장합등 고급장수들이 이끄는 대군을 6개월이상 막아낸다. 조위대군은 결국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난다. 이를 통해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관우와 비교하자면, 같이 강릉에서 싸웠다. 관우도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만, 결국 형주를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잃었다. 그러나 나중에 주연은 일련의 북벌에서 석정전투를 포함하여 모두 핵심역할을 한다. 마지막에는 68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만일 <삼국연의>에서 오나라의 이런 휘황한 전적을 적고 싶다면, 이미 작자가 그들을 이릉전투에서 죽여버렸는데, 어떻게 써내려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안 쓴 것이다.


열째, 삼국시대 말기, 손권이 죽은 후, 동오는 서진에 대패한다. 삼국말기 서진이 조위를 대체한다. 이때의 삼국을 보면, 촉한은 언제든지 멸망할 수 있는 상태였고, 계속 패퇴했다. 승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동오는 여전히 육항(陸抗)같은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장군이 있었다. 서릉전투에서, 마찬가지로 3만대군으로 양호(羊祜)가 이끄는 8만대군외에 투항해온 2만대군을 합쳐 최소한 10만대군이 되는 부대에 승리한다. 그리하여 서진의 양호는 전쟁후에 강등되고, 그 이후에는 평범한 삶을 산다. 그리고 서진은 동오에 육항이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전투는 실제로 삼국이 3대대전이후의 제4의 대전이다. 이미 쇠락한 동오가 이때도 여전히 혼자서 북방의 서진을 막아낼 수 있었다. 촉한정권에는 이런 장군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외에 손권은 모든 삼국영웅중 황제를 칭한 것이 가장 늦었다. 삼국영웅은 서로 상대방이 한왕조에 불충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많은 영웅등이 이로 인하여 타도된다. 설사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자신은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다만 실제로 황제와 다를 바 없었따. 그리고 자신의 사후에 조비가 황제를 칭한다. 그러자 유비도 뒤쳐지지 않고 바로 황제를 칭한다. 손권만이 모두 황제를 칭한 후에야 비로소 황제를 칭했다.